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3. 나의 여왕이 되어줘요 (33/47)


033. 나의 여왕이 되어줘요
2023.04.24.



“황……적에서 지워진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황적에서 지워지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요?”

비앙카는 꽤 놀란 듯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낭패였다.

이렇게 알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런 이야기는 처음 들어봐서, 무슨,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서…….”

“어디서부터 들으셨어요?”

속에서 쓴 물이 왈칵 치받는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질리언의 표정은 온화했으며, 그 목소리는 떨림의 흔적도 없이 단정하기만 했다.


“발로크에 공작부인이 어디에 있지? 이쯤부터요.”

“좋지 못한 곳에서부터 들으셨군요.”

말만 놓고 보면 꼭, 빈정거리는 것 같이 들릴 수 있었겠으나 그건 아니었다.

비앙카를 올려다보는 질리언의 표정이 꽤 슬펐다.

길게 뻗은 눈매 아래 자리한 황금안이 파도처럼 일렁이며 빛을 뿌렸다.


“이리 오세요.”

“나는…….”

“전부, 원하시는 만큼 모두 이야기해드릴 테니, 이리 와 주세요.”

두 팔을 벌린 그가 비앙카를 부르듯 가볍게 손을 털었다.


“응?”

조르듯 떨어지는 한마디에, 굳은 듯 서 있던 비앙카가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첫걸음은 오래 걸렸고, 두 번째 걸음은 주저했지만 세 번째, 네 번째부터는 점점 속도가 붙어 다섯 번째부터는 거의 뛰다시피 했다.

이러다 넘어지지 않을까 싶은 맹렬한 속도로 달려온 비앙카는 주저 없이 질리언의 품에 몸을 내던졌다.


‘맙소사’

크레타는 작게 탄식하며 입을 가렸다.

테르미나답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다.

잔혹한 제 아비와 달리 상냥하고, 비열한 제 오라비와 딴판으로 솔직하고 사랑스럽다고.

하나, 누가 봐도 오해할만한 순간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 솔직하고도 어여쁜 반응이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이게 이렇게 쉽게 풀릴 수 있다고?

오해해서 화를 내거나 상처받고 달아나는 게 아니라, 정말 이야기를 듣겠다고 와주었다고?


‘마님께선 정말 사랑스러우시죠.’

진지한 얼굴로 말하던 헤일리의 모습과

‘진심이 언제나 느껴지는 걸요. 정말 제 주인이세요.’

흠뻑 빠진 표정을 고스란히 내보이던 줄리의 말이 차례로 크레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사이, 질리언의 품에 뛰어든 비앙카는 희게 질린 상심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참을 수 없이 가여웠다.

제3자인 크레타도 듣고 놀라지 않았던가.

지금 비앙카는 제 아버지에게, 가족에게 완벽히 버림받았다는 것을 듣고 만 것이다.

오해야 풀더라도 상처는 어쩌지 못할 것이다.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모습이라 생각한 크레타가 슬그머니 빠지는 것과 동시에 내내 점잖게 굴던 질리언이 단번에 비앙카를 품에 가두었다.

흐읍.

목이 졸리는 것 같은 신음과 함께, 질리언의 단단한 두 팔이 비앙카를 으스러지게 안았다.


“황적에서…….”

“미안해요. 이렇게 말할 생각은 결코 아니었어요.”

조금 전까지 빙글거리며 제 수하를 놀리던 젊은 공작의 얼굴은 가엽게도 일그러져 있었다.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다면…… 믿어줄 거예요?”

“아니라고 하면 뭔가 바뀌는 거예요?”

“믿어주시는 겁니까?”

비앙카는 대답 대신 그의 가슴에 이마를 꾹 붙여왔다.

순간 울컥하는 기분에 뭐라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달아오른 비앙카의 숨이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하자, 질리언이 입을 열었다.


“황적에서 지웠다고 하더군요.”

“황족은 죽어서도 황적에 남아요.”

더없이 서글픈 목소리였다.


“저 먼먼 왕국으로 가셨던 선황녀님께서도 황적에는 그대로 계세요.”

“…….”

“돌아……돌아가신 황후께서도.”

