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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 이 결혼은 무효야! (16/47)


016. 이 결혼은 무효야!
2023.02.24.



“울지 마세요.”

갑작스러운 울음에 당황할 법도 했는데, 질리언은 캐묻는 대신 다정히 눈 밑을 쓸며 달래주었다.


“이제 막,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셨으니 무리하면 안 돼요.”

세상에.

울지 말라는 이유조차 믿기지 않을 만큼 상냥했다.

그래서 더욱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면 그는 이해할 수 있을까.

얼른 그쳐야 하는데, 한번 운다고 자각하자 어떻게 된 게 눈물이 더 솟는다.

비앙카는 고장이라도 난 듯 쉬지 않고 솟아나는 눈물에 마구 문질러 닦았다.


“죄송, 죄송해요.”

그의 기분을 살피려 했지만, 일렁이는 시야에 비친 그는 온통 황금빛으로 번져 표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왜 이러지…….”

‘관심을 끌기 위해서라기엔 너무 천박하군요.’

예법 선생은 비앙카의 눈물을 수단이라고 힐난했고,


‘네가 감히!’

황제와 황태자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며 노여워했다.

그래서 비앙카는 철이 든 후로, 절대 남 앞에서 울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질리언의 앞에서 흘리다니.

멈추지 못하다니!

비앙카는 닦아서 치워지지 않자 얼른 얼굴을 덮어버렸다.


“금방…….”

금방 그칠게요.

손바닥 아래서 헐떡임과 속삭임이 잔뜩 뭉개져 신음처럼 흘러나왔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좋지.

입을 틀어막아야 하나.

그도 아니면…….

비앙카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생각이 엉망이 되다 못해, 난폭하게 튀어 나가던 그때.

그녀를 진정시킨 건 질리언의 사과였다.


“미안해요. 부인.”

비앙카는 생각지도 못한 소리에 얼굴을 가린 손을 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굴은 엉망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여전히 눈물은 쉬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런데, 질리언은 눈물을 보고도 눈살을 찌푸리거나 나무라지 않았다.


“제가 심기를 어지럽혔지요? 잘못했어요.”

오히려 그녀의 울음이 자신의 잘못이라며 사과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멍한 기분에 질리언을 바라만 보던 그때.


“전…….”

“잘못했어요.”

허락을 구하듯 느리게 손을 뻗은 질리언이 비앙카의 눈꼬리를 쓸었다.

마주한 건, 굳은 얼굴도 냉담한 시선도 아니다.

비앙카에게 닿은 건 솜털같이 부드러운 손길뿐이었다.

홀린 듯 바라보는 사이 미처 흐르지 못한 눈물이 고스란히 그의 손아귀로 사라졌다.


“잘못했어요. 부인.”

헐떡임도 눈물도 그의 사과에 모두 기화하듯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제가 잘못했어요. 부인.”

희미하게 미소 짓고 있지만, 질리언의 표정은 더없이 진지했다.


“질리언…….”

그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제 처지를 잊을 만큼 다정하고, 믿을 수 없을 만큼 호의적이며.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만큼 무조건적이었다.


“울지 마세요.”

하지만, 맹세코 이 정도는 아니었다.

비앙카는 자신의 눈물을 처음 마주한, 그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흥분될 거 같으니, 멈추어 달라고 했던가.

입꼬리를 들어 올려 미소 짓던 그는 숨이 막히도록 근사한 수컷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덕분에 주제도 모르고 설레기까지 하지 않았나.

분명 그때의 그는 능글맞은 체할 만큼 여유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다르다.

차라리, 황성을 떠나던 그때처럼 능글맞게 웃으며 괜찮을지도 모른다.

이유 따위는 묻지 않은 채 오직 자신의 잘못이라며 숙이고 들어오는 그의 모습은 얼핏 절박하기까지 했다.

어째서…….


“울지 마세요. 제가 조금 더 잘할게요.”

하지만, 어째서냐고 비앙카는 끝까지 묻지 못했다.

제 죄를 비는 질리언이 웃고 있음에도 너무도 괴로워 보였던 탓이었다.


‘잘못했어요.’

주문처럼 속삭이는 소리에 어느덧 눈이 감기고 말았다.


 


아무래도 이상하지……?”

주인의 말에, 부산하게 움직이던 부관들의 손이 굳은 듯 딱 멈추었다.


