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제국이 기다려 온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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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1. 제국이 기다려 온 분
2023.03.13.
“성문을 열어라!”
“성문을 열어!”
전력질주한 전령이 성문 앞에서 다급하게 소리쳤다.
“누구냐!”
“왕께서 바로 통과하실 수 있게 빨리 성문을 열어! 말을 멈추게 하는 자는 목을 치겠다고 하셨다!”
전령은 이자르의 예복을 깃발처럼 흔들며 목청을 돋웠다.
나부낄 때마다 햇살 아래 화려한 빛을 뿌리는 새하얀 예복은 신분패보다도 확실한 증명이 되었다.
경계를 서던 대장은 즉시 호각을 불어, 근처의 기사들을 죄 소집했다.
이미 지평선에 가물거리는 왕의 모습이 보이고 있었다.
두께가 두 뼘이나 되는 둔중한 나무 문을 여는데 서른 명의 기사면 충분했으나, 그는 오십을 불렀다.
바로 통과하겠다던 말처럼 왕은 말을 모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았다.
가물거리던 그의 모습은 잠깐 사이 또렷해졌고, 아마 잠깐 뒤면 말발굽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워질 것이다.
“빨리 열어라!”
성문 경계를 담당하는 대장은 기사들을 독려하며 자신도 얼굴이 시뻘게지도록 힘을 주어 도르래를 힘껏 잡아당겼다.
고정쇠가 빠지자마자, 문은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열렸다.
그리고 양쪽 성문이 개방되는 것과 동시에 부연 흙먼지가 날리며 날카로운 편자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정말 아슬아슬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대장은 궁금증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재빨리 성문을 닫게 했다.
말을 달려 지나치던 왕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이건, 좋지 않은 징조였다.
* * *
“모후께서는!”
평소 말을 다정히 대하던 것과 달리 고삐를 거칠게 잡아채 멈춘 이자르가 뛰어내리듯 바닥으로 내려서며 물었다.
“동쪽 화원에 계십니다.”
본성의 시종장은 이자르가 허공으로 던진 승마 장갑을 요령 있게 잡아채며 공손히 대답했다.
“꽃을 가꾸고 계시는가?”
“네, 왕이시여.”
“이럴 땐 향기로운 차가 제격이지.”
“즐기시는 차로 준비하겠습니다.”
시종장은 차를 준비한다는 말과 달리 이자르를 뒤따르지 않고 그길로 모든 시중을 물렸다.
어려부터 그를 모셔왔기에, 따로 명령하지 않아도 선왕후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려는 것을 눈치껏 알아챈 것이다.
저벅, 저벅.
본성에서 동쪽 화원까지 가는 길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이 고요했다.
은밀히 따르는 호위는 있을 테지만, 그가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것이다.
울창하게 우거진 나뭇가지를 밀어내며 걷기를 한참.
반듯한 이마에 식은땀이 돋기 시작할 무렵, 화려한 꽃 정원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
이자르는 부드럽게 물결치는 초록 잎을 걷어내며, 꽃가위를 들고 선 선왕후를 소리를 내 불렀다.
찰캉.
“어머니.”
찰캉.
은 가위가 한번 움직일 때마다, 꽃송이가 커다란 노란 장미가 잘려 나왔다.
“송이도 크고 색도 예쁜데, 마음에 들지 않으세요?”
이자르의 말에 날이 잘 벼려진 은 가위가 벌어진 채 멈추었다.
“아까우세요. 폐하?”
번뜩이는 가위를 들고서 선왕후, 파세트라가 웃었다.
휘어지는 눈가를 따라 패는 주름마저 고상해 보이는 우아한 미소였다.
이자르는 휘어진 눈매 사이로 빛을 발하는 연녹색의 눈동자를 보며 같이 미소를 지었다.
“제가 뭘 알겠어요.”
“폐하. 가장 크고 좋은 한 송이를 위해선, 곁가지에서 피어난 것이 아무리 어여뻐도 다 잘라내야 한답니다.”
“저런.”
선왕후의 발치엔 탐스러운 장미가 한가득하였다.
하나, 그녀의 얼굴에 아쉬움이라곤 요만큼도 없었다.
“본래 그런 것이에요. 폐하께서 당연히 가지셔야 하는 건 바로 그 한 송이고요.”
“어머니.”
“네, 폐하.”
