015. 왜 그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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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5. 왜 그랬어요
2023.02.20.
한 번만.
푸릇하게 질린 얼굴로 질리언은 애원했다.
긴 속눈썹이 드리운 그림자마저 몹시 처연했기에, 비앙카는 도저히 안 된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허락해주세요.”
약아빠진 남자.
그는 자신이 어떻게 해야 비앙카를 쥐어흔들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강제하거나 군림하는 것은 비앙카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평생을 정당하게 약탈당해왔기에 비앙카는 가진 것을 빼앗기는 것이 익숙했다.
사재와 같은 물건과 금품은 기본이었고 가끔은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마저 자연스레 박탈당했다.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기에 비앙카는 굴종하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
겉으로 순순히 굴기만 한다면, 마음 깊숙이 간직한 자신의 감정은 지킬 수 있으니 그런 것쯤이야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해줄 수 있었다.
질리언이 약아빠졌다는 건 그래서였다.
그는 절대 비앙카에게 명령하지 않았다.
언제나 정중하고, 상냥하게 비앙카에게 애원했다.
그녀가 진심으로 응해줄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렸다.
바로 지금처럼.
그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을 아낌없이 사용했다.
조금 눈을 내리까는 것만으로도 위태로운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앓아누운 건 비앙카 자신이었는데, 도대체 지난 사흘이 얼마나 지독했던지 그는 당장에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질리언.”
“더는 바라지 않을게요.”
그는 느릿하게 손을 뻗어 파들파들 떠는 비앙카의 등을 부축했다.
등골을 가로지르는 타인의 온기에 잊고 있었던 지난밤이 떠올랐다.
우묵한 등골을 따라 느릿하게 움직이던 상냥한 손길.
‘잘 자요’
온기가 가득 물린 부드러운 목소리.
홀로 남겨진 듯하던 그 날, 기꺼이 품을 내어주던 질리언의 다정함이 떠오르자 가슴 깊은 곳에서 왈칵 무언가가 넘어왔다.
비앙카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조건을 달아서.
“이번만요.”
질리언은 한 번이라고 했지만, 그의 한 번은 다채롭게 쓰일 게 분명했다.
“그럼, 오늘만.”
이것 보라지.
재빨리 말을 바꾸는 질리언의 모습에 비앙카는 실소를 터트렸다.
이 약은 남자는 수프는 ‘오늘’ 한 번만 먹여준다고 하거나, 혹은 수프를 ‘한 번만’ 먹여주거나 ‘수프’는 한 번만 먹여주거나 하는 식으로 갖가지 말장난으로 자신을 농락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거다.
“오늘만?”
“오늘은.”
혹시나 해서 되묻자, 또 한 번 ‘오늘은’이라고 말을 바꾼다.
눈앞에서 어떻게든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그의 모습에 화가 나야 마땅한데, 비앙카는 화는커녕 자꾸 피식피식 웃음이 샜다.
비앙카는 제게 수프를 떠먹이려는 질리언의 팔을 손으로 꾹 누르며 속삭였다.
“오늘은……같이 먹어요.”
입꼬리를 바짝 잡아당겨 생긋 웃는 것도 잊지 않았다.
딱 그가 했던 그대로.
“아.”
그러자 맞은편 남자에게서 낮은 웃음이 터졌다.
질리언은 굉장한 달변가였다.
말허리를 자르고 제게 유리한 방식으로 대화를 끌어나가는 모습에서 이미 짐작했으나 기대보다도 꽤, 라고 덧붙여야 했다.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으나 식사하는 동안 그는 자연스럽게 비앙카의 시중을 들며 자신의 식사를 챙기고 그 와중에 능숙하게 화제를 이끌었다.
“전담 시녀가 정해졌다지요?”
“네, 줄리라고.”
“줄리?”
네, 라고 대답하기 위해 입을 벌리는 순간 알맞게 식은 수프가 쏙 들어왔다.
비앙카는 입안을 가득 채운 고소한 것을 꼴딱 삼키고 네, 라고 대답했다.
“어리긴 한데, 정말 열심히 하더라고요.”
