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4. 한밤중에 침실을 찾은 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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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 한밤중에 침실을 찾은 손님
2023.04.28.
생각해보면 처음부터 이상했다.
그는 풍요의 카르탄, 황금의 카르탄이라고 불리는 드넓은 남부령의 주인이었다.
온갖 귀하고 아름다운 것에 둘러싸여 살아온 날들이었다.
그런데도 언제나 비앙카 테르미나를 처음 보았던 순간만큼은 생생하다.
눈이 마주친 것도 아니었고 제대로 인사를 나눠본 것도 아니었다.
테르미나의 황제와 대면하러 접견실로 향하던 중 스쳐 지나가는 비앙카를 보았을 뿐이었다.
“…….”
과거를 회상하던 이자르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겨우 스쳐 지나간 정도지만, 비앙카의 모습은 이미 해가 훌쩍 넘어간 지금도 손에 잡힐 듯 생생하기만 했다.
한 손에 들어올 것 같은 작고 예쁜 얼굴에 생기라고는 한 줌도 없었다.
사람을 홀릴 것같이 아름다운 얼굴임에도 흔한 감탄보다 가슴이 지끈거리며 울렸던 건 그래서였는지도 모른다.
두고두고 생각나서 기어이 청혼하고야 만 것도.
무려 금을 열 궤짝이나 들이미는 과분한 ‘선물’을 보냈던 것도.
여태 그래서라고 생각했다.
가여워서.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니 아니었다.
제러미 테르미나의 얼빠진 변명에 화가 났던 것도 카르탄의 주인인 자신의 위엄이 손상되어서가 아니었다.
순수하게 비앙카, 자신의 마음을 울렁이게 했던 여자를 놓쳐버렸다는 아쉬움이었다.
그러니, 비앙카를 되찾는 것이 맞다.
“이자르님.”
상념을 끊는 목소리에 이자르가 느릿하게 눈만 굴렸다.
워프의 여파에 시달리고 있음을 잘 아는 살바르가 굳이 그의 휴식을 방해하는 건,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무슨 일이지?”
“때아닌 눈보라에 발이 묶여 한 명이 들어가지 못하고 있답니다.”
앞뒤 설명이 싹 빠진 말이었으나 이자르를 일으키기엔 부족함이 없는 소리였다.
“뭐 얼마나 거세기에?”
“워프진 문양이 드러날 새도 없이 눈이 쌓여 발로크 령 코앞에서 발이 묶였답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그래.”
“다른 방법으로는 입성할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머저리 같은 놈.
목 끝까지 짜증이 치밀었지만, 이자르는 함부로 욕을 내뱉지는 않았다.
북부의 눈을 보진 못했어도 모두가 입 모아 말하는 재앙이 아니겠나.
‘카르탄의 폭우는 풍요의 범람을 불러오지만, 발로크의 폭설은 죽음을 부른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하룻밤 만에 사람 키 두 배가 쌓인다던가.
저걸 인간의 능력으로 어쩔 수는 없을 터다.
이해는 하지만, 대신관에게 받은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아서인지.
가장 고대하던 인물이 들어가지 못했다는 소식에 입안이 여간 쓴 게 아니다.
“겨울이 끝나기 전에 잠입은 어렵겠군?”
“그건 아무도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이번 눈도 원래보다 빠른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칠 수도 있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하나같이 하나 마나 한 소리뿐이군. 일단 알겠으니 가봐.”
이자르는 손을 대충 휘휘 저어 살바르를 물렸다.
이렇게 무기력한 기분은 꽤 오랜만이었다.
오 년 전이었던가.
그렇게 아등바등해도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던 왕위가, 어머니이자 섭정왕이었던 파세트라의 한마디에 결정되었다.
고대하던 왕좌를 얻어 기뻤느냐고?
천만의 말씀.
그날 이자르를 지배한 건 지독한 무력감과 불쾌함이었다.
적법한 왕위 계승자로 이제는 빈 왕좌를 이어받을 능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알리려 백방으로 노력해도 소용없었다.
대신들은 그를 ‘왕자’로만 취급했으며, 아직은 어리다고만 생각했다.
그 어떤 성과를 내도 마찬가지였다.
파벌을 조성하고 수로를 개간하며 괄목할만한 성과를 눈앞에서 내어도 딱, 그뿐이었다.
훌륭한 왕자.
그는 언제나 왕자여야 했다.