“테르미나의 대신관 이야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왜요, 황녀를 보고 나니 궁금해지셨어요?”
“황녀는 보지 못했습니다.”
내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선왕후의 입매가 서늘하게 꾹 물린 건 그때였다.
“황녀를 놓치셨어요?”
미소가 걷힌 선왕후는 무섭도록 비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리깔린 시선이며, 압도하는 듯한 말투가 일생을 군림해온 이답게 너무 자연스러웠다.
“놓치셨습니까?”
금방이라도 목을 칠 것 같은 무서운 기세에도 이자르는 전혀 긴장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빙긋 웃었다.
“아, 정말 무섭게도 놓칠 뻔했답니다.”
아직 손아귀를 벗어난 게 아니라는 말에, 뻣뻣하게 굳었던 선왕후의 뺨이 보드랍게 풀어졌다.
“폐하께서 늙은이를 놀리는 못된 버릇이 생기셨군요.”
다 들리게 핀잔한 선왕후가 이자르처럼, 작게 웃었다.
“아닙니다. 어머니, 저도 놀라 달려온 길이랍니다.”
“황금은 만능이 아니지만,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해준답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혹시 그들이 더 달라고 했던가요? 그럼 더 주,”
“아니요. 황금이 문제가 아니랍니다. 대신관이 뭐라고 했는지 알려주세요. 그래야 저도 어디까지 움직일지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디까지?”
말 속에 담긴 의미를 가늠하듯 작게 속삭인 선왕후가 손아귀에 힘을 줘 가윗날에 껴 있던 장미 모가지를 잘라버렸다.
찰캉하는 소리와 탐스러운 꽃봉오리가 그대로 흙바닥에 처박혔다.
그 모습을 내리깐 눈으로 바라보던 선왕후가 나긋한 목소리를 내었다.
“테르미나의 대신관 그이가 삼 년 전, 성지에 틀어박혀 일 년간 기도를 올렸던 일이 있었답니다. 사실 그건 유폐이었어요. 황제의 노여움을 샀거든요.”
“지금 대신관을 테르미나의 황제가 유폐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테르미나의 황제가 괴팍하다는 것은 모르는 바는 아니나, 이 정도일 줄이야.
신전은 신의 영역으로 신관들은 제국법이나 왕국법 같은 ‘인간’의 법에 따르지 않는다.
이것은 대륙이 생겨난 이래 단 한번도 깨어지지 않는 것으로 신관의 일엔 그 누구도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런데, 대신관을 황제가 유폐시켰다고?
그것을 대신관이 따르고?
“그게……가능한 겁니까?”
“대신관이 황녀를 가엽게 여겨 마음을 많이 썼다고 해요.”
선왕후는 가위를 능숙하게 드레스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고 걸음을 옮겼다.
이자르는 그 뒤를 따르며 이야기를 들었다.
핍박당하는 황녀를 보다 못한 대신관이 항의했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샀고, 분풀이로 황녀가 매질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이가 나섰답니다. 자신이 벌인 일이니 자신이 벌을 받겠노라고.”
“왜 그렇게까지 했답니까?”
“제국이 오래도록 기다려온 분.”
하지만, 황녀는 어차피 테르미나의 핏줄도 아니지 않나?
이자르 표정에 어린 의구심을 발견한 듯 선황후가 의미심장하게 속삭였다.
“예언이니 신탁이니 그것을 뭐라 불러도 좋아요. 폐하. 우린 이것이 ‘은유적’ 표현이라는 것만 알면 충분합니다.”
“은유적.”
“발로크는 테르미나의 시작을 함께 했답니다. 제국 그 자체라 불러도 손색없지요.”
‘테르미나를 얻은 발로크가 비로소 오랜 속박에서 해방되리라.’
“제국이 오래도록 기다려온 분.”
이게 무슨 의미일까요?
선왕후가 한숨처럼 속삭이는 말에 이자르의 심장이 쿵, 하고 울렸다.
“발로크의 목줄.”
선왕후는 이자르의 말에 웃기만 할 뿐, 그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오찬은 훌륭했다.
발로크령은 사방이 얼어 있는 척박한 영구동토다.
그뿐만이 아니다.
끊임없이 마물이 기어 나오는 땅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일곱 성채를 넘어야 하고, 또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워프진 또한 본성에서 한나절이 떨어져 있다.
