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27. 나는 몰랐단 말이에요 (27/47)


027. 나는 몰랐단 말이에요
2023.04.03.


쾅!!

정체불명의 굉음은 와이번이 날개를 퍼덕일 때마다 천정을 후려치며 나는 소리였다.


“와이번이 다가오길 기다리시는 겁니다. 4층은 지붕과 맞닿아 있어 중앙만 높거든요. ”

질리언이 수세에 몰렸다 오해할세라 래핀이 짤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등 뒤로 숨긴 어린 시녀와 검을 빼든 질리언의 모습이 망막에 새겨질 듯 또렷했다.


“원래 4층은 시녀들이 출입해서는 안 되는 공간인데…….”

“어떤 머저리가 불러냈나 봅니다.”

경멸을 고스란히 드러낸 줄리가 손을 들어 질리언의 뒤에 가려진 누군가를 가리켰다.

어린 시녀만큼이나 앳된 모습의 기사였다.

사정이야 딱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질리언이 위험해졌어.

지금 비앙카에게 중요한 건 바로 그것이었다.

질리언과 대치중인 와이번은 정말 끔찍했다.

마차를 예닐곱 대는 이어붙인 듯한 거대한 덩치에 짧고 빳빳한 털이 빼곡히 돋은 와이번은 비행 형 마물이라는 말처럼 새와 비슷한 꼴이었다.

물론, 새 부리와는 달리 날카로운 이가 가득한 긴 주둥이라던가 푸른 핏줄이 툭 불거진 얇은 피막 같은 날개가 마물다웠으나, 그중 가장 끔찍한 건 눈이었다.

크아아아아

깜빡임도 없이 ‘질리언’을 주시하는 작고 노란 눈알은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비앙카는 숨도 쉬지 못한 채 질리언을 바라보았다.

소리를 내어 그를 부르지도, 움직일 수도 없었다.


“잠깐 눈감아 주시겠어요?”

이렇게 될까 봐.

어느샌가 자신을 바라보며 웃는 질리언의 모습에 비앙카는 소리 없이 절규했다.

크게 뜨인 눈에서 툭, 눈물이 떨어졌다.

와이번이 틈을 놓치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왜 그랬어요! 왜 그랬어!”

비앙카는 질리언에게 안긴 채로 목청을 바짝 세웠다.

야무지게 말아쥔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두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뼈마디도 잡히지 않는 작은 손으로 때려봐야 아프지도 않은 눈치였지만, 비앙카는 그런 것까지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비앙카는 정말로 머리끝까지 화가 나 있었다.


“내가 소리 안 냈잖아! 소리 안 냈다고! 당신이 쳐다볼까 봐. 방해될까 봐!!”

평소 비앙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소리였다.


“짐이 될까 봐 숨도 쉬지 않았다고!”

“알아요.”

“그런데 한눈을 팔면 어떻, 어떻게 해!”

말하다 울컥 감정이 치받친 비앙카가 눈물이 그렁해서 소리를 빽 질렀다.

줄리가 보았더라며 눈이 휘둥그레졌겠지만, 이미 질리언이 사방을 물린 후였다.

아무도 없는 4층의 텅 빈 공간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건 비앙카의 새된 목청이었다.


“미안해요. 놀랐습니까?”

“놀랐느냐고요? 놀라기만 했겠어요! 난, 당신이.”

으헝.

잇새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이미 질리언의 셔츠는 비앙카의 눈물로 흠뻑 젖은 지 오래였다.


“난 질리언이…….”

차마 뒷말은 입에 올리지 못하겠는지, 비앙카는 내내 이런 식이었다.

그 순간이 떠오르면 바들바들 떨며 그에게 화를 냈다가, 이내 설움에 겨워 울음을 터트렸다.

해 질 무렵 벌어진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났으나 정작 비앙카가 진정하지 못해 사방이 캄캄해지도록 그들은 4층에 남겨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비앙카는 질리언을 두 손으로 부둥켜안고 울고, 때리며 원망하고 안도했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질리언은 비앙카의 터져 나오는 감정을 다정히 받아내 주었다.


“안심시켜드리려고 한 건데 오히려 놀라게 했나 봅니다. 잘못했어요.”

“하, 하지 마요. 하지 마.”

“안 할게요.”

