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8. 기다릴게요
(28/47)
028. 기다릴게요
(28/47)
028. 기다릴게요
2023.04.07.
“너무해.”
가릴 새도 없이 잇새로 원망이 튀어나갔다.
오늘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데.
질리언은 그렁한 눈이 되어 자신을 쏘아보는 비앙카가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미안해요.”
“…….”
“시기가 좋지 않았어요.”
“오늘 이 이야기를 하려고 만찬에 초대하신 거군요”
“오전에 빙벽 쪽에서 보고가 들어왔답니다. 조만간 닥칠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예상보다도 이르네요.”
“조만간…….”
비앙카는 질리언의 말을 가만히 읊조렸다.
오늘 생긴 첫 호위 기사도 얼마 전의 기사 충원도.
갑작스럽다고 생각한 모든 일이 이제 와 보니 하나둘 아귀가 맞는다.
그는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구나.
깨달음과 함께 울컥하고 말았다.
“아직 끝내지 못한 이야기는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가요?”
출정을 앞둔 그에게 어린아이처럼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말투가 꼭 투정 부리듯 나간다.
“아직?”
고개를 갸웃하던 것도 잠깐, 질리언은 금세 답을 찾아냈다.
“아, 그렇지요. 아직 청혼에 답을 주지 않으셨어요.”
아직이라고 말하면서도 질리언에게선 전혀 초조함을 찾아볼 수 없다.
마치 당연히 답을 해주리라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 못됐다고 생각하던 것도 잠깐, 비앙카는 볼살을 질끈 깨물어 자꾸 못되게 튀는 생각을 다잡았다.
‘못됐다니!’
질리언은, 발로크 공작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나쁘게 굴었던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의 앞에서만큼은 방심하듯 속내가 푹푹 튀어나올 지경이 아닌가.
그런 그에게 어리광이라니.
투정이라니.
절로 기가 차는 일이다.
비릿해진 입안을 딸기 잼이 올려진 셔벗으로 가심 하는 척, 정리한 후 비앙카는 다시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 지금 상황이 좋지 않네요. 이건,”
“아닙니다.”
질리언은 영리한 남자였다.
짤막한 한 단어, 혹은 낌새만으로도 그는 비앙카가 하려는 말을 손쉽게 눈치챘다.
“답은 언제든.”
“…….”
“언제든, 어떤 답이든 좋습니다.”
못됐어.
비앙카는 소리 없이 앓았다.
얄밉도록 여유로웠던 남자의 얼굴에 순식간에 초조함과 조급함이 무섭게 내려앉아 있었다.
언제든 어떤 답이든 좋다면서 저런 얼굴로 웃는 건 반칙 아닌가.
“승낙하실 때까지, 몇 번이고 마음에 드시도록…….”
“다시 청혼하시겠다는 거지요?”
“승낙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테니까요.”
사과 듣는 건 싫어하면서, 자신은 늘 서슴없이 사과하는 남자.
완벽히 우위에 서 있으면서도, 언제나 완벽한 약자를 자처하는 사람.
비앙카는 언제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이는 발로크 공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부인’
새로이 결혼식을 치르고 진짜 부부가 되자던 그날 이후로 질리언은 두 번 다시 비앙카를 부인이라고 불러주지 않았다.
능글맞은 듯한 말투도.
첫 만남에 내보이던 서늘하던 모습도.
모조리 휘발된 듯 사라졌다.
남은 것은 머릿속이 녹아버릴 것 같은 달콤함 뿐.
“사실, 거절하셔도 할 말이 없습니다.”
“왜요?”
“요즘은 청혼하며 꽃과 보석 광산을 선물하는 게 유행이라지요? 그런 것도 없이 결혼해주십사 밀어붙였으니, 이것이 명령이 아니고 무어냐 야무지게 일갈하더군요.”
질리언은 말끝에 웃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웃기지 않았다.
그는 웨이브 출정을 앞두고 있었다.
오늘같이 끔찍한 것들이 떼로 몰려오는 것을 처리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런데 꽃, 보석, 광산 이야기를 한다고?
지금 그런 걸 주지 않았다고 혼난 이야기를 하며 웃는다고?
가슴이 에이던 감각 대신 비앙카는 걷잡을 수 없이 화가 치밀었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중요해요.”
