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1. 새하얀 리시안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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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새하얀 리시안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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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 새하얀 리시안셔스
2023.04.17.
사람은 셋인데, 품위 유지비가 한 명분이라니.
설마 공작가의 인원을 하나로 묶어 처리했나 싶어 금액을 다시 살펴보았지만, 이건 한사람 몫이라 보기에도 초라했다.
“대체 이게…….”
이상한 일이었지만, 비앙카는 까마득하게 쌓여 있는 서류를 보고 이해했다.
혼자서, 공작성의 일을 꾸리는 기사라니.
심지어 크레타는 자신을 공작의 부관이라고 설명하지 않았나.
일에 치여 죽지 않은 게 이상하다.
이런 실수는 어쩌면 당연했다.
“가엾어라.”
비앙카는 크레타를 불러 질책하는 대신, 공작가의 품위유지비 서류를 책상 한편에 따로 빼두었다.
아마 실수는 하나가 아닐 테니, 따로 정리해두었다가 한 번에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류를 보았을까.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비앙카가 발견한 건 미소 짓는 질리언이었다.
“나갈래요?”
“질리언? 어쩐 일이세요?”
질리언은 들어오는 대신 문밖에서 그녀를 불렀다.
“곧 해가 질 거예요. 그전에 잠깐 산책 어떠세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창을 통해 쏟아지던 햇빛이 진하다 못해 붉은 기가 도는 게 보인다.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꽤 집중했던 모양이다.
한참, 집중이 잘 되던 중이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비앙카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류는 꼭 지금이 아니어도 되니까.
“가요.”
질리언이 안내한 곳은 본성 바로 앞의 작은 뜰이었다.
마지막 햇빛이 오롯이 담긴 그곳은 수도식으로 표현하자면 볼품없었고, 비앙카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편안해 보이는 곳이었다.
북부라 화려한 원예종 대신 관목 위주로 꾸민 곳은 해를 받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와,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비앙카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전에 분명 보았을 텐데도 경황이 없어서였는지 기억에 없다.
“성 밖으로는 한 번도 나와보지 않으셨다죠?”
“와서 호되게 앓았잖아요.”
비앙카는 머쓱하게 웃었다.
“그래도 본성 내부는 래핀 경과 함께 둘러보았답니다.”
“들었습니다.”
무척 추울 거라는 생각과 달리 앞뜰은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아 해를 쬐고 있자니 오히려 따끈한 느낌이다.
비앙카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얄팍한 눈꺼풀로 쏟아지는 해가 온통 붉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등 뒤로 누군가가 다가서는 것이 느껴져 놀라 눈을 뜬 것도 잠깐.
비앙카는 끌어당기는 손길에 이내 몸에 힘을 풀었다.
익숙하고도 산뜻한 향.
질리언이었다.
질리언은 비앙카의 어깨를 감싸 자신에게 기대게 했다.
“봄이 오면 꽤 볼만해진답니다.”
“지금도 충분히 좋은걸요.”
“짧지만 꽃도 핀답니다.”
“좋네요.”
쏟아지는 햇살 때문일까.
반쯤 안긴 그의 품에서 전해지는 온기 때문일까.
곱씹을 추억도 없는데 괜히 그리운 감각이 든다.
“무슨 꽃을 좋아하세요?”
질리언이 어깨를 두른 팔에 힘을 줘 바짝 끌어안았다.
몸이 뒤로 쏠리는 느낌과 함께, 그의 품에 완전히 갇히며 목덜미로 따끈한 날숨이 떨어진다.
비앙카는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진저리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입을 뗐다.
“좋아하는 꽃은…….”
없다.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으니, 좋아하는 것을 눈에 담을 틈도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꼽으라면…….
“리시안셔스요. 하얀색 리시안셔스.”
햇살을 두르고 빛나던 꽃은 화려하면서도 사랑스러워 이제 보니 질리언을 닮은 것도 같다.
“리시안셔스.”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따끈하게 덥혔다.
꽃 이름이 이렇게 자극적일 일인가.
절로 얼굴이 화끈해졌지만, 비앙카는 꿋꿋하게 버텼다.
부끄럽지만 그의 품을 독차지한 이 순간이 못내 좋았으니까.
