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0. 안주인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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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안주인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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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 안주인의 몫
2023.04.14.
“욕심과 미련은 내 것이 아닌 것을 탐낼 때 쓰는 말입니다.”
이자르는 짓씹듯 속삭였다.
“그렇다면, 이자르께서는 미련이 아니라는 말씀이십니까?”
“대신관. 난 말을 빙빙 돌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상체를 기울여 대신관에게 몸을 가깝게 붙인 이자르가 으르렁거리듯 목을 울렸다.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황녀를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이런 질문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황녀의 편이었던 대신관의 도움을 받아 훗날 비앙카를 부드럽게 빼내 올 요량이었다.
그런데, 지금 대신관이 연적이라도 된 듯 소리 지르다니!
정말 머저리 같은 짓을 해버렸다.
하지만 이자르는 지금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대신관의 모습을 본 순간부터 이자르는 맹렬한 감정에 휩싸여야 했다.
이건 질투일까?
신성하리만치 아름다운 모습.
성녀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선이 고운 얼굴은 그의 예상에 없던 변수였다.
그런 자가 지척에서 아끼고 보듬었다면 황녀가 흔들리고도 남았을 것이다.
심지어 지금 황녀는 언제든 자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어디로든 향할 수 있었다.
발로크 령에서 달아난, 황녀가 향할 곳은 어디일까?
평생 자신을 핍박한 황실일 리는 절대 없다.
그럼 어디일까?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본 자신?
그럴 리 있나.
저를 위해 읍소하던 저, 남자의 곁이 아닐까?
발로크 공작만을 상대하면 될 줄 알았는데, 생각지 못한 난관에 이자르는 눈알까지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이자르 님. 황녀님은 가엽고도 사랑스러운 분이랍니다.”
대신관은 태연한 기색으로 찻잔을 집어 들어 입을 축였다.
저자를 죽이면 어떨까.
흥분한 것과 별개로 이자르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님을 알고 있었기에, 검집에 올라가려는 손을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이건 상처받은 자존심이 부리는 행패였다.
이자르 카르탄.
초원의 주인이면서도 완전한 주인이지 못한 자.
그의 어머니는 선왕후의 이름으로 섭정에서 물러났으나, 유례없이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한 사람으로 그 그늘이 아직 카르탄을 뒤덮고 있었다.
그래서 카르탄은 그의 것이되, 또한 그의 것이 아니기도 했다.
마치, 그의 신부여야 했던 비앙카가 어이없이 발로크 공작 손에 떨어진 것처럼.
아직 기회가 남아 그녀를 되찾으려던 차, 비앙카를 아끼고 사랑하였던 대신관이 미청년의 모습이라니.
심지어 ‘미련과 욕심’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자신을 저격하다니.
뒤끓는 마음이 눈을 뒤집게 하기엔 충분하지 않나.
“그래서?”
“이자르 님, 안심하세요. 저는 신의 종이 된 자로 인간사에 그 어떤 미련도 둔 바 없답니다.”
“그대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지 잊었습니까?”
이자르는 지금 이 곳이 ‘죄’를 자청해 비앙카 대신 감금되어 있는 장소임을 일깨우며 이죽거렸다.
“이것은 제가 벌인 일에 대한 마땅한 값입니다. 이자르 님께서 생각하는 그 어떤 것과도 연관 없으니 의심은 거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그럼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그분을 제국이 오래도록 기다려온 분이라고 했다던데 이건 무슨 의미입니까?”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거기까지입니다. 하지만, 여기까지 찾아온 이자르를 위해 한마디쯤 더 입에 올리는 것을 그분께서도 이해해주시겠지요.”
대신관은 남은 찻물로 입을 축인 후, 이자르에게 속삭였다.
“대륙에 영원한 평화를 가져올 분.”
“그대가 말하는 것이 그분이 맞습니까?”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분은 테르미나가 아닙니다.”
“그것이 중요한 문제입니까?”
여상한 어조로 되물은 대신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복을 정돈했다.