비앙카는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난 광산이니 보석이니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요. 평생 나와 관련 없었던 것이 이제 와 소중할 리가 없잖아요!”
두 뺨이 열에 들떠 상기되고 호흡이 절로 달렸다.
질리언은 씩씩거리는 비앙카를 향해 물었다.
“그럼, 뭐가 중요하세요?”
“당신의 안전이요.”
매끄럽던 남자의 얼굴에 설핏 파란이 스치며 균열이 일었다.
비앙카는 그 모습을 보며 다시 한 자 한 자 힘을 줘 발음했다.
“질리언의 무사 귀환이요.”
“…….”
“당신이 무사히 돌아와 주시는 것, 그게 제겐 가장 중요해요.”
“비앙카. 우린 지금 청혼 선물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맞아요.”
“그건 청혼 선물이 아닌걸요.”
마치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대하듯 나직한 한숨과 곤란해하는 듯 눈썹을 늘어뜨린 채 질리언이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건 누군데.
울컥 눈물이 솟으며 비앙카는 더는 말을 가릴 여유가 남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당신이 없으면 누가 제게 청혼이나 하겠어요.”
“비앙카!”
‘황실의 수치!’
‘어째서 네가 살아남은 걸까?’
‘관심을 끌기엔 저열한 방법이군요.’
말하는 사이,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쏟아진 악의 어린 말들이 마구 떠오른다.
살아 숨 쉬는 것조차 거슬려 하던 황실에서, 그녀에게 마련해준 것은 죽을 자리였다.
비앙카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질리언에게 속삭였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누가 나 같은 것을…….”
귀가 욍욍 울어대는 착각이 일만큼 숱한 목소리가 떠오르다 사그라들었다.
그중 가장 선명한 건 질리언의 목소리였다.
‘부인’
다정하고 달콤한 목소리로 자신을 불러서 그보다 다디단 웃음으로 뭐든 해드리겠노라 약속하던 그의 음성이.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뒤흔들었다.
비앙카는 고였던 눈물을 쥐어짜내듯 눈을 질끈 감았다.
울렁거리는 것이 금방이라도 목구멍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았다.
뜨끈하고 달큼하면서도 아릿하다.
“질리언.”
울컥 치미는 것을 달게 삼킨 비앙카가 말을 하다 말고 가만히 숨을 골랐다.
자신의 말 한마디 한마디, 눈깜빡임 한 번에도 그의 황금빛 시선이 집요하리만치 달라붙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저는, 아무래도 답을 귀환 후 드릴 수 있겠어요.”
“귀환 후.”
질리언은 가볍게 탄식했다.
부풀었던 마음이 팡, 터져 너덜거리는 것이 눈에 선명히 보였지만, 비앙카는 알은체하지 않았다.
“질리언이 바라는 대답은, 귀환 후.”
“바라는.”
다 꺼져가던 그의 눈에 다시 반짝임이 돌아오고,
“무사 귀환 후 들려드리겠습니다.”
“귀환 후.”
굳었던 얼굴에 미소가 스민다.
비앙카는 제가 교활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답을 바라는 그에게 그것을 미끼 삼아 흔들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어쩔 수 없었다.
그를 대신해 검을 들 수도 없이 마냥 그의 무사 귀환을 빌기만 해야 하는 무기력한 상황에 이것은 비앙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발악이었다.
“무사 귀환 후.”
“약속할게요.”
“그럼, 저도 약속을 해야겠습니다. 꼭 무사히 돌아오겠노라고.”
귀환을 약속하는 질리언을 향해 비앙카는 굳은 뺨을 움직여 미소 비슷하게 그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약속, 지켜주실 거라 믿을 거예요.”
“부디.”
젖은 뺨이 여전히 축축했다.
* * *
질리언은 그날 비앙카를 침실까지 데려다주지 못했다.
만찬이 끝날 무렵, 본성을 찾은 손님 때문이었다.
2성채의 대장이었다.
늦은 시간 공작을 찾은 성채의 주인이라니, 용건은 듣지 않아도 알만했다.
조금 더 함께하지 못해 아쉽긴 했지만 비앙카는 티 내지 않았다.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으니까.
그렇게 잘 돌아온 길이었다.
어쩌다 보니 성혼 후 단 한 번도 함께 잠을 청해보지 못했기에 혼자 자는 건 익숙했다.
