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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6. 황성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26/47)


026. 황성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2023.03.31.



“전담 시녀와 호위기사까지 갖춰졌으니, 본성을 구석구석 둘러보는 건 어떠세요?”

헤일리의 말에 래핀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직이십니까?”

“그렇게 되었답니다.”

애매모호한 답이었지만, 래핀은 되묻지 않았다.

다만, 지금 모셔도 되겠느냐 물었을 따름이었다.

그가 얼마나 훈련이 잘된 기사인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하나 비앙카는 감탄하는 대신 작게 실소했다.

비앙카 테르미나의 의견을 물어봐 주다니?

발로크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한 번씩 이렇게 와닿는다.


“오늘은 외출해도 될까요?”

비앙카의 질문에, 래핀의 눈이 둥그레졌다.


“지금 질문하시는 겁니까?”

그제야 비앙카는 자신이 명령이 아닌 허가를 바랐음을 깨달았다.

실수였다.

몸에 밴 구걸이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했지만, 비앙카는 사교계에서 갈고 닦은 처세술을 아낌없이 내보였다.


“본성에 일이 있어서 공작님께서 외출을 삼가길 원하셨답니다.”

“아! 저도 이야기 들었습니다. 자이…….”

래핀의 말에, 줄리가 잽싸게 끼어들었다.


“경도 아시는군요, 바닥 보강 작업을 했습니다.”

“……아하.”

줄리의 말에 짧게 응수한 래핀이 곧장, 비앙카에게 허리를 숙여 부드럽게 말했다.

그는 ‘바닥 보강 작업’이라고 자이언트 래빗 침입을 정리한 줄리의 말에 공작부인을 어떻게 모셔야 하는지 곧장 이해했다.


“마님, 원하시는 대로 모시겠습니다.”

찰나에 비앙카의 커다란 눈동자를 뒤흔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내 웃어주었기에 래핀은 충분했다고 생각했다.


“좋아요.”

래핀은 비앙카가 내민 손을 기껍게 받쳐 들었다.

* * *

래핀은 좋은 기사이자 훌륭한 선생이었다.

그는 외부인인 비앙카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흥미롭게 발로크 본성을 안내했다.


“발로크 령이 다른 영지와 달리 공작저를 성의 형태로 고수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방어를 위해서입니다.”

“마물 때문이지요?”

“그렇습니다. 본성을 포함해 일곱 개의 성채로 이루어진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공작님이 머무는 이곳이 본성, 그리고 첫 번째 성채라고 불리는 건 알고 계시느냐 물으며 래핀이 한 걸음 앞서 계단에 발을 디뎠다.

몸을 반쯤 가리듯 한발 앞선 모습은 비앙카가 익히 아는 호위기사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가 진심으로 자신을 염려하는 것이 눈에 훤히 보여 오히려 비앙카는 좋았다.

그 와중에 난간이 아니라 벽체로 걷게 하는 것은 못내 우스웠달까.


‘치마에 가려져 발밑이 보이지 않는데 잡을 게 없으니 더 위험하잖아.’

다른 레이디에게 이랬다간 흠이 될 거라는 생각에 비앙카는 래핀을 불러세웠다.


“경, 에스코트시 보통 귀부인들은 난간 쪽으로 안내하는 편이지 않나요?”

“아, 수도는 그렇습니까?”

위화감이 느껴지는 대답에 비앙카가 되물었다.


“이곳은 아닌가 보지요?”

“본성이라고 해서 아예 마물의 공격이 없는 건 아니라서요.”

그제야 래핀이 자신의 몸을 반쯤 가린 듯하게 앞선 모습이며, 벽체로 안내하던 것이 죄다 이해된다.


“여러 겹의 성채를 둘러도 본성까지 공격을 받는다니, 마물이 꽤 들끓는가 봅니다.”

“본성을 뚫고 들어오는 건 보통 비행 형 마물입니다.”

“위험하겠군요.”

“제 영역인 서식지에 꽤 집착하는 편이라 다른 지역으로는 나가지 않으니 다행이지요.”

그러고 보면 발로크령 밖으로 나오는 마물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알 수 없는 기분이다.

래핀은 비앙카를 1층부터 차분하게 안내했다.

