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4. 죄인과 고집쟁이 (24/47)


024. 죄인과 고집쟁이
2023.03.24.



 
하룻밤 사이에 본성 분위기가 뒤숭숭해졌다.

오찬이 끝난 오후부터 시작해 새벽까지, 쉬지 않고 기사들이 들이닥치며 본성의 인원들이 새로운 기사들을 맞이하느라 분주해졌던 탓이었다.

본성에서 각 성채까지는 거리가 다 달랐던 탓에, 기사들의 도착시간도 제각각이었다.

줄리에게 이야기를 미리 들어 소란에 놀라진 않았지만, 비앙카는 새벽까지 이어지는 시간까지 기사들을 맞는 소리에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결국 ‘7성채 기사단이 공작님을 뵙습니다.’라는 쩌렁쩌렁한 마지막 인사가 울리던 새벽 비앙카는 잠을 포기했다.

두어 시간 후면 해가 뜰 텐데 이제 와 잠들었다간 아마, 다음날 오후까지 자게 될 게 뻔했다.

늦잠을 자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비앙카는 혹시라도 다시 잠이 들새라 침대에서 내려와 버렸다.

사방이 까만 시간.

시중인을 부르기엔 일러도 너무 일렀고 가만히 앉아 아침을 기다리기엔 긴 시간이었다.

잠깐, 생각하던 비앙카는 지금이 바로 서재에 가기 딱 좋은 시간이라는 것을 떠올렸다.

조용히 움직여 세수를 마치고 간단한 치장을 끝낸 비앙카는 하얀 코트를 야무지게 챙겨 입고 방을 나섰다.

달칵.

잠금쇠가 풀리는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경계를 서던 기사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좋은 아침이네요.”

비앙카는 어색한 인사를 건네며 살짝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곧장 시녀를 불러드리겠습니다.”

기사의 말 사이사이로 1층의 소음이 섞여 들어왔다.


“무구는 개인이 직접 챙겨 이동합니다. 7성채의 기사들은……. 공작님 4층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2층과 4층에 여유가 있고…….”

“7성채는 3층이다. 양 끝으로 배치해.”

바쁘다.

사방이 바빴다.

이 와중에 시중을 바라는 게 말이 되나.

비앙카는 고개를 작게 흔들며 웃었다.


“경에게 도움을 청할까 해요.”

“말씀하십시오.”

귀부인은 절대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개인 호위는 물론이거니와 전담 시녀까지 적어도 셋, 보통 다섯까지도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황제의 미움을 산 비앙카에게 단 한 번도 개인 호위나 전담 시녀가 허락된 적이 없었다.

그런 사정을 다들 알지만, 어디 사교계가 그런 사정을 헤아려주는 곳인가.

홀로 다녔다가는 넝마가 되도록 헐뜯겼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소문이 돌고 돌아 황제 앞에 끌려가 매질을 당했겠지.

살아남기 위해서 비앙카는 티 없이 영악해져야 했다.

비앙카는 기사를 자연스럽게 대동하는 법이 몸에 배어 있었다.


“길이 익숙지 않아서 그러는데 서재까지 안내를 부탁해도 될까요?”

호위 기사가 없기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죽으라 내다 버린 황녀에게 주어진 건 걸치고 있던 드레스 하나가 고작이었다.

그대로 북부령에 도착해 지금이었다.

발로크령에 도착해서도 호위 기사가 없는 건, 질리언이 자신을 홀대해서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그럴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길 안내를 말씀이십니까?”

정중한 기사의 질문에


“7성채 기사면 1층이나 4층이 더 유용하지 않겠습니까?”

헤일리의 목소리에 이어


“7성채의 기사니 3층인 것이다. 공작 부인이 계시는 층보다 중요한 곳이 어딘가, 헤일리?”

질리언이 던지는 물음에 뒤섞여 울렸다.

비앙카가 할 말은 정해져 있었다.


“부탁드려요. 경. 단잠에 빠져 있을 어린 시녀를 이 새벽에 깨워 시중들게 하고 싶지 않군요. 어린아이는 잘 자야 잘 큰답니다.”

“어린아이.”

잘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표정 하나 없던 기사의 뺨이 씰룩이더니 찰나에 미소가 스쳤다.