고분고분 대답하며 질리언은 헐떡이는 비앙카의 등줄기를 느릿하게 쓸었다.

감정에 겨운 여자는 내리 한 시간을 넘게 울었다.

원래도 체력이라 부를만한 게 없었는데, 그렇게 울고 감정을 터트렸으니 힘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부터 비앙카는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모래성처럼 무너져내려 질리언이 거의 떠받치고 있었다.

와이번이 들이닥치며 뚫린 창문에서는 쉬지 않고 칼바람이 들이쳤다.

비앙카가 ‘외투’를 걸치고 있어 다행이었지만, 자이언트 래빗 가죽이 만능은 아니다.

시간을 길게 끌면 결국 앓아눕게 되리라.

질리언은 훌쩍이는 비앙카를 살짝 떠밀어 품에서 밀어냈다.

놀란 비앙카가 팔을 허우적거리며 그를 움켜쥐려 했으나 그보다 질리언이 비앙카를 안아서 일어나는 것이 먼저였다.

오금과 등 뒤로 두 팔을 단단히 두른 그가 울음으로 푹 젖은 비앙카를 사랑스럽게 내려다보았다.


“나머진 침대 안에서 하세요. 밤새 들을게요.”

“능글맞은 소리로 넘길 생각하지 마세요.”

굵은 눈물이 강물처럼 멎지도 않고 뺨 위를 내도록 흘러내렸다.


“난 정말 걱정했단 말이에요.”

“잘못했어요. 이렇게 놀라실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이미 한 시간 전에 했던 말을 다시 속삭이며 질리언이 발걸음을 옮겼다.


“몰랐단 말이에요.”

“제가 잘못했어요.”

한 걸음 뗄 적마다 등 뒤로 몰아치는 시린 바람이 훌쩍 멀어진다.

질리언은 품 안에 안긴 마른 여자의 온기가 꺼질세라 너른 보폭으로 부지런히 움직였다.

마음 같아서는 한꺼번에 두세 계단씩 뛰어 내려가면 좋겠는데, 그랬다가는 또 놀랄 테니까.

한 계단씩 품에 안긴 비앙카가 흔들리지 않게 조심스럽게 발을 떼던 그때.


“난, 당신이, 발로크가 저런 것과 홀로 맞서는 걸 몰랐단 말이에요.”

품 안에서 다른 이야기가 새어 나왔다.


“당연하다던 발로크의 의무가 이렇게 끔찍한 건지 몰랐어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속삭이는 비앙카는 서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만, 힘든 줄 알았어요.”

“난…….”

“이렇게 힘든 줄 몰랐어요.”

당연하게 생각해서 미안해요.

고마워요.

젖어 가슴에 착 달라붙은 셔츠는 비앙카의 속삭임을 그대로 흡수했다.

따끈하고도 간지러운 날숨까지.

질리언은 순간 가슴속이 깃털로 꽉 찬 기분이었다.


“무사해서 정말, 정말 고마워요.”

한마디 한마디에 목 끝까지 간지러움이 차올라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비앙카를 받쳐 든 질리언의 손등 위로 순간 새파란 핏대가 돋으며 잠깐 그의 걸음이 멎었다.


“고마워요.”

“……아니, 아닙니다. 그런 말 하지 마세요.”

한참 만에 대답하는 질리언의 목소리는 잠겨 푹 쉰 것 같이 울렸다.

그의 발걸음이 다시 규칙적으로 움직이며 계단을 밟아 내려갔다.

기분 좋은 온기가 부쩍부쩍 가까워졌다.

비앙카는 뺨을 감싸는 따끈한 공기가 기분 좋아 그에게 기대 눈을 살며시 감았다.


“아니야. 고마워요.”

속삭이는 입매가 확실히 부드럽게 풀려있었다.


“……이건 당연한 일이에요. 약속했잖아.”

“무슨 약속이요?”

“오늘 저녁을 청했잖아요? 감히 그대를 기다리게 할 리가 있나.”

분위기를 환기해보려는 듯 질리언의 목소리는 장난스럽기까지 했지만, 비앙카는 웃지 않았다.


“응. 약속 잊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웅얼거리는 것 같은 감사와 함께 늘어져 있던 손이 그의 젖은 셔츠를 꾹, 붙들었다.

질리언은 더 이상 당연하다는 말로 비앙카의 인사를 거절하지 못했다.