하지만, 질리언이 곧 자리를 비울 거라고 생각해서일까.
괜히 너른 침대가 한결 더 휑하니 비어 보인다.
“미루지 말고 대답할 걸 그랬나…….”
실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비앙카는 몸을 동그랗게 말아 무릎을 감싸 쥐고는 눈을 감았다.
몇 번이고 울었던 탓에 눈을 감자마자 버티기 힘든 졸음이 쏟아진다.
비앙카는 희미하게 멀어지는 감각을 즐기듯 몸에서 힘을 뺐다.
‘기다릴게’
머리가 어질어질한 느낌과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울렸다.
꿈인가……?
기다린다는 목소리는 자신의 것이 아니라 질리언의 것이었다.
자신의 손을 붙들고 눈물을 글썽이는 질리언의 모습이 보이자 비앙카는 꿈속에서도 쓰게 웃었다.
오늘 일이 꽤 마음에 맺혔던 모양이었다.
질리언을 안전한 성에 두고 자신이 떠나는 모습을 그리다니.
그는 자신의 손을 붙들고 기다리겠다며 눈물 지었다.
모양 좋은 눈썹이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금안이 물에 흠뻑 젖어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기다릴게.’
‘그래.’
꿈속에서 자신은 우는 질리언에게 웃어주고 있었다.
소식은 착실하게 날아왔다.
일은 차질없이 준비되고 있었지만, 이자르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기만 하는 건 취향에 맞지 않았다.
며칠 사이 여독을 싹 풀렸고 그는 지금 활기가 넘쳤다.
“어머니.”
이자르는 곧장 선왕후 파세트라를 찾았다.
파세트라는 이자르가 성년이 되던 해에 곧장 섭정에서 물러나 왕위를 이자르에게 돌려주었다.
깔끔하고 신속한 이양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따르던 세력들까지 완전하게 단절된 건 아니었다.
파세트라를 찾은 이자르를 반긴 건, 한 무리의 귀족이었다.
“체카람.”
“이자르시여.”
이자르는 재상의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대를 동쪽 화원에서 보게 될 줄이야?”
“오랜 벗이 안부를 전하러 왔답니다.”
어딘지 날 선 말에 파세트라가 재상을 두둔하듯 나섰다.
하지만, 찰나의 순간 이자르는 재상이 소매 속으로 슬쩍 숨기던 서류를 봐버린 후였다.
내년 개간 영지계획서였다.
아직 그에게 올라오지도 않은 서류를 파세트라에게 보여주고 있었다는 상황은 익숙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울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것을 티 내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이자르는 눈매를 누그러뜨리며 파세트라를 향해 웃어 보였다.
“제가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체카람은 이제 막 가려던 참이랍니다.”
“말을 달리기 전 잠깐 인사나 하러 들른 참이니 그를 내몰지 마세요. 어머니.”
이자르는 입꼬리를 바짝 당겨 매혹적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어머니인 파세트라에게서 물려받은 그린 듯한 웃음이었다.
사람의 호감을 사고 경계를 누그러뜨리는.
체카람의 굽은 어깨가 조금은 부드럽게 풀리는 것이 보인다.
이자르는 아직도 일어서있는 선왕후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저는 갑니다. 나중에, 저녁을 함께하시면 어떠세요?”
“오늘 비가 올지도 모른다니, 너무 멀리는 가지 마세요. 아셨죠?”
마치 어린아이에게 주의 주듯 상냥한 당부를 건네는 말에 이자르는 어린아이처럼 웃어 보이고는 그러마 다짐도 했다.
하나, 등을 돌려 나오는 그의 얼굴은 그 어떤 때보다 무시무시했다.
아직도.
저들은 아직도 나를 어린아이로만 보는구나.
소리 없는 분노가 잇새로 무참히 갈렸다.
“살바르.”
“예, 이자르시여.”
“테르미나의 대신관을 찾아봐. 그를 독대하겠다.”
“대신관은 갑자기 왜요?”
어머니의 말씀이 어디까지 진짠지, 그것이 정말 ‘나’를 위한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으니까.
“황녀를 각별히 아껴 감금까지 자처했다고 하지 않나. 한번 만나 뵈어야 하지 않겠어?”
가벼운 말투였지만 이자르는 웃고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