“봐서 알겠지만, 줄리는 아직 어린걸요. 키가 얼른 자라고 싶다는데 도와주고 싶군요.”

말 끝에 비앙카가 손을 내밀어 에스코트를 청했다.

기사는 머뭇거리지 않고 곧장 자신의 팔을 비앙카의 손아래 깔았다.


“서재는 한층 아래에 있습니다. 계단을 내려가야 하니,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그럴게요.”

기사의 정중한 에스코트를 받고 있자니, 문득 지나간 어느 날이 떠올랐다.


‘길 안내를 부탁합니다.’

‘……바로 오른쪽에 있습니다만.’

일국의 황녀에게 보이는 태도라고는 믿을 수 없는 건방진 말투와 건성인 태도.

풍성한 드레스 자락에 가려진 계단을 제대로 보지 못해 휘청거리면 더러운 무언가를 잡듯 마지못해 손을 붙들어주곤 했었다.

자신을 귀한 무언가라도 된 듯 조심스럽게 받친 기사의 팔이라니.

비앙카는 조금 벅찬 기분이었다.

오래지 않아 도착한 서재는 어두웠고, 기사는 너무 당연하다는 듯 자신이 나서서 불을 밝히고 난로를 피웠다.

모든 정리가 끝나자 기사는 자리를 뜨려 했으나, 비앙카가 그를 막았다.


“경, 조금 무서우니 이곳에 함께 계셔주시겠어요?”

서재를 나선 기사가 향할 곳은 어두운 복도였다.

비앙카는 고마운 기사를 그렇게 세워두고 싶지 않았다.


“아, 그럼 저는 이곳에 서서…….”

“경, 앉아서 기다려주시면 어떨까 해요. 제가 마음이 너무 불편해서…….”

눈끝을 떨군 속삭임은 강력했다.

기사는 주저했지만 결국 비앙카의 원하는 대로 근처에 의자를 끌어다 앉을 수밖에 없었다.

타오르는 난로와 따스하게 일렁이는 불빛.

그리고 편안하게 앉은 기사의 모습.

이제야 책을 읽을 준비가 끝났다.

홀가분한 마음이 된 비앙카는 책을 뽑아와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비앙카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순조로운 시작과 달리 비앙카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발로크가의 계보부터 시작해서 북부령의 역사를 집필한 책까지, 모든 것을 챙겨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책을 뒤져도 비앙카가 찾는 것이 나오지 않았다.

‘죄사함을 다한 발로크를 테르미나가 자유롭게 하리라.’

늘 발로크의 맹목적인 굴종이 궁금했던 그녀에게 줄리가 알려준 북부의 ‘예언’은 비앙카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예언의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서재로 온 것인데,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았다.

혹시나 해서 고루고루 챙긴 것인데 그 어디에도 예언과 관련된 이야기는 없었다.


‘대체 어디에 있을까.’

막막한 기분에 비앙카가 책상에 기대듯 엎드렸다.

어느새 시간은 훌쩍 흘러 해가 뜬지 오래였다.

두꺼운 유리창을 투과한 해가 따끈하게 몸을 데우는 느낌이 몹시 사람이 노곤하게 만들었다.

미뤄둔 졸음이 덮쳐오는 건 어쩌면 당연했다.

잠든다는 자각이 있었지만, 기분이 몹시 좋았기에 비앙카는 몰려드는 수마를 뿌리치지 않았다.

귓가를 울리는 자신의 숨소리마저 녹진하게 울리는 것 같던 순간이었다.

감각이 멀어지며 이명이 울렸다.


‘고집쟁이, 나한테 물어보면 될 걸 굳이 책을 뒤지는 이유는 뭐야.’

‘어리광쟁이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나를 칭찬해줘야지.’

‘어리광을 좀 부리면 어때서?’

‘평생 받아줄 게 아니면 그런 무책임한 소리는 하는 게 아니지.’

‘뭐 어때. 고작해야 백 년일 텐데.’

‘맙소사, 굉장히 무책임하다.’

‘무책임이라니. 나의 성실함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께서. 약속이라도 해주길 바라는 거야?’

‘그만둬.’

기대에 들떴던 자신의 목소리는 어느새 굉장히 착잡하게 변해 있었다.