조그맣게 뜯은 빵조각을 꾹꾹 씹어 모조리 삼킨 후, 질리언이 입을 열었다.
“열심인 것도 좋지만, 경험이 풍부한 시녀 쪽이 조금 더 편하지 않으실까요?”
“아, 아니에요. 전 줄리가 좋아요.”
“아무래도 서툴 텐데요.”
말끝에 설명하듯 질리언이 ‘어리다면서요’라고 덧붙였다.
그 순간 비앙카는 줄리가 떠올랐다.
‘북부의 성년은 열다섯이랍니다.’
‘전 어리지 않아요.’
비앙카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줄리면 충분해요.”
흐응.
질리언은 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작게 콧소리를 낼 뿐이었다.
슬쩍 들린 한쪽 눈썹이 꼭 언짢음을 감추는 것 같아 비앙카는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전 정말 줄리가 좋아요. 오늘도 제가 지루할까 봐 하루 종일 옆에서 이야기도 해주고 정말 많이 애썼답니다.”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어요?”
“북부에 관한 이야기요.”
“북부요?”
캐묻는 듯한 질리언의 말에 비앙카가 불현듯 표정을 굳혔다.
줄리를 곁에 둘 생각에 다급히 말을 하느라 채, 가리지 못했다.
테르미나가 발로크를 염탐하는 거로 비쳐졌나?
뒤늦게 아차하는 생각에 비앙카가 작게 헛기침을 하며 별 것 아니라고 말을 돌리려 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북부의 어떤 이야기?”
아.
머뭇거리며 말을 고르는 잇새로 아직은 따끈한 수프를 담은 숟가락이 밀고 들어왔다.
비앙카는 힐끔, 질리언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골랐다.
하지만, 훔쳐본다고 생각했던 걸까.
질리언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걷혔다.
“아…….”
순식간에 서늘해진 질리언의 모습에 비앙카는 머릿속이 하얗게 비고 말았다.
“죄송해요.”
“…….”
“뭔가 캐내려던 건 절대 아니에요. 그냥 북부가 궁금해서…….”
“하아…….”
질리언의 한숨에, 비앙카는 어깨를 움츠리며 작게 웅얼거렸다.
“미안해요.”
달칵.
들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는 소리.
툭.
그리고 이어 빈 그릇을 내려두는 소리가 연이어 울린다.
크지도 않은 소리가 굉음같이 울렸다.
곁눈질로 보이는 질리언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비앙카는 마른침을 모아 삼켰다.
‘사람처럼 대접해드리니, 정말로 공작부인이라도 된 양 착각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죽이지 못해 살려왔더니, 제 분수도 모르고 활개 치는 꼴이라니.’
차라리 소리 내 빈정거리는 쪽이 견디기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쯤.
고요한 황금빛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부인.”
“네.”
그의 손이 느릿하게 뻗어 나오는 것을 보면서도 비앙카는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하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이것을 피해버리면, 정말로 염탐질했다고 생각할까봐.
비앙카는 질리언이 자신의 두 뺨을 감싸 쥐고 끌어당기도록 가만히 숨죽여 있었다.
기어이 서로의 이마가 맞닿고, 날렵하게 솟은 그의 콧날이 비스듬히 비껴들어 뺨을 찌를 때까지.
비앙카는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부인. 이렇게 하면 보이실까요?”
촘촘한 긴 속눈썹 사이로 보이는 그의 황금안이 찬란해 도통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곳이 그대의 집이라는 내 말은 더할 나위 없는 진심이었답니다.”
뺨을 감싸 쥐고 있던 손이 미끄러지듯 머릿속으로 파고들고, 이내 뒤통수를 촘촘히 감아쥐는 데도 비앙카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진심을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꾸며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애처로웠다.
그릇을 정리하며 굳은 그의 표정이 무슨 의미였는지 비앙카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는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그는…….
“미안해요.”
슬퍼하는 남자에게 비앙카는 사과를 건넸다.
“아니야. 이럴 땐 내게 북부의 이야기를 해달라 하셔야지.”
