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존재한 적 없는 공작부인
(32/47)
032. 존재한 적 없는 공작부인
(32/47)
032. 존재한 적 없는 공작부인
2023.04.21.
바깥에 세워뒀다고는 하나 오십 명의 기사였다.
작정하고 쳐들어온다면, 두꺼운 나무 문은 오래 버텨주지 못하리라.
외성의 경계를 서던 기사는 초조함에 입안이 바싹 마르는 기분이었다.
각, 성벽에는 기사가 배치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 인원이 북쪽, 그러니까 마물이 쏟아져 나올 방향에 집중되어 있었다.
수도로 향하는 외성의 주 출입구에는 문을 열 수 있는 최소한의 인원인 여섯밖에 없었다.
그나마 하나는 본성으로 향했으니, 지금 이곳에 남은 것은 다섯.
완벽한 열세다.
최악의 경우 공작님이 오실 때까지 시간을 끌 수나 있을까.
그렇게 초조하게 한 시간을 버텨낸 뒤, 말발굽 소리와 함께 반가운 소리가 울렸다.
“공작님이 오셨다!”
* * *
외성의 기묘한 대치는 질리언의 도착과 함께 끝났다.
“문을 열어.”
나직한 한마디에 외성의 기사들이 곧장 경계를 풀고 도르래를 돌리기 시작했다.
이음쇠가 맞부딪히며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성문이 열렸다.
“흐음.”
활짝 열린 문밖의 기사를 확인한 질리언이 나직한 소리를 내었다.
발로크 령을 찾은 기사의 상태는 보고대로였다.
적어도 오십은 되어 보이는 기사는 정식 서임을 받았음을 증명하는 황실의 견장을 차고 있었으며 무구는 꽤 상급의 것으로 모두 통일되어 있었다.
저건, 주인이 있는 기사였다.
무구를 맞춰줄 만큼 재력 있는 주인.
질리언의 한쪽 눈매가 설핏 들렸다.
“발로크 공작이다. 귀한 손님이 오셨다기에 맞이하러 나왔지.”
“저희는 손님이 아닙니다.”
“그럼?”
“공고령을 보고 발로크의 기사가 되고자 찾아왔습니다.”
“네, 주인은?”
터벅.
한걸음 나서며, 질리언이 웃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눈보라에 그의 머리칼이 흐트러뜨리며 산개하듯 날아오르게 했다.
시야를 희게 물들이는 눈발 사이로 보이던 빛나는 금안이 섬뜩하다고 느낀 순간 기사의 목덜미에 검날이 드리워졌다.
“……!”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젊은 발로크 공작이 검을 빼 드는 것은 고사하고, 언제 다가온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기사는 믿기지 않는 상황에, 빠르게 눈을 굴려 상황을 살폈다.
그런데, 놀라는 건 자신들뿐 발로크의 기사들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이게 발로크라는 것인가.
“네, 주인은?”
잠깐 머뭇거리는 사이, 발로크 공작은 가볍게 검을 비틀어 검등으로 목젖을 눌러 압박을 해왔다.
고작 그 정도에 목이 졸리는 것같이 숨이 막혔다.
“난 두 번 말하는 걸 좋아하지 않아.”
“주, 주인은 없습니다.”
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지척에서 빛나는 금안이, 마치 목덜미에 이빨을 드리운 짐승처럼 흉포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제야 기사는 이 매혹적인 공작을 그 어떤 영애도 원치 않았음을 깨달았다.
눈부시게 아름답고도 매력적인 젊은 미혼의 공작.
그럼에도 아무도 그를 원하지 않았던 것은…….
“저, 정말, 입니, 다.”
보통 남자가 아니기 때문은 아닐까?
당장에라도 집어 삼켜질 것 같은 위압감을 피우는 남자라니!
기사는 이를 딱딱 맞부딪히며 떨었다.
“네, 주인은?”
두 번 말하길 싫어하는 공작이 세 번째로 물었다.
죽는다!
기사는 순간 확신했다.
“정말입니다. 섬기는 주인은 없…….”
“샘스 프렌츠는 어떻게 되었나.”
