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가여운 미련과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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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9. 가여운 미련과 욕심
2023.04.10.
‘기다릴게.’
귓가를 울리는 질리언의 목소리에 비앙카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질리언!”
하얀 이마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헉헉.
비앙카는 창백한 얼굴로 두리번거렸다.
희붐한 침실을 밝힌 등불과 따끈하게 타오르는 난로를 보자 그제야 현실감이 들었다.
꿈을 꾼다고 생각하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자버린 모양이었다.
그래서인지, 떠나야 하는 자신의 손을 붙든 그가 속삭이던 모습이 찰나에 실재인 양 선명하게도 그려진다.
‘기다릴게.’
질리언을 그 끔찍한 곳에 보내야 하는 건 여전히 불안했지만, 그런 꿈을 꿔서일까.
기다리면 된다는 생각이 확신처럼 든다.
“기다리면 돼.”
희미한 불안마저 소리 내 말하는 순간 연기처럼 사라졌다.
비앙카는 곧장 줄리를 불러들여 아침 시중을 받았다.
어제 몇 번이고 울었던 탓에 눈이 붓진 않을까 했으나, 서늘한 북부령의 공기 때문일까.
의외로 꽤 멀쩡한 모습이었다.
눈이 부었더라면 분명 다들 수선을 부렸을 테니,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줄리, 질리언님은?”
“간밤에 결국 2성채 대장님과 나가셨어요. 아침에 가시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웨이브 전이라. 말씀드리지 못하고 가게 되어 죄송하다고 꼭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혹시라도 서운해할까 봐 서둘러 설명하는 줄리의 모습에 비앙카가 옅게 웃었다.
그 말을 어떻게 해.
웨이브 출정 소식에 그렇게 우는데.
청혼의 답을 무사히 돌아와야 주겠다고 떼쓰는데.
그 앞에서 또 자리를 비워야 한다는 소리를 다정한 그 사람이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질리언의 입을 막은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비앙카는 두 손을 맞잡아 비비는 줄리를 향해 산뜻한 목소리를 내었다.
“오해하지 않으니 염려 말렴. 질리언님도 안 계시면, 아침은 간단히 이곳에서 먹을 테니 준비해주겠니?”
나도 오늘 좀 바빠질 예정이라서.
“식사가 끝나면, 헤일리에게 좀 보자고 전해주렴.”
“예. 마님.”
* * *
“안녕하십니까, 공작부인.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헤일리는 비앙카가 식사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찾아왔다.
비앙카는 헤일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요. 이른 시간인데, 와주어서 고마워요.”
“이른 시간은요. 보통 4시 반 경이면 일어나있으니 언제든 불러주세요.”
“4시 반이요? 상당히 일찍 일어나는군요?”
“일찍은요 기사들은 당연히…….”
헤일리가 말을 하다 말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마도 4시 반이 당연하다는 말처럼 들렸을까 봐 걱정하는 표정이라 비앙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아. 발로크의 아침은 빠르군요.”
대놓고 덮어주는 비앙카의 말에 ‘맞습니다.’라고 맞장구치는 헤일리의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나도 그렇게 할게요. 라는 말은 차마 못 하겠어요. 다만 조금 더 부지런해지도록 노력하지요.”
“예?”
“곧, 질리언님이 성을 비우시니 내가 그 빈자리를 메꾸어야 하지 않겠어요?”
자리에 앉아요.
우두커니 서 있는 헤일리를 앉힌 비앙카는 이어, 줄리를 불러 차를 내오게 했다.
“오늘 헤일리를 부른 건 그 때문이에요. 본성의 관리를 이제 내가 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본성의 관리라고 하시면…….”
“예산안과 집행상황이 담긴 서류와 다달이 지출되는 고정비. 그리고 웨이브와 같은 비정기적이고 돌발적인 지출에 대한 예비비 및 지난 삼 년간의 회계 장부를 받아보고 싶군요.”
비앙카는 원하는 바를 가감 없이 이야기했다.
마음이 정해졌으니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이제, 더는 질리언의 마음이 진짜인지 함정인지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평생을 정당하게 약탈당했다.