침착한 듯싶었지만 말 사이사이 뜨끈한 숨이 늘어지더니 기어이 가슴팍이 젖어 들기 시작했다.


“어째서 나를…….”

“내가 그대를 해칠 거라 믿었을 테니까요.”

질리언은 가늘게 떠는 비앙카의 등을 느릿하게 쓸며 말을 이었다.

가능하면 끝까지 비밀로 하고, 여의치 않다면 적어도 결혼식은 올리고 나서 알려줄 생각이었다.

당연히 잠들었을 거라 믿고 함부로 입을 놀린 자신의 실수였다.

실책이 뼈아팠으나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질리언은 정공법을 선택했다.

정직하게 사실을 털어놓기로.


“목줄을 쥐고 부리던 테르미나의 짐승이 감히 그들을 해쳤다고 하면 안 되지 않겠어요?”

“…….”

“그런 일이 기록되었다간 정말 큰일이 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겁이 났을 거예요.”

단지 그뿐이에요.

그대의 잘못이 아니에요.

굳이 책임이 있다면, 그건 발로크일 거예요.

나직한 질리언의 목소리는 허밍 같기도 하고 한숨 소리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렇게 청혼한 거예요?”

가슴에서 떨어져 나온 온기가 그를 빤히 응시했다.

청명한 듯, 투명한 푸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내내 이어지던 질리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비앙카 테르미나가 아닌 ‘비앙카’의 의사로 결혼해 달라던 게 그래서였던 거죠?”

질리언은 신음하지 않으려 애썼다.

어여쁘기만 한 게 아니라, 얼마나 영리하신지.

질척이는 남자의 표현이라고 넘길법한 것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어쩐지, 새삼스럽게 청혼하고 굳이 결혼식을 다시 하자고 한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상할 게 뭐 있겠어요. 그대가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건 사실인걸.”

“지참금도 없이 덜렁 떠넘긴 신부가 뭐가 좋다고 결혼식까지 올려주겠어요?”

“그대를 내게 보내주어 감사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던가요?”

“감사한 게 말이 돼요?”

서럽게 처졌던 분위기는 능글맞은 듯 집요하게 이어지는 질리언의 대답에 점점 열이 올랐다.


“그보다 더한 표현이 없는 걸 어떻게 해요?”

“질리언 발로크. 난 테르미나예요. 아니, 테르미나였어요. 발로크의 헌신을 원수로 갚은 핏줄이라고요.”

제 입으로 말해놓고도 아차 싶었는지, 얼굴이 설핏 굳는다.

그 모습마저 사랑스럽다.

질리언은 비앙카를 안은 팔을 풀어 살며시 뺨을 감싸 쥐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

“응?”

“하지만, 사실인걸요.”

“뭐가 사실이에요?”

“난 테르미나예요. 아니, 였어요. 이건 누가 뭐래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걸요.”

“있지도 않은 죄를 굳이 뒤집어쓸 이유는 없잖아요.”

그의 말에 움칫하는 듯싶더니, 기껏 마른 두 눈이 다시 흥건해졌다.

일렁이는 눈물이 눈동자를 반사해 꼭 호수 같았다.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질리언은 그 모습을 눈에 새기듯 바라보다, 느릿하게 문질러 닦아주었다.

닦아내는 사이 다시 젖어 들었지만 질리언은 몹시 공들여 손을 움직였다.


“내게 당신은 ‘비앙카’일 뿐이에요. 다른 이름을 원하면 그렇게 부를게요. 존도 좋아요. 소신있게 고집을 부릴 것 같은 이름이니까.”

“뭐야 그게.”

“힉스도 좋겠어요. 아군을 끔찍이 아끼는 야비한 책사 이름 같네요.”

“야비한 건 싫어요.”

“그럼, 크라비올라는 어때요? 검을 잘 쓰는 씩씩한 기사의 느낌이 들지 않아요?”

“난 팔 힘이 없어서 기사는 무리예요.”

“기사가 싫으면, 기사를 부리는 사람은 어때요? 레지나. 왕의 이름도 그대에겐 잘 어울리죠.”