생각지 못한 이름에 기사의 눈이 커졌다.
“아무리 물어도 질문을 알아듣지 못해서 말이야.”
조금 전까지 사납던 기색이라고는 찾을 수 없을 만큼 담담한 표정이었다.
칼날 같던 기세도, 짐승 같이 끓던 금안도 점잖아진 지 오래다.
“그는 어떻게 되었나?”
질문은 조금 전보다 명확해졌다.
하지만 기사의 입은 꽉 다물린 채 한참이나 열리지 않았다.
아니, 곧장 대답할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었다.
‘발로크 령으로 가게, 가서…….’
“주인님은 안 계십니다. 공고령이 유효하다면 발로크의 검으로 살고 싶습니다.”
‘그의 기사가 되게.’
“기사의 맹세는 파기되었고, 저희는 주인을 찾고 있습니다.”
“네 주인은 대단히 영악한 자였어.”
과격한 표현을 하며 젊은 공작은 웃었다.
“명인에게 맞춤 제작한 무구를 지급할 만큼 자신의 기사를 아끼면서도, 가문의 문장을 내리지는 않았지.”
젊은 공작의 시선이 비어 있는 왼쪽 어깨에 닿았다.
“왜인지는 잘 알 거야.”
잘 관리된 기사만큼, 황실의 눈엣가시인 것은 없으니까.
황태자의 수족인 그가 기사를 부리는 것만큼 건방진 건 없으니까.
그렇게 조심스럽게 양성한 기사단이었다.
얼마 전 황태자에게 버려졌다고는 하나, 샘스 프렌츠는 능력이 있는 자였다.
지금 당장에야 미움을 사 내쳐졌다고는 해도 언제고 황태자가 다시 불러들일 터였다.
그 사실을 샘스 프렌츠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애지중지 키운 기사를 황실이 아닌 발로크로 보냈다고?
“발로크는 아무나 들이지 않아.”
“발로크라면 부러진 검을 받아주실 거라 하셨습니다.”
“……부러진 검.”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살벌하게 빛나던 금안이 눅진하게 풀렸다.
“그대의 주인은 정말 약지 않았나? 거절할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이렇게 떠밀어버리다니.”
들어오라는 듯 한발 비켜선 발로크 공작의 모습에 기사는 작게 신음했다.
‘걱정 말게. 짓밟힌 신의를 발로크는 알아봐 줄 테니까.’
발로크 공작의 신랄한 평가 그대로 자신의 주인은 너무도 영리한 사람이었으며,
발로크 공작 역시 자신의 주인이 본 그대로였다.
“공고령은 유효하니 말이야.”
부러진 검을 향한 ‘새 주인’의 목소리는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정말, 받으실 겁니까?”
“기사들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잖나.”
질리언은 크레타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황제의 끄나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십니까?”
“네가 그런 녀석들을 놓쳤다고?”
“높이 평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와 달리 크레타는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정말이지 교묘한 화법이었다.
칭찬 같지만, 질책보다 더 따가운 소리였다.
만약 일이 생기면, 사전에 미리 차단하지 못한 자신의 책임이 되리라.
원래라면 이런 약삭빠른 소리에 툴툴거렸을 테지만, 오늘은 본성 업무에서 해방된 무척 기쁜 날이었다.
“당분간 감시를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어지간히 좋았나 보지?”
툴툴거리지 않는 크레타의 모습이 어째서인지 알만하다는 듯 질리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래? 의외야.”
“뭐가 의외입니까?”
“흐응. 크레타 난 네가 이렇게 순순히 찬성할 줄 몰랐거든. 아무튼 귀성하자고.”
말에 올라타는 그의 표정은 정말 의구심을 품은 듯했다.
약삭빠르게 떠보거나 혹은 교묘히 일을 떠넘기기 위함이 아닌 진심.
크레타는 싱글거리던 표정을 싹 지웠다.
‘의외야.’
가볍다면 가벼운 반응이었다.
어쩌면 그를 놀리기 위한 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크레타는 공연히 마음이 술렁여 본성으로 돌아오는 내내 기분이 찝찝했다.