자신의 왕좌를 눈앞에도 두고도 언제나 왕자일 수밖에 없던 이자르의 상실감과 무력감을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살바르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번에 그가 벌이는 일은 자칫 대륙 전쟁으로 번질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하나, 살바르는 그 어떤 반대도 없이 순순히 따라주었다.
비앙카를 놓친 상황이 왕위를 되찾기 위해 발버둥 치던 옛날과 똑같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신관은…….
“욕심과 미련이라고?”
순간 평생 억누른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펑 터졌다.
길잃은 분노.
가눌 곳 없는 억울함.
그것을 뭐라 이름 붙여도 좋았다.
이자르는 자신을 집어삼키는 이 감각에 순응했다.
탐욕이건, 집착이건 뭐든 좋다.
온전히 그의 것이어야 했던 것을 되찾을 수 있다면.
눈을 감자 그의 뺨을 간질일 것 같이 나부끼던 결 좋은 흑발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손에서 놓친 것을 아쉬워하며 미련을 가지기 마련이거든요.’
내내 머릿속을 불쾌하게 헤집던 대신관의 목소리마저 쓸어내리는 보드라운 빛이었다.
* * *
“어?”
이게 뭐지?
빙벽을 순찰하던 기사가 하얗게 번진 자국에 한 발짝 다가섰다.
매년 겨울 눈보라와 함께 극심한 한파가 시작되면 빙벽은 균열이 일었다.
그리고 그 틈으로 마물이 쏟아져 나왔다.
보통 균열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나흘에 걸쳐 그 두께를 짐작할 수도 없는 얼음이 갈라지며 진행되었다.
그런데 하얀 반점이라니?
얼룩 같기도 하고 서리가 낀 것 같은 모습은 처음이다.
등골이 선뜩한 것은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만은 아니었다.
잔뜩 긴장해 얼룩을 살피기를 한참 만에 기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균열이 일기 전 비정형화된 반응인가 해서 잔뜩 경계했는데, 단순한 얼룩인 모양이었다.
아무리 살펴도 얼음은 멀쩡했다.
실금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막, 안심한 그가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스윽.
하얀 결정 뒤로 거무스름한 무언가가 세로로 움직였다.
“뭐야!”
놀란 기사가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움직임이 조금 더 확실하게 ‘보였다’
스윽.
이번에는 횡으로 움직였다.
마치 왼쪽으로 한 발짝 움직인 기사를 따라잡듯.
단번에 머리끝이 쭈뼛 서고 뱃속까지 서늘해지는 감각에 기사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마, 마물이다!”
눈에 보이는 그 어떤 확실한 증거도 없지만, 발로크의 기사로 이미 7년을 살아온 기사는 확신했다.
얼음 뒤에서 움직인 저것은 마물이라고.
기사의 고함이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 쿵, 하는 둔탁한 울림이 희미하게 일며 하얀 얼룩이 더욱 크게 번졌다.
맙소사.
기사는 서둘러 물러났다.
쿵.
이제보니 저건 얼룩 따위가 아니었다.
쿵, 쿵
“마물이다! 마물이 빙벽을 들이받고 있다!”
그가 본 하얀 얼룩은 빙벽 너머의 마물이 들이받아 생긴 자국이었다.
그리고 확신하건대, 마물은 빙벽을 거의 다 뚫었을 것이다.
투명한 부분과는 달리 희뿌연 저 부분은 쿵쿵거리는 소리에 착실히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빙벽 뒤의 그림자를 좀 더 또렷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쿵!
잠깐 사이 소리가 조금 더 또렷해졌다.
“블랫 대장을 불러!!”
기사는 빠르게 뒷걸음질로 빙벽과 거리를 벌리며 쉬지 않고 소리 질렀다.
언제 빙벽이 깨질지 모르니, 검 끝으로 하얀 얼룩을 겨누는 건 잊지 않았다.
그렇게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뒷걸음질로 얼마나 헤쳤을까.
주춤거리는 발뒤꿈치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순간, 희뿌연 자국 너머 거뭇한 것이 그를 쫓듯 바닥까지 내려왔다.
“눈알.”
그걸 본 기사는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지금 자신을 쫓아다니는 저건, 마물의 눈알이라고.
“빙벽이 곧 뚫린다!”
설원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소리에 화답하듯 빙벽 너머에서 소리가 울렸다.
쿵.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불길한 소리였다.
쪽쪽.