이미 첫날 헤일리로부터 간단하게 소개를 받긴 했으나, 그때와는 또한 달랐다.

헤일리가 위치를 안내해주었다면 래핀은 장소가 가지는 의미를 설명해주었다.

가령 예를 들어 본성 입구에 달린 나무 문의 두께가 두 뼘인 것은 벽체와 두께를 맞춰 마물이 출입구를 쉽게 찾지 못하게 라거나.

4층만 창이 유독 큰 것은 채광을 위해서가 아닌, 일곱 성채 중 가장 높은 본성 꼭대기로 비행 형 마물을 유인해 처리하기 위해서라거나.

들어도 실감 나지 않고 더러 끔찍한 이유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발로크령은 전적으로 마물을 처리하기 위해 존재하는 공간처럼 들렸다.


“그리고, 본성의 매층 양 끝에는 워프진 근처까지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있습니다.”

똑똑.

2층 서재의 구석으로 데려간 래핀이 벽에 대고 노크하자 돌벽을 두드린다고는 믿을 수 없는 산뜻한 소리가 났다.


“본성이 뚫릴 일은 없지만, 만일을 대비해서요.”

래핀이 촛대를 비틀어 보여준 비밀 통로는 꽤 협소했다.


“아…….”

끝이 보이지도 않는 좁고 기다란 어둑한 통로의 모습에 비앙카는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통로를 타고 들이닥친 바람이 소름이 끼치도록 차가웠다.


“마님, 원래라면 제가 모시고 통로 안을 안내해야 합니다만 그럴 수 없어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나도 오늘은 통로를 둘러보기에 적당한 복장이 아니랍니다.”

“아닙니다. 기사인 저는 갈 수 없습니다.”

실내용 드레스를 핑계로 래핀에게 건넨 면죄부는 소리도 없이 찢겼다.


“이곳은 오직 어린아이들과 기사가 아닌 여성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유사시 마님께서 영지민을 이끌어야 하니, 언제고 한번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유사시, 기사가 아닌 여성.

하나같이 뒷머리가 당기는 기분 나쁜 소리였다.


“유사시라는 건…….”

“공작님이 더는 계시지 않아 마물에 함락된 상황입니다. 기사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마님께서 영지민을 밖으로 이끌어주십시오.”

“그럼 기사가 아닌 다른…….”

“누구 말씀이십니까?”

대피할 수 있는 건, 공작부인과 아이 그리고 기사가 아닌 여성.

그럼 영지의 남성들은?


“다른, 다른 성인 남자는…….”

“발로크의 남자는 다 기사입니다.”

래핀의 대답을 듣는 순간 끝이 보이지도 않는 좁고 깊은 통로가 꼭, 아가리를 벌리고 선 괴물같아 비앙카는 얼른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렇게 좁으면 나중에 기사들이 탈출하기엔 버거울 텐데요?”

적절한 질문은 아니었지만 물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비앙카의 말에 래핀의 눈이 일순 동그래졌다가 다시 활처럼 휘었다.


“마님, 기사들은 달아나지 않습니다.”

“그럼……?”

“비밀 통로가 워프진 근처까지 나 있긴 합니다만, 영지민이 통로를 빠져나와 워프진까지 가는 시간을 벌어야 하니까요.”

래핀은 미끼라는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했다.


“그, 그럼. 어디로 워프해야 하나요?”

“마님께선 황성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돌아가라고…….”

“예, 마님. 다른 이들도 공작님께서 수도에 머물 곳을 마련해두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원군 요청은?

비앙카는 말문이 턱 막혀버렸다.

래핀은 시종일관 순한 얼굴로 자신들의 몰살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래핀과 성을 돌아보는 데는 세 시간이면 충분했다.

여타의 다른 귀족들과 달리 발로크령의 특성상, 공작이 머무는 본성도 방어에 치중해 있느라 그 구조가 심하게 단순했던 탓이었다.

다소 심심한 일정이었지만, 침실로 돌아오는 비앙카는 잔뜩 지쳐 있었다.


‘마님께선 황성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래핀의 말이 쉬지 않고 머릿속을 울리고 있었던 탓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엿본 발로크의 책무가 끔찍하리만치 무거웠다.

하나 비앙카는 같이 달아나자거나, 원군을 요청해보자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발로크 공작 없이는 마물을 상대할 수 없는 현실을, 군사를 내어주지 않을 황실을 알아서였다.