태생의 죄는 그런 것이었다.
일평생 약탈당했고 핍박받기로 정해져 있다면, 여기에 그가 하나 더 추가된들 무슨 문제가 될까라고 생각하니 더는 두렵지 않아졌다.
아니, 이것이 질리언 발로크가 비앙카 테르미나를 위해 파둔 덫이라고 해도 괜찮았다.
‘이곳은 그대의 집이잖습니까.’
‘부인.’
이미 그는 넘치도록 충분한 대가를 치렀다.
질리언은 비앙카가 평생 들어보지 못한 따스함을 건넨 최초의 타인이었다.
‘난 괜찮아.’
비앙카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이 호의를 두려워하는 대신 실컷 만끽하기로 했다.
모든 것이 끝나는 날까지.
실컷.
“난, 공작부인이니까요.”
그러나 비앙카는 깜빡한 게 있었다.
자신의 결심 따위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그건 어렵겠습니다. 마님.”
언제나 깍듯하던 헤일리가 처음으로 표정을 굳히며 거부했다.
‘발로크 령뿐만 아니라 본성의 운영 역시 질리언 님께서 관리하고 계십니다.’
‘어째서죠? 영지와 기사단의 운영은 영주가 맡더라도, 내정에 관한 부분은 원래 안주인의 몫이 아닌가요?’
‘이곳은 안주인의 부재가 공공연해서요.’
아…….
단번에 납득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마물’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된다면, 매번 선두에 서서 그것들을 상대해야 하는 공작의 곁을 지키는 건 지옥이 되리라.
차마 그걸 견디라고 누가 강요할 수 있겠나.
비앙카는 욱신거리는 가슴을 달래듯 툭툭 두드렸다.
생각해보면 발로크 공작부인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로크 공작들은 어느 순간 부인을 맞이하고 어느 날 후계를 보았으며, 또한 어느 날 거품처럼 사라졌다.
이것이 발로크였다.
그 점이 더욱 사람답지 않다는 소문을 부추기긴 했지만, 발로크가 되어보니 이제 알겠다.
이들의 생활이 어째서 그럴 수밖에 없는지를.
그 와중에 발로크의 명맥을 잇고 있으니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하아…….”
작게 한숨을 쉰 비앙카는 익숙하게 책장을 넘겼다.
오전에 헤일리를 대면한 후 계속 서재였다.
점심도 샌드위치로 간단히 해결한 참이었다.
웨이브 출정이 잡힌 터라 본성도 미묘하게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비앙카만이 할 일이 없었다.
거치적거리지 않는 것이 도움이 되겠다 싶어 서재로 피신한 참이다.
오늘만 해도 벌써 역사책을 다섯 권째 살폈다.
일전과 마찬가지로 소득은 없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실망하는 법 없이 끈기 있게 책을 넘겼다.
제국과 다른 예언이 북부에만 내려오는 것은 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빠른 방법은 질리언에게 묻거나, 혹은 발로크 영지인을 찾아 묻는 것일 테지만, 그건 나중으로 미뤘다.
출정을 앞둔 상황에서 예언에 관한 질문을 하는 건 예의 없는 짓이니까.
‘죄사함을 다한 발로크를 테르미나가 자유롭게 하리라.’
비앙카는 북부의 예언을 중얼거리며 북부의 설화집을 넘겼다.
역사서만 다섯 권을 내리읽었더니 눈이 침침하고 머리가 아파 좀 쉬어갈 요량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책장을 넘겼을까.
건국 설화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드래곤은 테르미나 시조의 마지막을 지키며 축복했다.
친우여, 언제고 우리의 시간이 다시 한번 함께 흐르길.
그날까지 테르미나의 아이들을 지킬 작은 선물을 내리겠습니다.
드래곤은 한, 기사를 불러 자신의 이름인 발로크를 성으로 내리고 능력을 부여한 후 테르미나를 지킬 것을 명령했다.
바로 테르미나의 드래곤이라 불리는 ‘발로크’의 탄생이었다.’
허무맹랑한 구석이 가득해도 내용을 관통하는 줄기는 역사서와 같았다.
