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9. 아름다운 부인을 위한 새장
(19/47)
019. 아름다운 부인을 위한 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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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9. 아름다운 부인을 위한 새장
2023.03.06.
큰일이다.
발로크의 온기에 침식당하듯 경계와 이성이 허물어지는 것도 큰일이라 생각했는데…….
“으익!”
비앙카는 찻잎을 주르륵 쏟는 줄리의 모습에서 애써 시선을 돌렸다.
의욕 넘치고 씩씩한 건 좋았는데 줄리는 딱 거기까지였다.
생김이 날렵하고 움직임이 잽싸기에 완벽한 시중을 예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줄리의 시중은 마음이 듬뿍 담겨 있었지만, 투박했고 종종 놓치는 것이 많았으며 실수는 그보다 잦았다.
“아이고.”
아이고……?
어떤 영애도 저런 소리를 입으로 내지는 않는다.
어쩐지 막막한 기분에 비앙카는 허공을 바라보다 가까스로 입을 뗐다.
“줄리는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니?”
“아, 예. 부인, 한 달입니다.”
딱딱한 줄리의 말투에 비앙카는 티가 나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긴장했구나.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비앙카는 많은 것을 파악한 후였다.
평생 숨죽이며 눈치를 보는 것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었다.
이곳 발로크는 기사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본성 역시 주둔자의 반을 훌쩍 넘는 인원이 기사였다.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일 테지만, 그래서인지 이곳의 사람들은 기사가 아니더라도 꼭, 기사처럼 굴었다.
특히나 긴장했을 때.
짐작하기에 이들이 긴장할만한 상황이라는 건 아마도 마물을 마주쳤을 때이리라.
당시 사방에 들려온 것이 ‘기사’의 말이라 자신도 모르게 입에 배었을 것이다.
물론 이해한다.
하지만 줄리는 시녀였다.
환경적 특수성은 이해된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줄리의 사정을 고려해줄까?
자신의 앞에서야 괜찮았다.
그러나 줄리는 공작성의 시녀였다.
‘다른 아이가 편하지 않으실까요? 어리다면서요.’
난 어리지 않다며 한 사람의 몫을 주장하는 아이는, 심지어 발로크의 주인에게조차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감히 발로크의 안주인을 자처하며 시녀를 가르치겠다는 거창한 의미가 아니다.
그저 이 아이가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작은 소망일 뿐이었다.
‘새끼손가락을 제대로 펴기 어려우신가요?’
예법 선생은 가느다란 회초리로 무자비하게 어린 비앙카를 때려 ‘예법’을 머리가 아닌 몸에 새겨주었다.
덕분에 비앙카는 데뷔탕트를 치른 이래, 그 누구에게도 심지어 까다롭기로 소문난 수도 사교계에서도 단 한 번도 ‘예법’으로 책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해보자.
작게 심호흡한 비앙카는 흩어진 찻잎을 쓸어 담기에 여념 없는 줄리를 불렀다.
“줄리. 차를 우리게 준비해주겠니?”
“예?”
“내가 즐기는 방식이 있는데 말로 설명하기 어렵구나. 가지고 오렴.”
다정한 부름에 줄리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응, 그럴 테지. 그러니 잘 보아두렴. 꽤 까다롭단다.”
줄리가 하는 말이 그런 의미가 아님을 안다.
그러나 비앙카는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다시 한번 손을 까딱였다.
“어서 가지고 오렴.”
원래라면 손을 까딱이든지 하는 직접적인 행동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부채를 사용한다거나, 혹은 매끄럽게 돌린 수도 사교계 식의 말을 줄리가 알 것 같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버티듯 서 있던 줄 리가 결국 손짓에 포기한 듯 다구를 챙겨 다가왔다.
순간 비앙카는 미간을 찌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트롤리가 아닌, 트레이에 산처럼 쌓아 들고 오는 모습이라니!
가르쳐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준비했습니다.”
달그락.
트레이가 탁자와 부딪히며 나는 소리에 비앙카가 말했다.
“다시.”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동그랗게 뜬 줄리를 향해, 비앙카가 온화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다시, 내려놓으렴.”