당연한 일상이 누구의 헌신으로 이루어졌는지 알아서 새삼 숨이 막히는 기분이랄까.


“본성 밖은 다른 날에 보실까요? 이제 겨울로 접어들고 있어 해가 짧습니다.”

“그래요, 경.”

아닌 게 아니라, 이제 고작 오후 네 시 무렵인데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사방이 붉고 어두워지고 있다.

하루가 끝이라니 차라리 반가운 기분이었다.

밤을 핑계로 늘어져 쉴 수 있으리라.

그렇게 3층에 다다랐을 때였다.


“마님, 공작님께서 오늘 저녁을 함께하고 싶으시다며 청하셨습니다.”

헤일리의 말에 미소를 짓기가 힘들었지만, 비앙카는 가겠노라 대답했다.

어떤 삶을 사는지 뻔히 들여다본 지금, 차마 염치없이 피곤하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차를 한잔 주겠어?”

이대로는 움직이기가 힘들어 막 침실로 들어서며 차 한잔을 청하던 때였다.

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래핀이 앞으로 나섰다.

어느샌가 검을 뽑아 든 래핀이 경계심이 역력한 목소리로 줄리를 불렀다.


“줄리! 침실을 확인해라.”

쿠아아아!

귀를 울리는 기괴한 소리에 놀란 건 비앙카뿐이었다.

래핀도 줄리도 오히려 울음소리를 듣고 난 후 눈에 띄게 안심하는 기색이었다.

심지어 헤일리 마저 남은 일을 처리하러 간다며 사라지기까지 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요?”

놀란 건 오직 비앙카뿐.


“비행 형 마물이 들어온 모양입니다.”

검을 회수하는 래핀이나, ‘침실은 괜찮아요’라고 말하는 줄리는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비행 형이면 위층인가요?”

“예, 마님. 침실 안으로 모셔도 되겠습니까?”

오늘 그에게 배운 대로라면 비행 형 마물은 4층 창을 통해 들어와, 그곳에서 제압될 것이다.

그리고 마물을 상대하는 건 ‘보통’ 질리언이었다.

쾅!!

위압적으로 울리는 소리에 어깨를 움츠리던 것도 잠깐, 비앙카는 래핀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 질리언은 위층에 계시는 건가요?”

“예?”

“질리언, 아니 공작님께서는.”

“당연히 위층에 계실 겁니다.”

크아아아아아!!!

‘당연히’라는 래핀의 말과 마물의 울음이 함께 울리자 비앙카는 머릿속이 희게 바래는 기분이었다.


“질리언이!”

“괜찮습니다.”

그럴 리가 있나!

소리만으로도 이렇게 무서운데 저걸 직접 상대하는 질리언이 괜찮을 리가 있나!


“기사를 불러주세요. 경! 기사를 불러요.”

래핀과 줄리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비앙카가 알 바 아니었다.


“질리언에게 빨리 기사를 보내줘요!”

“마님, 공작님은 괜찮으십니다.”

대체 누가 마물을 상대하는데 괜찮을 리 있어!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비앙카는 의견이 묵살되는 데에 익숙했다.


“기사를 보내주세요, 경. 아니면 잠깐 그대가 다녀와도 좋겠습니다. 나는 줄리와 함께 침실 안에 있을 테니까.”

상대가 납득할만한 대안을 꺼내는 건 비앙카가 아주 잘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비앙카도 래핀의 이어지는 말에는 당황하고 말았다.


“차라리 같이 가서 보시겠습니까?”

“래핀경!”

“아니야, 불안해하시는데 차라리 한 번 보고 나면 안심하실 거야.”

질색하던 줄리도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비앙카는 그길로 치마를 말아쥐고 달렸다.

몸에 밴 예법 따위는 이 순간 기억나지도 않았다.

크아아아아!

귀가 찢어지는 소리에, 비앙카는 폐가 찢어지도록 계단을 뛰어올랐다.


“이래서, 내가 4층엔 시녀의 출입을 금했는데.”

평온한 질리언의 음성과 함께 4층에 도착한 비앙카가 마주한 건 지옥이었다.

갑옷도 없이 질리언은 단신으로 와이번과 대치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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