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5. 돌아가기로 했어 (35/47)


035. 돌아가기로 했어
2023.05.01.



“전령이 질리언 님의 병력지원요청서를 가지고 왔답니다.”

병력지원?

비앙카는 래핀의 말에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워, 원래 이래, 이런 건가요? 원래 추가 지원을 하기도 하나요?”

순간 온몸에 힘이 쭉 빠져 서 있던 그대로 비앙카는 고꾸라질뻔했다.

때마침 래핀이 잡아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볼품없이 바닥을 나뒹굴고도 남았을 것이다.


“보통의 경우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전례 없는 상황도 아닙니다.”

놀란 비앙카의 모습에도 래핀은 표정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공손하게 대답했다.


“잠깐, 부축해드려도 될까요?”

지금은 양쪽 팔꿈치를 받친 상황.

성인 여성을 부축한다고 보기엔 믿기지 않을 작은 접촉이었다.

그는 성실하고 예의를 아는 기사였기에, 함부로 비앙카에게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나 들어 옮길 수는 없는 자세였기에 비앙카의 허락이 필요했다.


“좋아요.”

대답과 함께 래핀이 비앙카를 안아 들어 옮겼다.

늘 래핀을 질투하던 줄리도 심상치 않다고 생각한 듯 빠르게 차를 준비했다.

잠깐 사이 비앙카는 푹신한 소파에 반쯤 기대 따뜻한 차를 받을 수 있었다.

하나, 진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상황이 많이 안 좋다고 하던가요?”

“이번 웨이브의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고 합니다.”

“그래서요?”

“7성채 일부가 소실되었고 현재 6성채로 전원 이동하여 대응 중이라고 합니다.”

아직 모든 성채를 둘러본 건 아니나, 각 성채는 본성만큼이나 공을 들여 건축했다고 들었다.

빙벽에 맞닿은 7성채의 경우는 특히나 심혈을 기울였다고.


“사상자는…….”

질리언은 괜찮나요?

목끝까지 올라온 질문은 차마 하지 못했다.

병력을 요청하는 건 수장의 권한이다.

그리고, 그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더라면 병력 요청이 아니라 더 무서운 소식이 왔을 터다.

간신히 억누른 질문이 파르르 떨렸다.


“성채가 무너지며, 쏟아지는 잔해에 깔린 기사들이 좀 있는 모양입니다. 상태는 위중하나 아직까지 목숨을 잃은 자는 없는 모양이고요.”

“다행이에요.”

사상자가 없다니 천만다행이다.

비앙카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공작님은요?”

순간 비앙카는 제 입이 실수를 한 건가 해서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하나, 질문은 그녀의 것이 아니라 줄리에게서 나왔던 모양이었다.

래핀의 시선이 줄리와 닿아 있었다.


“마님이 궁금하실 거 아니에요. 공작님께서는요?”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

“부상이 없으신가 봐요. 다행이에요. 마님. 래핀 경은 이런 쪽에 무뎌요. 제일 중요한 말을 가끔 빼먹는다니까요.”

“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이야.”

비앙카는 파르르 떨리는 두 손으로 찻잔을 움켜쥐었다.

고리에 손가락을 걸거나 잔을 움켜쥐는 건 예법상 엄격히 금지된 행동이지만, 손이 떨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양 손바닥이 따끈하게 달궈지며 사시나무처럼 떨리던 몸이 점차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이후 소식은 없어요?”

차 한 모금에 줄리의 타박 한번이 이어졌다.

기분 나쁠 법한데, 래핀은 한참 어린 줄리의 구박에도 순한 표정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대답을 하며 성실하게 굴었다.


“6성채로 옮겨 대응 중이라고만 들었습니다.”

질문은 줄리가 하나 답은 비앙카에게 하고 있다.

눈치가 없다고 구박받고 있긴 하나, 래핀 역시 그 마음을 헤아려서인 듯 불쾌한 기색은커녕 들었던 소식을 하나라도 더 떠올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대응 중이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이곳에서 나고 자란 줄리가 저걸 못 알아들을 리가 없다.

그러니까, 저건 외지인인 비앙카를 위한 질문이었다.

그래서일까.

비앙카는 찻물이 배 속이 아니라, 가슴 깊은 어디까지 데우는 기분이었다.