하얀 손가락이 트레이를 가리켰다.
예법은 무의식적으로 나올 때까지 익혀야 했다.
그러려면, 몸에 밸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 최고였다.
‘다시.’
두꺼운 나무 문 너머에서 울리는 비앙카의 목소리에 노크하려던 헤일리의 손이 멈칫했다.
‘괜찮아. 원래 쉽지 않아.’
‘죄송합니다.’
뭘 잘못했나.
엿들으려고 작정한 건 아니었는데 줄리가 주의 듣는 것 같아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헤일리는 저도 모르게 귀 끝에 신경을 바짝 세워 방 안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처음치고는 훌륭해. 하지만, 사람들은 네가 처음이라는 걸 전혀 고려하지 않고 평가할 거야.’
‘네, 마님.’
‘그러니 다시 해보렴. 일단 오늘은 소리를 내지 않고 찻잔을 내려두는 것까지 완성하자.’
“찻잔을 소리 내지 않고……?”
비앙카의 말을 따라 하던 헤일리는 순간, 입을 틀어막았다.
이럴 수가!
깜빡했다.
줄리는 평민 출신의 기사였다.
그런 줄리가 사교계의 예법을 알 리가 있나.
경계가 심한 공작부인의 곁에 호위와 시녀를 겸할 사람을 붙이는 것에만 너무 골몰했던 탓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을 간과하고 말았다.
낭패였다.
‘좋아. 잘하는구나. 하지만 바닥 모서리가 한쪽 면만 급하게 닿는 감이 있어. 이러면 찻물이 흔들린단다.’
큰일이다.
버림받다시피 했다지만, 상대는 황녀였다.
온갖 유행이 피고 지는 수도의 사교계에서 살아남은 황녀.
그런 분에게 예법도 모르는 평민 출신의 시녀를 전담으로 보냈다니.
헤일리는 눈앞이 캄캄했다.
아머 백작가의 차녀로 태어나 당연하게 예법을 익혔기에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건 명백히 자신의 실책이었다.
헤일리는 곧장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십니까?”
오래지 않아 문이 열리며 줄리의 얼굴이 빼꼼히 나왔다.
헤일리는 눈 깜빡하는 사이 줄리의 표정과 작게 열린 문틈으로 공작부인을 빠르게 확인했다.
그 어디에도 긴장된 분위기는 보이지 않았다.
“줄리, 공작부인께 잠깐 시간을 청해도 되겠는지 여쭈어주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라 좀 의아하긴 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자신의 실책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진심을 담아 사죄드리고 줄리 대신 자신이 시중을 들겠다고 사정을 해야겠지.
허락이 떨어지기 전까지 헤일리는 문밖에서 기다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기다리는 시간이 꽤 길다.
어쩐지 이상해 헤일리가 막, 다시 노크를 하려던 순간 문이 열렸다.
“들어오시랍니다.”
문을 열고 선 줄리의 두 뺨이 빨갛게 상기되어있었다.
‘무슨 일이지?’
입을 벙긋거리며 물었지만, 줄리는 고개만 살래살래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살짝 초조한 기분에 발걸음을 옮기던 헤일리는 순식간에 정리된 침실의 모습에 움찔했다.
조금 전까지 어마어마하게 쌓여 있던 다구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숱하게 늘어져 있던 찻잔도, 찻잎 통도.
모든 것이 증발하듯이 사라졌다.
“안녕하세요. 마님.”
겉으로는 침착했지만, 헤일리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혼내는 게 아니었나?
“어서 와요. 시녀장.”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럼, 잠깐 앉아보겠어요? 마침 차를 마시려던 중이었어요.”
“제가 하겠,”
“앉으세요. 시녀장.”
어쩐지 이상한 기분에 헤일리가 발걸음을 떼자, 공작부인이 웃는 얼굴로 그러나 단호하게 제지했다.
“앉아요. 내 전담 시녀가 있는데, 어째서 그대가 움직이나요? 줄리, 차를 우릴 준비를 해주겠니? 오늘은 직접 우려보고 싶구나.”
“네, 부인.”
공작부인의 말에, 공손히 대답하며 자리에 앉는 헤일리는 잔뜩 복잡한 심경이었다.