 


‘당신이 죽는 줄 알았어!’

비앙카는 침대에 누워 내내 속으로 삭였던 말을 곱씹었다.

질리언이 다독여준 덕에 많이 진정되었지만, 아직 완벽히 벗어난 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질리언을 찢어발길 것 같던 와이번의 흉포한 모습과 순식간에 끝난 믿지 못할 마지막이 쉬지 않고 떠오른다.

솔직히는 침대에 누워 몸을 녹이는 지금도 이것이 꿈은 아닌지 하는 걱정이 든다.

하지만, 비앙카는 이것이 현실임을 알고 있었다.

내내 고함을 질러대 침을 삼킬 때마다 따끔거리는 목구멍이며, 내내 그를 두드려댄 주먹이 욱신거리며 비앙카에게 현실감을 일깨웠다.

그런데도 불안감이 가시지 않는 건 그가 얼마나 위험한 것을 상대하는지 알아서일까.


“…….”

비앙카는 욱신거리는 손을 들어 가만히 맞잡았다.

눈을 뜨고 있어도 마치 눈앞에 와이번이 있는 듯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것과 대치하던 질리언의 모습도.

늘어뜨린 검을 들어 단번에 와이번을 처리하던 순간, 그는 진짜 발로크 공작이었다.

하얀 궤적이 남을 만큼 빠르고 폭발적인 힘으로 검을 휘두르면서도 그는 여유로웠으며 또한 아름다웠다.

허공에 찰랑이던 그의 은빛 머리칼과 무심하게 가라앉아 있던 금안이 차례로 떠올랐다.

끔찍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찬란한 광경이었다.

‘인간 같지 않은’ 발로크.

비앙카는 이제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딱 그만큼 그가 걱정되었다.

그가 상대하는 것이 진짜 인간이 상대할 수 없는 것들이라서.

두근두근두근.

혼자가 되자 놀란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으나 비앙카는 어떻게든 흥분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아직 그녀의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저는 꼭, 오늘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약속을 잊지 않으셨다면서요.’

쉬면 좋겠다는 질리언에게 비앙카는 고집처럼 저녁을 강행했다.

지금도 아차 하면 잠들어 눈이 영영 떠지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더 늦기 전 비앙카는 질리언에게 말하고 싶었다.


“흠흠.”

목이 살짝 쉰 것 같긴 하지만 목소리를 내는 데는 문제가 없다.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은 비앙카가 줄리를 불렀다.


“만찬장에 갈 준비를 해주렴. 옷을 두툼한 것으로 갈아입는 정도면 되겠어.”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흐물거린다.

비앙카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다.

이미 한계였다.

하지만, 오늘을 절대 넘기고 싶지 않다는 일념으로 비앙카는 기어이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아직 제멋대로 떨리긴 하지만, 티 없이 1층까지 잘 움직여주었으며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음식 역시, 맛있었고 식사 시간은 언제나처럼 즐거웠다.

그렇게 후식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비앙카는 이제 차를 마시며 그에게 준비해온 말을 할 참이었다.


“저기.”

“할 말이,”

눈치를 보다 말이 겹치고 말았다.

하하.

짧게 웃음을 터트린 질리언이 손을 들어 비앙카에게 양보했다.


“먼저 말씀하세요.”

“아, 아니에요.”

비앙카는 심각했던 질리언의 표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전 나중에 해도 돼요.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요?”

“……비앙카.”

“네, 질리언님.”

“몸은 좀 어떠세요?”

“목이 좀 쉬었을 뿐 괜찮답니다. 심지어 귀는 아무 문제 없으니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조금이라도 힘드시면 알려주세요.”

“그럴 리가 있나요. 약속한 저녁도 맛있었고,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온몸이 욱신거리지만, 그건 비밀이었다.

비앙카는 질리언처럼 느긋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1분도 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출정하신다고요?”

미소를 그리던 말랑한 뺨이 차게 굳었다.


“그게 무슨…….”

“웨이브 조짐이 발견되었습니다. 보통 조짐이 발견되면 일주일 내로 시작되기에, 미룰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비앙카는 후회했다.

오늘 아프다고 할걸.

이야기를 들을 수 없다고 할걸.


“웨이브는 마물 떼가 나온다는 말이 아닌가요?”

겨우 말린 눈물이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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