물자 수급이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접시 위에는 신선한 야채가 올라와 있을뿐더러, 후식으로 많지는 않지만 이시기엔 황실에서도 구하기 힘든 사과까지 나왔다.
아삭.
과즙이 풍부한 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비앙카는 소리 없이 감탄했다.
원래 비앙카는 사과를 꽤 좋아하는 편이었으나, 살아 숨 쉬는 것 자체가 죄인 그녀에게 과일 같은 것이 허락될 리 없었다.
연회에서 아주 조금.
티타임에서 가끔.
소리가 나는 과일이라 기회가 될 때에도, 한 입 정도 맛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세 조각이나 주어지다니!
“더 드세요.”
“아…….”
너무 게걸스럽게 먹었나.
비앙카는 자신의 앞에 놓인 접시에 얼굴을 붉혔다.
“북부는 뭐든 저장을 해둔답니다. 저장성이 좋은 것만 가능하니 가짓수는 많지 않지만 사과나 감자, 고구마 같은 것은 꽤 넉넉하게 마련되어 있어요.”
과일을 저장하는 건 생각해보지도 못했다.
“포도 같은 것은 말려서, 과육이 무른 베리류는 잼을 만들어서.”
“예에.”
비앙카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대는 이곳의 안주인이니까. ‘우리 집’은 어떻게 사는지 아셔야 할 테니까.”
어?
방금 조금.
우리 집이라고 발음하며 질리언의 표정이 설핏 냉담해지지 않았나?
“매입은 여러 상단을 통해 진행하는 편입니다. 한곳에서만 하면 황실의 이목을 끌 테니까요.”
그러나 황실에 대한 속내를 숨기지 않는 솔직한 말에 비앙카는 자신이 착각했다고 생각했다.
다시 본 질리언의 표정은 여느 때와 같이 단정했고 말투는 다감했으며 목소리는 상냥했으니까.
그래서 오찬 후 자연스럽게 이어진 티타임에서도 비앙카는 질리언이 들려주는 ‘발로크’ 본성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이제 몸이 좋아졌으니, 슬슬 내성 관리를 인계받아야 할 때도 되었다.
식자재에 관한 이야기 후 간략하게 내성 설명이 이어졌다.
이미 첫날 시녀장 헤일리가 안내해주긴 했지만, 워낙 황망결이라 세세히 기억하진 못했기에 비앙카는 질리언의 이야기가 몹시 반가웠다.
“각층 양쪽 끝의 방에는 비밀 통로가 숨겨져 있습니다. 각 끝방은 3층에선 공작 부부의 침실이 2층엔 집무실과 서재가 양 끝이고 1층엔 주방과 창고가 비밀 통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네, 잘 외워두겠습니다.”
서재.
비앙카는 2층의 끝에 집무실과 서재가 있다는 말을 단단히 새겨들었다.
언제고 북부인만 아는 예언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안 그래도 서재가 어디 있나 물어볼까 했는데 이렇게 알게 되다니!
비앙카는 자신이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버림받았으나, 남의 눈에는 테르미나의 황녀였다.
말 한마디 한마디, 별것 아닌 행동 하나하나가 오해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
“비밀 통로는 특별한 방법으로만 열리니, 조만간 따로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해요. 저 그런데 질리언, 혹시 제가 서재를 이용해도 될까요?”
“물론이죠. 부인. 이곳은 그대의 집인걸요.”
“감사해요.”
“책을 보셔도 됩니다.”
……무슨 소리지?
“그대의 집이라고 우리의 집이라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믿어주질 않으시니, 하나하나 다 알려드리려고요. 알아주실 때까지.”
어?
비앙카는 눈을 내리깐 질리언을 보며 입술을 작게 벌렸다.
지금…….
“서재에 꽂혀 있는 모든 책은 가리는 것 없이 이용 가능하세요.”
“질리언?”
“발로크엔 원래 금서가 없기도 하지만, 그대에겐 없는 금서도 모두 허락할 테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금 설마.
“그대의 집이니까요.”
앞으로 천만번쯤 더 말씀드리면 믿어주실는지.
다 들리게 속삭이며 한숨 쉬는 질리언은 꼭,
“참, 서재에 비치된 책은 당연히 들고 가서 읽으셔도 된답니다. 이곳은 그대의 집이며, 집 안의 모든 물건은 그대의 것이니까요.”
……토라진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