실망감이 여실했다.


‘믿지 못한단다면 약속해줘야지 않겠어? 평생 네가 서재를 찾지 않아도 되게 내가 늘 알려줄게라고.’

웃음기 어린 가벼운 목소리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고 말았다.


‘그만둬!’

“그만둬!”

비앙카는 자신이 지른 소리에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마님!”

꿈속에서 지른 게 아니었어?


“우셨……. 무슨 일 있으십니까?”

심지어 울기까지.

비앙카는 놀란 기사를 달랠 책임이 있었다.


“잠깐 조는 사이 악몽을 꿨답니다.”

“아아…….”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기에 아침의 소동은 그렇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다시 책을 읽고, 다 읽은 책을 한쪽으로 밀어두던 그때,


“피곤하세요?”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질리언? 언제,”

“조금 되었어요.”

너무 집중하고 계셔서 말을 걸기 힘들더라고요.

나직한 웃음과 함께 손을 뻗은 그가 뻐근해진 목덜미를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긴장한 근육 위로 그의 손아귀가 차근히 내려앉자 기분 좋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으…….”

신음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가 엄지로 긴장한 목덜미를 쓸 듯이 만지는 것만으로 머리끝이 쭈뼛하도록 소름이 일었다.


“아프세요?”

“으, 그게 아니라.”

욱신거리기도 하지만, 아픈 건 아니다.

절로 어깨가 모여 뾰족하게 솟게 되는 저릿함이 참기 어려울 뿐이다.


“그럼, 참아보세요. 오래 두면 힘들어요.”

질리언이 잔뜩 돋은 어깨를 반대편 손으로 꾹 눌러 내리며 목덜미를 꾹꾹 눌러주었다.

이를 악물고 쏟아지는 짜릿함을 버티기 급급하던 그때.


“뭐가 궁금하셨을까요?”

그가 기습처럼 질문을 던졌다.

헉.

작게 입안으로 헛숨을 삼켜버릴 만큼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발로크가 궁금하셨어요?”

아니.


“북부령이 알고 싶으셨을까요?”

아니.


“그 무엇이든 저보다 잘 아는 건 없어요. 그러니 알려주세요. 뭘 알려드리면 좋을지.”

말 끝에 그의 엄지가 실수인 듯 맥박이 뛰는 곳을 스쳤다.

놀라 퍼덕이는 심장을 눈치채기라도 했을까봐 비앙카는 발작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 그냥 궁금해서요. 이것저것 다.”

“이것저것 무엇이요?”

느릿하게 황금빛 시선을 굴려 비앙카가 쌓아둔 책을 확인하는 질리언의 표정은 경건하리만치 아름다웠다.

햇살을 두른 그는 죄인 특유의 음습함이라고는 요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죄사함을 다한 발로크’

죄인이라니.

말도 안 되지.

테르미나의 건국 시조와 함께해온 발로크에 영광이 있을지언정 ‘죄’가 있을 리는 없기에 북부의 예언이 무슨 뜻이냐 차마 물을 수가 없다면 그는 이해할 수 있으려나.

발로크를 옥좨는 테르미나라 염치가 없어 물을 수 없었다면 그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비앙카는 목 끝까지 차오른 질문을 꾹 삼키고 입을 열었다.


“스스로…… 해볼게요.”

“그 어떤 책보다, 자세하고 확실하게 알려드릴 수 있어요.”

“스스로 하겠습니다.”

“고집쟁이 같으시네요.”

“……네?”

마치 꿈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복기 되는 대화에 눈을 동그랗게 뜬 비앙카가 속삭였다.


“어리광쟁이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고 생각해주시면 어때요?”

이것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주도권을 빼앗긴 몸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듯 제멋대로 떠들었다.

마주한 황금빛 시선이 한여름의 버터처럼 녹진해지고 꿀처럼 달콤하게 달아오르는 게 보인다.


“어리광을 부리면 어때서요.”

대답하는 그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런데 눈부시게 웃고 있는 질리언이 꼭, 우는 것 같이 느껴진 건 왜였을까.


 
그 시간.


“이자르시여. 모두 무사히 잠입하였다고 합니다.”

살바르의 속삭임에 이자르 역시 빙긋 미소를 지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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