“허락된 시간이 다 되었으니, 이만 들어가 보아야겠습니다. 오늘은 이자르 님을 위해 기도를 올리지요. 부디, 마음의 평화를 얻으시길.”
“원하는 것을 얻으면 자연히 그리될 겁니다.”
대신관은 부드럽게 웃을 뿐, 더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다.
걸음을 서두른 덕에 비앙카는 막 본성에 들어서는 질리언을 마주할 수 있었다.
“비앙카. 마중 나오셨습니까?”
눈맞은 어깨를 털던 질리언은 비앙카의 모습에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황성에서 본 예장을 한 모습도, 성내에서 편한 셔츠 차림의 그도 멋있었으나, 제대로 군장을 차린 그는 또 다른 의미로 근사했다.
우월한 수컷이란 말을 형상화 시키면 이런 느낌일까.
비앙카는 잠깐 숨을 멈추었다.
평소 부드럽게 미소짓던 모습과 달리, 오늘 그는 웃고 있어도 어딘지 사나운 기색이 가득했다.
부드럽게 깔린 속눈썹과 길게 뻗은 매력적인 눈매도 모두 그대로인데.
몸에 살짝 달라붙는 것 같은 군장과 허리에 맨 검집 때문일까.
날씬하지만 균형 잡힌 탄탄한 체형이 고스란히 드러낸 그는 아름답고도 흉포한 느낌이었다.
그 이질감마저 아찔해 설렜다면 그가 놀랐으려나.
비앙카는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리질 않길 바라며 질리언에게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다녀오셨어요?”
“네, 덕분에. 날이 추운데 안에 계시지 않고요.”
“드리고 싶은 말이 있어서요.”
낯선 모습으로 마주해서일까.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하는 그가, 그의 내리깐 시선을 받는 지금이 어울리지도 않게 자꾸 가슴을 뛰게 한다.
비앙카는 대책 없이 설레는 자신을 속으로 꾸짖으며 두 손을 맞잡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발로크의 운영권을 넘겨받고 싶어요.”
“운영권을요?”
말꼬리를 잡듯 되물으며 질리언은 젖은 코트를 벗어 옆에 선 부관에게 넘겼다.
“영지 것이 아니라, 본성이면 충분해요.”
혹시라도 주제넘어 보일까 봐, 비앙카는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본성 운영권.”
중얼거리는 질리언의 옆에선 부관의 시선이 꽤 따가웠다.
아마, 테르미나의 황녀가 드디어 본색을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괜찮았다.
이 정도 의심은 당연하였고, 자신은 그를 설득할 방법도 있었다.
“이름 없는 황녀로 살았다고는 하지만, 저는 ‘궁주’였기도 했답니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로즈베나 궁을 저는 열세 살부터 꾸렸어요.”
질리언은 고개를 끄덕이긴 했으나 허락해주진 않았다.
대신 장갑을 벗어 주머니에 대충 찔러넣고는 성안으로 들어가자는 듯 손을 내밀었을 뿐이었다.
“본성 운영권은 본래 안주인의 몫이에요.”
비앙카는 이 말이 너무 건방지게 들리지 않도록 신경 써서 발음했다.
“하지만 굳이 그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청혼하셨잖아요.
답을 기다린다면서요.
숱하게 말이 떠올랐지만, 하나같이 원망 어린 말투라 비앙카는 얌전히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저는 부, 비앙카를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요.”
뚜벅.
젖은 구두 밑창이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제법 무거웠다.
쉽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비앙카는 질리언의 만류가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오히려 턱턱 맡겼다면 그것이 더 이상했으리라.
다른 그 어떤 것을 떠나 둘은 원수였다.
아버지를 황제의 손에 잃은 젊은 공작과, 황제가 제물로 바친 황녀.
이 둘의 관계는 오롯이 사적일 수 없었다.
질리언이 자신을 원한다고 하더라도, 또한 자신이 마음을 열었다고 하더라도.
거대한 가신을 거느린 발로크 공작의 행보는 또 다를 수 있었다.