이야기가 세월을 지나며 그럴싸하게 살이 붙어 설화집으로 엮였을 것이다.
하지만, 설화집은 발로크의 탄생에서 끝났다.
비앙카는 아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발로크가 테르미나의 드래곤이 된 과정은 알겠는데 어째서 그 영광된 자가 죄인이 된 건지는 찾을 수가 없다.
문득 자신이 ‘예언’이라는 말에 붙들려 말 한마디에 너무 집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비앙카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뭐가 됐건 좋다.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북부의 예언도 수도의 것도.
모두 발로크가 테르미나를 얻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 골자였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비앙카는 질리언을 위해 뭐든 해줄 수 있었다.
그녀를 평생 아프게만 했던 ‘테르미나’가 그를 위해 쓰일 수만 있다면 이보다 기쁜 일도 없다.
그러니까 비앙카는 조금 더 노력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다시 책으로 눈을 돌릴 때였다.
“마님, 공작님께서 귀성하신다고 합니다.”
줄리가 다가와 속삭였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다.
비앙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계시니?”
“이제 막, 도개교가 내려갔다고 해요.”
“앞장서렴.”
* * *
“대신관께서 이자르님의 방문을 허가하셨습니다. 따라오시겠습니까?”
“물론이지.”
사제의 말에 이자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꽤, 애먹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순순히 접견이 허락되어 격앙된 기분이 한풀 누그러진다.
이자르는 앞선 사제를 따라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대신관이 머무는 신전에는 워프진이 설치되어 있었던 덕에 ‘먼’ 산책 정도로 치부 가능할 성싶었다.
오늘 만나지 못하면 내일.
내일이 안되면 그다음 날.
못해도 열 번쯤은 발걸음 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단번에 접견 신청이 받아들여지다니.
체카람이 뒤집어 놓은 속이, 이렇게 가라앉는다.
이자르가 안내받은 곳은 햇살이 잔잔한 중정이었다.
대신관 앞에는 김이 나는 찻잔이 두 개 놓여 있었다.
“어서 오세요.”
얼굴을 가린 하얀 베일을 거둔 대신관이 건넨 인사에 이자르의 얼굴이 희미하게 굳었다.
“대신관……을 뵙습니다.”
대신관은 젊은 청년이었다.
가슴까지 길게 늘어뜨린 얼룩 없는 하얀 머리칼을 나부끼며 은은하게 미소 짓는 대신관은 정말이지, 신성한 느낌이 들만치 고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희게 센 머리칼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선한 인상의 노인을 기대했던 이자르로서는 심히 불쾌한 꼴이기도 했다.
‘대신관, 그이가 황녀를 퍽 아꼈답니다.’
순간 파세트라의 속삭임이 갈퀴처럼 그의 가슴을 모질게 할퀴었다.
“접견 신청을 넣고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이렇게 뵙게 될 줄 몰랐습니다.”
평상시 싱글거리던 이자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날 선 어조에 사나운 표정이었다.
흉흉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대신관은 얼굴을 구기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 지으며 그를 반겼을 뿐이었다.
“마침, 차를 마시려던 참이었답니다. 담소를 나눌 이가 함께한다면 더욱 즐겁지 않겠습니까?”
‘벌을 자청했지. 자신이 벌인 일이니, 황녀 대신 벌을 받겠다고.’
미소 짓는 대신관은 신성하다 못해 매혹적이기까지 했다.
이자르는 사나운 표정을 가리지 않고 대신관에게 다가갔다.
“이, 내가 누군지 알고?”
“초원의 주인이신 이자르 님을 몰라뵐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 내가 그대를 어찌 찾아왔는지도 아십니까?”
대신관은 그를 짓누르듯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이자를 향해 또 한 번 웃어 보였다.
“앉으세요. 듣고 싶은 이야기는 짧지 않을 겁니다.”
“내가 무얼 궁금해하는지 안다는 말입니까?”
“그럴 리가요. 다만 사람들은 손에서 놓친 것을 아쉬워하며 미련을 가지기 마련이거든요.”
“미련이라니!”
“그럼, 무엇입니까?”
욕심?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인 대신관이 빙긋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