질리언은 명령을 애원처럼 하는 재주가 있었다.
“내 집에 대해 알려달라, 내게 조르셔야죠.”
차마 반박도 못 하게.
비앙카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머리칼을 배회하듯 느릿하게 유영하던 손가락이 목덜미로 움직였다.
맞닿은 이마는 떨어졌지만, 목덜미를 움켜쥔 긴 손가락이 거미줄 같아 비앙카는 여전히 꼼짝도 못 하고 질리언을 바라보는 채였다.
어서
그가 소리 내 말했는지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해줘요.”
작게 속삭인 말에 그가 웃었으니까.
그는 머리맡을 자처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도 받아보지 못한 부드러운 손길로 머리칼을 쓸어주었다.
스치는 듯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손길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해, 비앙카는 어쩐지 현실감이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구름 위에 붕 뜬 기분.
“어디까지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웨이브랑 얼음벽과 음……. 일곱 성채 이야기를 들을 차례라고 했어요.”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누워 있어서인지 그도 아니면 늦은 밤이라서인지 목소리가 푹 잠겨 꼭 웅얼거리는 것 같은 소리가 되었다.
“일곱 성채라…….”
질리언은 손을 뻗어 길게 머리칼을 쓸었다.
“빙벽 너머의 마물은 발로크만이 상대할 수 있다는 이야기는 알고 계신가요?”
“아뇨.”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비앙카가 대답했다.
몸이 나른하다 못해 물속으로 깊이 가라앉는 기분이다.
“언제부터인지도 모를 까마득한 시절부터 빙벽은 존재했답니다. 테르미나가 존재한 이래로 역사에서는 늘 빙벽이 함께했죠.”
거기에 잠겨 드는 것 같은 질리언의 목소리가 더해지자 비앙카는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졌다.
“사람들은 빙벽 너머에서 넘어오는 마물을 처리하려 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오직 발로크만을 제외하고요.”
그의 이야기는 밤공기와 함께 부드럽게 깔렸다.
“발로크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건 당연했습니다. 마물이, 감히 테르미나에게 발톱을 세우도록 두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죠.”
영구동토인 이곳에 둥지를 틀어가며 테르미나를 지켜야 할 이유가 뭐야?
발로크만이 마물을 상대할 수 있는 거라면, 차라리 발로크가 이 제국을 가지면 더 편하지 않았나?
테르미나를 위해 지킬 이유가 없잖아.
무엇 때문에.
잠깐 사이 비앙카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질문이 떠올랐다.
아무도 의문을 품지 않았기에, 그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는.
“……래서였답니다. 테르미나는 완벽히 지켜져야 했어요.”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질문에 그만 비앙카는 질리언의 말을 놓치고 말았다.
말을 듣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다.
감기는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것이 겨우였다.
“일곱 성채는 그렇게 지어진 거랍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테르미나를 지키기 위한 발로크의 노력의 산물.”
질리언의 시선은 어디 먼 곳을 향한 듯 아득하게 빛이 났다.
그것은 한없이 다정하기도 하고 아련하기도 했으며, 순간 사랑스럽다가도 굉장히 슬퍼 보였다.
비앙카는 그런 질리언의 시선이 무척 낯익은 기분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잠에 반쯤 잠긴 머리로 희미한 기억을 한창 헤집고 있을 때였다.
이마에 닿는 따끈한 느낌에 시선을 퍼뜩 들어 올리니 질리언이 손으로 미간을 꾹 눌러 펴주고 있었다.
“이러면 주름진다니까요.”
아득하던 시선은 말끔히 사라져 있었다.
뺨에 닿는 그의 황금빛 시선이 햇살처럼 따끈했다.
그 느낌이 있지도 않은 옛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듯 너무 그립고 서러워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졌다.
‘갑자기 왜.’
당혹감에 비앙카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리려던 순간이었다.
잠잠한 듯싶던 환청이 머릿속을 울리며 시야가 제멋대로 일그러졌다.
‘왜 그랬어.’
울먹이는 ‘자신’의 목소리에, 마주한 황금빛 눈동자가 부드럽게 접혔다.
“잘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