제발 제발.
벌써 세 번째.
방에 돌아온 비앙카는 연거푸 찬물로 세수를 했다.
쪽쪽.
냉수에 시달린 손은 아프고, 뺨도 온통 얼얼했는데도 귓가에 들러붙은 저 진득한 소리만은 도통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머릿속을 울리는 저 진득한 소리에 서류 한 장을 제대로 넘기기가 힘들다.
“마님, 혹시 어디가 안 좋으세요?”
보다 못한 줄리가 말리듯 빨갛게 언 손을 감싸 쥐며 물었지만, 비앙카는 대답할 수 없었다.
‘질리언이 입 맞춰 주던 게 자꾸 생각나서.’
아니!
입맞춤이 그게 아니라, 이마에!
이마에!
기껏 가라앉힌 두 뺨이 단번에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얼굴이 자꾸 빨개지시네요. 마님, 몸이 안 좋으시면 참지 말고 알려주세요. 공작성의 주치의는 정말 실력이 좋답니다. 팔다리가 떨어져도 쉽게 붙여주시거든요.”
당황해 있던 비앙카도 잠깐 숨이 멎을 끔찍한 소리를 하면서도 줄리는 진지했다.
“찾아만 오면, 깔끔하게…….”
“줄리. 잠깐만.”
길어지는 무서운 소리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비앙카가 말문을 여는 것과 ‘똑똑’ 노크 소리가 울린 건 모두 동시에 일어났다.
“네, 이 밤에 누구십니까.”
들으라는 듯 툴툴거리던 줄리의 입은 무장한 질리언의 모습을 본 순간 꾹 다물렸다.
“출정하십니까?”
줄리는 자신이 시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딱딱한 말투를 내뱉고 있는 것도 모를 만큼 동요했다.
전신으로 뿜어내는 싸늘하고도 무자비한 기운이 위압적이었다.
잊고 있었지만 질리언 발로크는, 아니 발로크 공작들은 늘 이랬다.
감히 눈을 마주치기조차 어려울 만큼 싸늘하고 위압적이었으며, 종종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 들게 했다.
다정함 상냥함, 그리고 웃음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비앙카’가 이 성에 온 후로 바뀌어서 깜빡 잊고 있었지만 이것이 원래 질리언 발로크의 모습이었다.
“주무시나?”
“아닙니다. 모시겠습니다.”
줄리는 공손히 말하며 침실문을 크게 벌려 질리언을 맞았다.
“질리언?”
한밤에 비앙카를 찾은 손님은 질리언이었다.
처음 보는 완전무장을 한 채로.
비앙카는 바보가 아니었다.
내내 달아올라 식지 않는 발그레했던 두 뺨이 순식간에 창백하게 질렸다.
“오늘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일주일이라고 했지만, 정확하지 않다고 했다.
하지만 적어도 조금 더 있을 줄 알았는데.
아쉬움과 당혹스러움이 범벅이 되어 입이 딱 달라붙어 버렸다.
“다녀오겠습니다.”
할 말이 너무 많아 머뭇거리는 사이,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다정히 웃어주었다.
“조심히……다녀오세요.”
“그럼요. 약속했는걸요.”
“아직 답 못 들으셨잖아요.”
“물론입니다. 고대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주고받는 목소리는 서로 여상했으나, 옅게 미소를 걸친 질리언과 달리 비앙카는 눈물이 글썽해진 지 오래였다.
“얼마나 걸리세요?”
“때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아마 그대의 예상보다는 빨리 돌아올 겁니다.”
“제가 얼마나 예상할지 알고요. 날이 밝으면 어째서 안 오시나 하고 불평할지도 몰라요. 전 아는 게 없단 말이에요.”
“현명하고 사려 깊은 분이 그러실 리가. 왕복만 해도 한나절인 곳인걸요.”
“그래도 너무 늦진 마세요. 기다리다 지겨워지면 답이 바뀔지도 몰라요.”
“그건 무서우니까, 절대 늦지 않도록 할게요.”
대답이 선선했기에 비앙카는 울먹이면서도 안도했다.
언제나 그는 자신의 말을 잘 지키는 남자였으니까.
정말로 곧 돌아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비앙카는 깜빡한 게 있었다.
그녀에게 허락된 좋은 날은 애초에 없었다는 걸 말이다.
질리언이 출정한 후 딱, 사흘 만에 전령이 날아들었다.
병력지원요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