“봄이 오면 이곳을 리시안셔스로 꽉 채워줄게요.”
“좋아요.”
새된 바람에 그 여린 꽃이 바싹 얼어버리진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버렸다.
“그러니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해주겠어요?”
그의 목소리가 훌쩍 낮아졌다고 생각한 순간.
눈앞에 꽃송이가 쏟아져 내렸다.
희고, 부드러운 꽃송이는 리시안셔스였다.
시야가 닿는 모든 곳이 희게 빛났다.
짧게 들이켠 숨이 달콤하고 향기로웠다.
“마법!”
비앙카는 작게 부르짖었다.
오래전, 시조의 죽은 후 몸을 숨긴 드래곤과 함께 실전되었던 마법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고대의 유산에 비앙카는 제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어떻게…….”
질리언의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는 비앙카를 힘껏 껴안아 움직임을 허락하지 않았다.
“난, 사람이 아니잖아요.”
귓가를 스치는 씁쓸한 한마디에 희미하던 호기심마저 싹 기화되었다.
‘인간 같지 않은 발로크’는 경외와 질시를 담은 말이었지만, 당사자에겐 폭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비앙카는 손을 들어 질리언의 팔을 힘껏 마주 잡았다.
“난, 사람을 잡아먹고 태어난 괴물인데 괜찮으세요?”
하하.
어설픈 위로가 먹힌 듯 질리언이 웃음을 터트렸다.
순간, 어깨가 그의 가슴에 바짝 붙으며 더는 좁혀질 것 같지 않던 거리마저 사라졌다.
그의 품에 틀이 박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질리언이 속삭였다.
“기다리던 신부님인걸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해요.”
툭.
나부끼던 하얀 리시안셔스가 비앙카의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뭘 봐?”
오헨리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 눈이 오는 것 같길래.”
“눈?”
그를 불렀던 시종이 창에 바짝 다가서서 하늘을 올려보았다.
구름 한 조각도 없는 오랜만의 푸른 하늘이었다.
“무슨 소리야 대체.”
“이상하다. 분명 눈이 쏟아지는 것 같았는데.”
“어이, 도련님. 시종 일이 헛걸 볼만큼 고된 거야?”
키득거리는 시종의 말에 오헨리는 눈살을 콱 찌푸렸다.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
“카젤 도련님, 화내시면 이마에 주름집니다.”
낄낄거리는 녀석은 유독 변죽이 좋아, 여기저기 잘 어울리는 녀석이었다.
이름은 셰인.
이번에 시종으로 들어온 이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름만 겨우 남은 하급 귀족가의 차남이었다.
그는 시종이 된 자신의 처지에 낙담하는 대신, 희한한 포부를 밝히며 오히려 기운차했다.
‘공작님의 오른팔의 엄지가 될 테다!’
한미한 출신 주제에 심복은 어려울 테니, 심복의 심복이 되어 보이겠다나?
그런 녀석의 첫 타깃은 오헨리였다.
그 어떤 시종의 접근도 허락되지 않은 3층의 유일한 근무자이니 앞길이 창창할 거라는 진지한 헛소리와 놀리듯 부르는 ‘도련님’ 소리는 굉장히 거슬렸지만, 사실 큰 도움이 되었다.
거리낌 없이 투덕거리는 둘의 모습에 오헨리를 고깝게 보던 눈초리가 많이 부드러워졌다.
오헨리는 고마웠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분명 조금 전까지 송이가 굵은 눈이 앞뜰로 쏟아져 내렸단 말이다.
“진짜라구!”
“큰일이네, 우리 도련님. 겨우 3층에 서 있는 것도 힘들면 대체 무슨 일을 하실 수 있으려나? 응?”
낄낄거리는 녀석의 목소리가 복도를 명랑하게 울렸다.
“그만해.”
공작성의 가장 중요한 층이라는 3층으로 배정받았기에 일이 잘 풀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사방이 감시하는 눈치로 가득했고, 오헨리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옴짝달싹 못 한 채 자리를 지키는 것이 전부였다.
오늘도 머저리같이 내내 서 있다가, 점심을 핑계로 간신히 1층으로 내려왔다.
오헨리는 지금 짜증이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어휴. 우리 도련…….”
“그만하라고!”