길어지는 이야기에 비앙카의 눈물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질리언은 엄지로 느릿하게 남은 습기를 문질러 닦으며 ‘응?’ 하고 물었다.


“질리언 발로크, 레지나 테르미나는 시조의 이름이잖아요.”

“테르미나의 왕조에 레지나라는 이름은 수도 없이 쓰였는걸?”

“그래도…….”

“그럼, 비앙카 그대는 나만의 레지나가 되세요. 이 북부의 주인이자 발로크의 여왕이 되어 군림하세요.”

말끝에 질리언이 고개를 기울여 비앙카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어느새 다가온다 싶었는데 이마에 따뜻하고 말캉한 느낌이 번진다.

쪽.

한 박자 늦게 고막이 울렸다.


“어?”

그리고 그보다 더 늦게 상황이 인지되었다.

목덜미까지 벌겋게 물든 비앙카가 이마를 감싸 쥐고는 후다닥 뒷걸음질을 쳤다.

쿵쿵쿵.

심장이 머릿속에 들어앉은 것처럼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지, 지, 지금!”

“애원하고 있어요.”

무슨 말을 하는지 뻔히 알면서.

비앙카는 눈을 내리깔고 처연한 표정을 짓는 질리언의 모습에 입이 쩍 벌어졌다.


“이, 게 무슨 애원이라고.”

그의 앞에서 당황한 티를 내고 싶지 않았는데 그만 자신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질리언의 입술이 닿았던 자리가 화끈했던 탓이었다.

온 신경이 이마로 쏠려, 차분하게 생각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애원처럼 느껴지지 않으세요? 그럼, 무릎을 꿇어볼까요?”

“장난하지 마세요!”

손을 잡아 오는 질리언이 금방이라도 무릎을 바닥에 댈 것 같아 비앙카는 새된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적어도 저는 청혼을 장난으로 하진 않아요.”

이번에야말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쪽.

보란 듯이 뺨에 입을 맞춘 남자 때문이었다.


“애원이 싫으면 유혹은 어떠세요?”

“…….”

그는 굳어버린 듯 뻣뻣해진 비앙카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웃었다.


“저는 보기보다 성실하고, 끈기가 있는 편이랍니다.”

“…….”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요.”

쪽.


“답만 주신다면.”

콧날로 떨어지는 희미한 날숨과 그보다 또렷한 이마를 누르는 따끈한 감촉.

얼어버린 듯 서 있던 비앙카는 연거푸 입을 맞추는 질리언의 모습에 뒤늦게 파드득 떨었다.


“가, 가, 가보겠어요!”

무슨 이야기 중이었는지, 어디까지 얘기했는지 하나도 알 수 없었다.

이마를 누르던 그의 입술은 떨어졌는데도 그 감각만은 고스란히 남아 자꾸만 선명해졌던 것이다.

쪽. 쪽.

귓가를 울리는 젖은 소리에, 비앙카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기분이었다.

아아!

차라리 이럴 때 환청이 들리는 게 낫지 않을까!

비앙카는 귀를 막은 채로 몸을 돌려 달렸다.

정숙한 영애는 뛰지 않는다는 예법 선생의 말 따위는 까맣게 잊어 생각나지 않았다.

치렁한 드레스 단이 발끝에 휘감겼지만, 비앙카는 그 끝을 능숙하게 차내며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이미 계단을 뛰어 내려오게 했던 상실감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쪽.


 
놀라 달아나는 비앙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질리언이 문득 웃음을 터트렸다.


“귀여워라.”

새카만 머리칼을 찰랑이며 뛰는 비앙카의 모습 위로 그리운 사람이 겹쳐 보였다.

놀랍게도 너무도 똑같아, 질리언은 잠깐이나마 그 옛날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행복인 줄도 모르고 흘려보냈던 오래전 그때로 말이다.

너울처럼 흩어지는 윤나는 까만 머리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질리언이 나직이 속삭였다.


“이미 숱하게 써서, 더는 고아했던 그 이름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한들.

발로크의 여왕이 될 비앙카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을 찾기는 힘들 것 같았다.


“레지나 테르미나.”

혀끝에서 감기는 그 이름이 다디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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