긴장감에 무섭게 떨리던 몸이 점점 늘어지며, 하얗게 바랜 머릿속도 차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7성채는 웨이브 시작과 함께 무너져 6성채에서 마물을 처리하고 있답니다. 추가 병력 지원 요청은 성채가 무너지며 휩쓸린 기사를 대신하기 위한 인력이고요.”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안 놀랐잖을 거잖아요.”

“하나도 놀라지 않았으면서…….”

“아유, 아녜요 놀랐어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줄리는 웃고 있었다.


“처리는 어디까지 진행되었는데요?”

“반 정도?”

그 소리에 막힌 숨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아…….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 가슴이 아프지만, 동시에 설렜다.

그가 돌아올 날이 성큼 다가온 것 같은 느낌에.

배덕하게도.


 


“괜찮으십니까?”

블랫은 붕대를 동여맨 질리언의 왼쪽 어깨를 눈짓으로만 가리켰다.


“안 괜찮을 이유는?”

“어깨가 반쯤 날아갔는데도 그런 여유라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평온한 질리언의 말에 블랫이 입꼬리를 심술 맞게 비틀었다.

이번 웨이브는 정말 끔찍했다.

경계를 서던 기사 덕에 발 빠른 대처가 가능했으나 빙벽 너머에서 쏟아져 나온 숫자가 예사롭지 않았다.

펑!

빙벽에 금이 간다 싶더니, 단번에 두꺼운 얼음벽이 터지며 마물이 밀려 나왔다.

그야말로 웨이브.

거대한 마물이 파도처럼 밀려 닥쳤다.

7성채가 무너진 건 바로 그때였다.

까마득하게 몰려온 마물에 부딪혀 두꺼운 돌벽이 무너진 것이다.

공격을 당했으면 덜 당황스러웠을까.

그저 저들끼리 밀려나와 부딪힘에 성벽이 무너져 내리다니!

역사상 성벽이 무너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예상조차 해보지 못했다.

무너져 내린 성벽은 그대로 재앙이었다.

기사들이 깔렸고, 그 틈으로 마물이 몰아닥쳤다.

사방이 지옥이었다.

그 틈에 뛰어든 것이 질리언 발로크, 바로 블랫의 주인이자 이 빙벽의 수호자였다.

그는 단신으로 검은 파도같이 밀려드는 마물을 정리했다.

기사들은 무너진 돌벽을 치우고 깔려 있던 부상병을 끌어내는 것만으로도 버거워했다.

그 어떤 지원을 받지 못했기에 홀로 마물의 틈바구니에서 버티던 발로크 공작은 부상을 입었다.

테르미나의 드래곤이라고 불릴 만큼 대단했지만, 그도 한계는 있다는 의미였다.


“어깨가 붙어 있는 게 아주 용하십니다.”

벌겋게 젖은 어깨를 하고서도 질리언은 태연했다.


“안 잘렸잖아.”

“아후. 마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면…….”

“블랫.”

내내 여유롭던 질리언의 표정이 깨진 건 바로 그때였다.

자신의 부상이 대수롭지 않던 남자가 처음으로 큰일이나 된 듯 안색을 굳혔다.


“발설하지 말라 했을 텐데?”

“그럼요, 그럼요. 발설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만 입을 다물면 비밀이 될 건데요 뭘. 마님께서는 공작님의 어깨가 이렇게 너덜거리는 건 봐도 절대 모르실 테니까요.”

대놓고 빈정거리는 블랫의 말에 질리언이 미간을 가늘게 좁혔다.


“지금 바쁘다잖아.”

“그렇죠 뭐. 의사에게 보여주고 꿰맬 시간도 없을 정도로요.”

“블랫.”

나직이 깔리는 살벌한 목소리에도 블랫은 놀라는 척도 하지 않았다.

싸늘한 목소리에 놀랄 때가 아니었다.

질리언의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6성채의 대장인 엘리자베스는 지금 상황을 살피고 보고를 받으러 나간 터라, 지금 질리언의 곁을 지키는 것은 블랫뿐이었다.

마물들이 잠깐 물러나 한숨 돌리는 이 순간이 의사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될 것이다.

질리언에게 쓸려나가다시피 한 녀석들은 다시 뭉치자마자 벌떼처럼 쇄도할 테니까.