“무엇이요?”

테르미나.”

이자르는 턱을 괸 채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를 지척에서 모신 부관들은 이자르가 그 어떤 때보다 날이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느리게 끔뻑일 때마다 긴 속눈썹 사이에 숨어 있던 새카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무도한 자들이지만, 셈에는 누구보다 밝아.”

황금 열 궤짝.

이자르의 땅에는 마르지 않는 황금 광산이 있었다.

황금은 이자르에게 별것 아니라면 아니었으나 다른 이에겐 아니었다.

게다가 이자르의 황금은 순도가 높아 특유의 무름이 발현되는 것이었기에 그 가치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그랬기에, 그의 황금 한 궤짝은 정말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이자르는 황금 열 궤짝에 당장이라도 비앙카를 들려 보낼 것 같이 굴던, 테르미나의 황제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을 거절한 것은 이자르 카르탄.

바로 그 자신이었다.

카르탄의 정비가 마치 돈에 팔려 온 것같이 보일까 봐.

황금의 카르탄이라는 명성에 흠이라도 날까 봐.

누구보다 찬란한 비앙카가 온전한 카르탄이 되길 바라.

그렇게 기다린 일 년이었다.

일국의 수장인 그가 비앙카 테르미나의 처우를 몰랐을 리가 없다.

황후를 잡아먹고 태어나, 부황의 미움을 산 가여운 황녀.

그런 황녀의 몸값으로 카르탄의 황금이 열 궤짝이라니.

그 누구도 비앙카를 건드리지 못하리라.

그뿐이 아니었다.

‘카르탄’은 신부를 맞으러 가며 ‘예물’을 건네는 풍습이 있었다.

예물은 신랑이 신부에게 보내는 존경과 사랑의 표시였다.

그런데 신랑이 다른 누구도 아닌 이자르였다.

풍요의 카르탄을 가진 남자.

그런 그가 신부를 맞으러 오며 얼마나 휘황찬란하게 준비할지는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하리라.

테르미나 황제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포기했다고?

눈엣가시보다 더 미워하는 비앙카를 그렇게 비싸게 팔아치울 수 있는 그 훌륭한 기회를?

타닥. 타닥.

턱을 괸 이자르의 손가락이 몹시 규칙적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이것은 그가 생각에 빠질 때면 하는 습관이기도 했으며 또한, 몹시 화가 났을 때 보이는 버릇이기도 했다.

막사 안의 부관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서로 눈만 굴렸다.

그렇게 몇 번쯤 눈짓이 오간 후였다.

개중 가장 이자르를 오래 모신 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이자르시여. 전해드릴 것이 있사온데 가납하여 주십시오.”

“말하라.”

타닥.

손톱 끝이 나무 팔걸이를 후려치듯 묵직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타닥.


“테르미나 황태자의 이야기에 거짓말은 없었습니다.”

“…….”

“다만, 그자가 이자르께 잊고 고하지 않은 게 있었습니다.”

“무엇이냐.”

착하기도 하지.

어린 뱀새끼가 잊었을 리가 있나.

감춘 거겠지.

이자르는 입술을 못되게 비틀며 웃었다.

타닥.

그의 손놀림이 조금 더 신경질적이 되었다.


“테르미나에서 발로크 공작가에 청혼서를 보냈고, 공작이 청혼서에 응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뻔히 아는 이야기를 구태의연하게 읊는 건 분명 그를 위해 준비된 반전이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자르는 지금 그런 작은 기다림도 내키지 않을 만큼 기분이 별로였다.

카르탄에는 황금이 있다지만, 테르미나엔 철이 있었다.

약조한 신부를 잃고도 이자르가 얌전히 물러난 건 그 때문이었다.

반드시 철이 필요했으니까.

그런데 이 상황에 기다리라니?

성마르게 재촉하자, 그의 앞에 무릎 꿇은 살바르가 속삭이듯 고했다.


“청혼서에 적힌 것은 비앙카 테르미나였습니다.”

“그런데?”

“황적에 비앙카 테르미나라는 황족은 없습니다.”

“비앙카 테르미나가 황족이 아니면 무어냐?”

이게 무슨 소리야.

이자르는 한쪽 눈썹을 추켜 올렸다.