‘난 네가 이렇게 순순히 찬성할 줄 몰랐거든.’
뭔가 놓치고 있는 기분에 말을 달리는 동안 크레타는 계속 골몰해야 했다.
그리고 본성에 다다랐을 때야, 크레타는 이 기분 나쁜 감각이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공작님. 제가 더 의심했어야 합니까?”
앞뒤 없이 던진 질문이지만, 질리언은 알아들은 듯 싱긋 웃기만 했다.
입꼬리를 날렵하게 들어 올려 웃는 그는 싱그러웠다.
하지만, 저 표정이 크레타를 정말 열 받게 하는 건 알고 있을까?
긍정도 부정도 아닌 채 꿍꿍이를 가득 담은 저 표정!
“의심했어야 합니까? 발로크로 받아들이셨잖습니까? 이미 무를 수도 없고, 무를 생각도 없으셨던 것 아닙니까.”
질리언에게 말하는 크레타의 목청이 높아진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그래야 했지. 하지만 넌 아니잖나. 그래서 의외라고 했던 거지.”
별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야.
질리언은 풋맨에게 눈을 맞아 묵직해진 망토를 건네었다.
“제가 더 의심했어야 합니까?”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이지. 내가 강요할 일은 아니야.”
젖은 장갑도 척척 벗었다.
무릎 밑까지 오는 장화 역시 시종이 가져온 마른 구두로 갈아신었다.
크레타는 질리언을 따라 망토를 찢듯이 벗어 던지고 멀어지는 그를 빠르게 따라잡았다.
“무슨 의미이신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정확히 말씀해주세요.”
크레타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이거, 뭔가 있어!’라고.
그건 크레타가 알아차리지 못한 중요한 것이 분명했다.
질리언의 반응으로 미루어보아 심각한 일이지만, 나쁜 일은 아닐 것이란 것도 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자존심은 상했다.
크레타 바르한.
그는 공식적으로 발로크 공작의 수족이자 또한 북부령의 정보를 책임지는 자이기도 했다.
그가 모르는 정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식길드로 등록하지는 않았으나, 이 북부령에서 그보다 방대한 정보를 다루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질리언의 이런 반응이라니?
크레타는 바싹 애가 타 멀어지는 질리언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작부인이 정말 황제의 끄나풀입니까? 아니면, 다른 세력이 있습니까? 제 정보에 따르면.”
“공작부인?”
빠르게 쏟아지는 크레타의 말을 자른 질리언이 코웃음을 쳤다.
“발로크에 공작부인이 어디 있지?”
“……말장난은 하지 마십시오. 이미 성혼 서약서도 쓰셨잖습니까.”
“그 성혼 서약서라는 게, 이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과도 이어주는 거였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심상찮은 말에 크레타는 일순 바닥이 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
그럼, 이 공작성에 들어온 건 황녀가 아니었나?
버림받은 황녀라더니, 설마 죽은 지 오래였다던가?
잠깐 사이 머리를 스치는 생각은 서너 개였고, 그중 좋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
격앙된 목소리가 잇새로 터져나가기 전.
계단에 한 발을 올렸던 질리언이 속삭였다.
“황제는 제 딸을 황적에서 파내었어. 내게 건넨 건 비앙카 테르미나의 사인이 담긴 서약서였지. 자, 이제 이해가 되는가? 난 아직 부인이 없어.”
헤일리에 이어 크레타까지.
망가지는 저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또렷하게 떠오르는 혐오와 경멸, 그리고 안쓰러움까지 숱한 감정이 고스란히 보인다.
딱히 비밀이 아니었다.
아니, 제대로 된 결혼식을 준비하려면 그의 측근이라고 할 크레타와 헤일리 등 몇몇은 반드시 알고 있어야 했다.
이 결혼이 어떤 의미를 가진 건지.
어째서 그 어떤 일보다 우선시 되어야 하는 건지.
왜 화려해야 하는지.
이해해야 그가 웨이브를 책임지러 성을 비우더라도 그 준비가 완벽할 테니 말이다.
질리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까마득한 계단층 위에 선 하얗게 질린 비앙카를 보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