질리언이 옆에 선 부관의 따가운 시선은 그런 의미였다.
그래서 비앙카는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야무진 목소리를 내야 했다.
“갑작스러운 이양이 부담되신다면, 출정 중에만 시험 삼아 맡겨봐 주시는 것도 좋아요. 어떠세요?”
“시험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마님.”
의외의 답은 질리언이 아닌 부관에게서 나왔다.
“안녕하십니까, 마님. 저는 발로크 공작님의 부관 크레타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크레타 경.”
비앙카의 대답에 크레타의 눈이 잠깐 커졌다가 호선을 그렸다.
“아무도 저를 기사라 생각하지 못하던데.”
‘발로크의 남자는 전부 기사입니다.’
래핀의 말을 새겨듣길 잘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을요?”
기뻐하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비앙카는 답지 않게 너스레까지 떨었다.
“마님, 알아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저는 본성 집행권을 마님이 운용하시는 것에 대찬성입니다.”
“어머.”
생각지 못한 지지에 비앙카는 작게 가슴이 뛰었다.
“그러지 않아도 좋습니다. 귀찮은 일이랍니다.”
질리언은 끼어든 크레타가 못마땅했던지 탐탁지 않아 하는 목소리였지만, 비앙카는 기회를 놓칠 생각이 없었다.
“제가 하면 안 되는 게 아니라, 걱정이시라면 맡겨주세요.”
부탁해요.
비앙카는 절실해 보이게 모아쥔 두 손을 턱끝까지 들어올려 그를 올려보았다.
“제발.”
난처해진 듯 불현듯 질리언의 귀 끝이 붉어졌다.
이래도 되나 잠깐 고민도 되었지만, 비앙카는 굽히지 않았다.
그의 도움이 되고 싶었다.
당장 그를 속죄할 방법이나, 그를 자유롭게 할 무언가는 떠오르지 않았지만.
적어도 출정을 마치고 돌아온 그가 본성의 서류로 괴롭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굳이.”
“하고 싶어요.”
비앙카는 질리언이 만류하기도 전 그의 말을 싹둑 자르고 끼어들어 문장을 완성했다.
어째서인지 크레타의 얼굴이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질리언은 대답해주지 않았지만,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기에 비앙카는 그를 조르듯 빤히 바라보았다.
숨 막히는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대신, 힘들면 언제든 그만두시는 겁니다.”
“물론이죠.”
“귀찮아지면 주저 말고 말씀해주셔야 해요.”
“그럼요.”
“그럼, 크레타, 서류를 넘겨드려.”
어?
“집행권을 공작님이 아니라…….”
“네, 접니다.”
크레타는 활짝 웃고 있었다.
“공작님께서는 아무래도 좋다는 주의라 누구라도 해야 했거든요.”
어쩐지 울음이 섞인 크레타의 말에 비앙카는 여태 비장했던 것이 살짝 멋쩍어졌다.
“힘……드셨겠습니다.”
크레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대신 질리언을 노려보듯 흘겼다.
그것으로 답은 충분했다.
“집사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말 살 것 같습니다.”
크레타의 말은 진심이었다.
“곧,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집사가 오면 곧장 이관할 생각이라 서류는 이미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 말이 사실인 듯, 크레타는 그길로 곧장 산더미 같은 서류를 들고 비앙카를 찾아왔다.
비앙카가 요구한 대로 지난 3년치의 본성 운영에 관련한 서류들이었다.
성의 개보수며, 사용인들의 임금과 식자재 출납 및 공작가 일원의 품위 유지비가 일목요연하게 쓰여 있었다.
이 많은 것을 크레타, 혼자 해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파리해 보일 만큼 하얀 그의 얼굴이며 본성 운영권을 요구하던 때 눈에 띄게 즐거워하던 표정이 이제야 좀 이해되었다.
“굉장한 분이구나.”
서류를 하나하나 넘겨 확인하던 비앙카는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사일러스 발로크 공작이 죽은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공작가의 품위유지비는 한사람 몫뿐이었다.
삼 년 내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