분명 언짢아하는 기색을 보았을 텐데도, 살바르는 속 시원하게 설명을 하는 대신 살짝 웃기까지 했다.


“이자르시여. 비앙카 황녀는 이미 한 달 전에 황적에서 지워졌습니다.”

심드렁하던 기색으로 방만하게 의자에 늘어져 있던 이자르가 튕기듯 일어섰다.


“황녀가 아니라고?”

“아마도 공작의 손에 죽게 되리라 생각해서 지운 듯싶습니다.”

괴물 같은 공작을 손에 넣고 흔드는 미끼로 쓰는 것과 별개로 감히 ‘발로크’가 ‘테르미나’에게 위해를 끼쳤다는 전례를 남기고 싶지 않은 오만함이 시킨 일이 아니었을까.

이자르는 팔짱을 낀 채 아무 말이 없었다.


“…….”

살해당한 비앙카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고 지워질 터였다.

그야말로 개죽음.

황적을 살필 생각을 감히 그 누구도 하지 못할 테니 발로크 공작가는 모를 것이고.

테르미나는 이 일을 기회 삼아 발로크를 더없이 완벽하게 착취할 수 있게 될 테니, 황금 열 궤짝을 물어내고 이자르의 예물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앙카 테르미나, 아니 비앙카가 살아서 북부로 향했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이자르가 살바르에게 다시 물었다.


“이것을 누가 알지?”

“한 달 전, 황제궁의 시종장이 계단에서 미끄러져 낙상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자는 죽었겠군.”

살바르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충분히 흥미로운 이야기다.

하지만 딱 그뿐이었다.

음험한 자들이 준비한 덫에 걸리지 않아 다행인 건 발로크였지, 신부를 빼앗긴 이자르에겐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였다.


“아아…….”

운이 좋은 자로군.

이자르는 다시 심드렁해져 그의 의자에 몸을 던지다시피 해서 늘어졌다.

테르미나의 뱀들에게 예물로 무얼 준비했는지 슬쩍 말해놓을 걸 그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짜증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자꾸만 아쉬워진다.

이자르는 태후가 속삭이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폐하, 그대는 반드시 테르미나의 딸을 신부로 맞으셔야 합니다.’

‘제국 제일미라는 소문이 모후의 마음을 설레게 하였습니까? 카르탄의 딸들도 꽃같이 아름답지요.’

‘폐하, 고작 그런 이유일 리가 있나요?’

태후가 눈을 곱게 접어가며 웃었다.

수십 년 전, 카르탄의 별이라는 수식어를 받을 만큼 아름다웠던 그녀는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지금도 그 미모가 시들지 않았다.

오히려 흐르는 세월에 원숙미까지 더해져 고귀해지기까지 했달까.

저런 이를 모후로 두고 자란 이자르는 성년을 훌쩍 넘길 때까지 그 누구도 마음에 차지 않아했다.

그랬기에 모후의 뜬금없는 비앙카 황녀 소리가 제국 제일미라서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모후의 이야기는 그게 아니었다.


‘일찍이 황녀를 가리켜 테르미나의 대주교가 ‘오랜 세월을 기다려온 분’이라고 했다는군요.‘

‘테르미나의 대주교가 노망이 났다는 소문도 있던걸요.’

‘농담도 원.’

질 나쁜 농담을 들은 듯 질색하는 표정을 지은 태후가 이자르의 손등을 부드럽게 두드렸다.


‘머저리들이 모를 때 그대가 모시고 오세요. 폐하.’

생긋 미소 짓는 모후는 더없이 아름다웠다.

그렇게 만난 비앙카 황녀는 과연 소문만큼, 아니 소문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그 누구도 홀려버릴 것 같은 아리따운 모습에 이자르 역시 신탁이 거짓이라도 상관없겠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흠…….”

이 짜증은 그래선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얼굴을 놓친 아쉬움?

황녀만 한 미인도 흔치 않으니, 발로크 공작이 신부를 정말…….

열없은 생각에 실소를 흘리던 이자르의 얼굴이 불현듯 차게 굳은 건 그때였다.


“살바르!”

“네, 폐하.”

“공작이 황실에서 보낸 청혼서에 사인하였다고?”

“네.”

살바르의 즉답에 날 선 웃음을 터트린 이자르가 외쳤다.


“이 결혼은 무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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