그때가 아마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마물은 원래 물러서는 법이 없다.

지금은 예외적인 상황이다.

성채가 무너지며, 기사가 깔리고 그들을 구조해 퇴각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말 그대로 질리언이 마물을 쓸어냈다.

극한으로 쏟아낸 힘이 검 끝에 오러로 응축되자 질리언은 그것을 채찍처럼 휘둘렀다.

스악.

귓가를 울리는 섬뜩하고도 이질적인 소리 한 번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녀석들의 절반이 터지고 절반이 밀려 나갔다.

그렇게 힘을 퍼붓다시피 해서 거리를 벌리는 동안 무사한 기사들이 동료를 꺼내 들쳐메고 도망을 와 바로 이곳이었다.

그런 끔찍한 상황에 사상자가 하나도 없다는 건 기적이었다.

곧 정신을 차린 마물들이 다시 까맣게 몰려올 텐데 그때도 이런 믿기 힘든 행운이 함께할지는 미지수다.

심지어 절대 전력인 질리언 발로크의 한쪽 어깨가 덜렁거리다시피 뜯긴 상태로는 더더욱 무리지 않을까.

‘괜찮다 금방 괜찮아질 거다.’고 했지만 질리언의 상태는 절대 괜찮을 수 없었다.

뚝.

대충 붕대로 질끈 매 놓은 상처에선 아직도 피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가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에 기사들이 동요할까 봐 이러는 걸까?

하지만, 그건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질리언 발로크.

발로크가의 유일한 계승자인 그가 아니면 이 마물을 처리할 사람 같은 건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

마물 하나에 여럿이 달라붙으면 처리할 수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게 말이 되나?

웨이브다.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이 몰려드는 마물을 한 마리당 기사 몇씩 달라붙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그 말은 결국, 발로크 공작 없이는 전멸만이 남았다는 의미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저렇게 둔다고?

블랫은 어쩐지 울컥하는 마음에, 고집부리는 질리언을 향해 눈을 뾰족하게 세웠다.


“잘 생각하시죠. 공작님.”

“잘 생각하고 있어.”

“두 번째 전투 때 여기서 막아내지 못하면, 그 마물이 어디로 향할지는 그 누구보다 잘 아실 테니까요. 공작성의 성벽도 여기와 똑같답니다.”

이건 도발이자 도박이었다.

질리언 발로크가 테르미나의 황녀를 애지중지하며 싸고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발로크령에 없다.

추위에 마님이 쓰러진 후, 성바닥 전체에 자이언트 레빗의 모피를 깔아버렸다 건 공공연한 비밀이었으니까.


“블랫. 말을 가리지 못하는군.”

“말을 가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사실을 알려드리는 겁니다.”

단박에 무섭도록 서늘해진 시선이 전신을 칼날처럼 감쌌다.

그러나 블랫은 그의 살기에 이를 딱딱 부딪치면서도 절대 굽히지 않았다.

뚝.

질리언의 축 늘어진 손끝에서 어김없이 핏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인간 같지 않은 발로크라는 위명에 자신이 사람이라는 사실을 깜빡하셨습니까? 그 팔, 그대로 뒀다간 정말 못쓰실 거예요.”

“금세 붙을 거라고 말했잖아.”

“공작님이 트롤도 아닌데 상처가 그냥 붙을 리가 있습니까?”

블랫은 죽음을 각오했다.

여기서 지금 죽건.

잠시 뒤에 마물에게 찢겨주건.

질리언 발로크가 상처를 살피지 않으면 남은 건 개죽음뿐이라 블랫은 물러날 구석이 없었다.

그렇게 살벌한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질리언은 발끈해서 목청을 돋우는 블랫을 향해 입술을 삐뚜름하게 늘였다.


“내가 그렇게 미덥지 못한 주인이었던가?”

“그런 게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블랫의 고함과 함께 젖은 천이 찢기는 소리가 울렸다.

찌익!

단숨에 왼쪽 소맷부리를 찢어낸 질리언이 차게 속삭였다.


“블랫. 난 돌아가기로 약속을 했어. 누가 감히 발로크의 맹세를 깨뜨릴 수 있단 말이지?”

드러난 그의 왼쪽 어깨는 말끔히 붙어 있었다.

뚝.

젖은 솔기에서 핏물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굉음 같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