사나운 목소리가 쨍하니 1층을 울렸다.
지나가던 다른 시종들이 쳐다볼 만큼 큰 목소리였다.
순간, 오헨리를 놀리던 셰인의 광대께가 붉어졌다.
“어, 미안, 아니, 죄송합니다.”
놀란 표정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오헨리는 정신이 들었다.
항상 놀림에 발끈하긴 했으나, 오늘만큼 정색한 적은 없었다.
“……그만하랬잖아. 눈 진짜로 왔단 말이야.”
1층 창 너머로 들이치는 햇빛은 아직도 찬란했다.
믿지 않는 걸 알지만,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래.”
오헨리의 말에 셰인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볼게 하는 소리와 훌쩍 멀어진 건 그 후의 일이었다.
“하…….”
쏟아지던 눈은 온데간데없이 화사한 쏟아지는 금빛 햇살을 보고 있자니, 오헨리는 정말이지 울고 싶었다.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 * *
그날 밤.
딱딱딱!
성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경계를 서던 기사가 성문 위쪽에 난 손바닥만 한 작은 문을 열어 빼꼼히 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잡힌 것은 족히 오십은 되어 보이는 기사였다.
기사들은 완전 무장 상태로 개개인이 갖춘 무구가 척 봐도 보통이 아니었다.
하지만, 무구에 비해 옷차림이 엉망이었다.
더러운 것은 둘째치고 북부령에 어울리지 않는 얄팍한 겨울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검을 제대로 잡아보기도 전에 얼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
경계병은 코웃음을 쳤다.
“누구십니까?”
“기사를 모집한다는 공고령을 보고 왔습니다. 공고령은 아직 유효한 겁니까?”
“공고령?”
“여기 있습니다.”
경계를 서던 이는 기사가 작은 문틈으로 건네는 종이를 받아들었다.
너무 낡고 오래되어 의심했지만, 받아보니 발로크령에서 내건 것이 분명했다.
뭐 얼마나 만지작거렸길래.
경계병은 백 년은 되어 보이는 공고령의 모습에 떨떠름한 표정이 되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상부에 보고 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공고령은 유효합니까?”
“……기다려주십시오 확인하겠습니다.”
공고령은 유효했다.
출신을 따지지 않고 서임을 받을 수 있다지만, 애초에 기사 서임 시험을 통과한 자는 많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기사는 용병이 아니었다.
그 출신을 귀족으로 제한 둘만큼 그들은 우아하고도 올곧은 신념과 철학을 가진 검사들이어야 했다.
기본적인 교양학을 비롯하여, 군사학, 지리까지 익혀야 했기에 신분 제한을 철폐하고도 그 수가 많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기사가 다섯도 아니고 오십이나 한 번에 발로크의 기사가 되길 원한다고?
이건 수상했다.
경계병은 긴장한 눈초리로 빠르게 문밖의 기사들을 훑었다.
“잠깐 기다려주십시오.”
정중한 말과 달리 그의 손은 검집에 올려진 채였다.
* * *
“기사가 오십?”
외성에서 말을 달려온, 경계조가 들고 온 소식에 크레타의 표정이 설핏 굳었다.
“기사가 확실하나?”
“오른쪽 어깨의 견장을 확인했습니다.”
테르미나 제국은 ‘출신’의 제한을 없앴기에 정식 서임을 받은 기사는 그 자격을 증명하는 징표를 만들었다.
오른쪽 어깨에 매다는 금색의 견장이 그것이었다.
견장은 황실에서 정식으로 발부하는 것을 위조했다가는 황실 모독죄로 처형될 터라 사칭하는 이는 없었지만, 크레타 역시 믿기지 않아 물었다.
“…….”
크레타는 고개를 돌려 의자에 기댄 질리언을 바라보았다.
사흘을 내리 마물을 베어도 끄떡없던 이가 바로 발로크 공작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질리언은 정오부터 안색이 창백해져 영 기운을 못 차리고 있었다.
쉬게 두고 싶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조심스러운 질문에 감긴 질리언의 눈이 뜨였다.
그와 시선이 마주친 크레타가 불현듯 재빨리 눈을 깜빡였다.
방금, 공작의 눈이 길게 찢어져 있었던 것 같았다.
성난 짐승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