차라리 공작부인이 화를 내면 좋을 텐데.
이건 단순히 혼내는 것보다 조금 더 안 좋았다.
상대의 서툰 모습을 유도해서 창피를 주는 건 고전적이지만 사교계에서는 어린 영애를 괴롭힐 때면 흔하게 쓰는 수법이긴 했다.
헤일리는 곁눈질로 찻잔을 챙기는 줄리를 보았다.
두 뺨이 발그레해서 웃는 모습인 게,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잔뜩 신나 보인다.
“저, 부인…….”
“차를 준비할 때까지, 잠깐 쉬는 게 좋겠군요.”
아무래도 줄리를 창피당하게 둘 수 없다는 생각에 헤일리는 조심스럽게 비앙카를 불렀으나 거절당했다.
상대가 공작이었다면, 그녀가 기사 신분으로 독대하는 것이라면.
주저 없이 무릎을 꿇고 줄리의 일을 빌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황녀였던 공작부인이었으며 자신은 지금 ‘시녀장’이었다.
귀족 부인들 간의 대화는 기사들과는 그 방식이 달랐기에 헤일리는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굳이 이렇게까지.’
생각과 달리 무자비한 공작부인의 태도에 헤일리는 어쩐지 목구멍이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줄리가 찻잔을 준비하는 것과 동시에 깨졌다.
소리 없이 빈 잔을 내려놓는 줄리와 시중을 받으며 직접 차를 우린 비앙카의 모습은 기품 넘치는 공작부인과 그녀의 전담 시녀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난 직접 차를 우리는 편이랍니다.”
차를 건네는 비앙카의 말에 이제야 헤일리는 자신이 오해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티 타임에 동반한 시녀.
줄리가 한 것이라고는 공작부인의 지시에 따라 시중을 든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빈 잔을 내려놓고 물을 데우는 일련의 행동은 마치 교양있는 영애같이 우아했다.
찻주전자를 쥔 손가락은 곧았고, 찻잔을 내려놓을 땐 작은 소음도 없었다.
마치 제대로 예절교육을 받은 것처럼.
‘오늘은 소리를 내지 않는 정도까지만 하자.’
저 대화를 듣지 못했다면, 자신도 모르고 넘어갔으리라.
줄리의 걱정에 내내 신경을 곤두세웠음에도 위화감을 느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럽고 치밀한 응대였다.
과연…….
헤일리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누구에게나 공평한 지옥인 사교계마저 ‘제국 제일미’라 부르며 사랑하는 황녀라는 건가.
독하거나 사납지 않으나, 그렇다고 마냥 유약하지도 않다.
온화한 지배자라 해야 할까.
물이 스미듯 자연스럽게 그러나 확실히 휘두른다.
“그래서, 할 말이 뭐였나요?”
헤일리는 자신에게 향한 질문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공작님께서 오찬을 청하셨다고요?”
“네, 마님. 아직 1층의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아 허락하신다면, 2층의 응접실에서 뵙자고 하셨습니다.”
‘가두었다고 오해한 아침 일 때문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질리언이 떠올랐다.
‘내가 당신을 가둘 리 없잖아요.’
위험하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까만 미소를 짓던 남자가 말이다.
‘내가 그대를 가두게 된다면, 새장이라는 생각이 들지도 않게 거대한 세계를 드릴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다시 생각해도 정말 굉장한 소리다.
가두다니!
새장은 무어람.
어쩐지 부끄러운 생각에 두 뺨으로 열이 쏠리며 화끈하는 느낌이 났다.
부채가 없으니, 달아오른 뺨을 가릴 수도 없었다.
비앙카는 당황해 말을 돌리려는 심산에 떠오르는 대로 입을 뗐다.
“그럼 공작님께 지금 가면 되나요?”
“오찬까지는 아직 시간이……. 아, 안내해드릴까요? 차를 한잔하시면 딱 좋긴 하겠습니다.”
“아니, 아니, 아니야.”
놀란 비앙카가 눈이 한껏 동그래져 손을 저었다.
딱딱하리만치 반듯하던 헤일리가 표정을 허물고 웃음을 터트린 건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