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 당연한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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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 당연한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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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6. 당연한 승리
2023.05.05.
“정말, 사람이 아닌 겁니까?”
멍청하게 턱을 떨구고 있던 블랫이 질리언에게 물었다.
얼빠진 표정이 아주 볼만했기에, 질리언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포션은 대체 뒀다 어디에다가 쓰나?”
“…….”
“설마 어깨가 뜯겼는데 대충 꿰매서 다시 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게…….”
“네 말처럼, 사람이라면 말이야.”
블랫은 질리언의 추궁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굴었다.
‘저런 상처를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애초에 마물과의 전투는 대부분이 공작을 엄호하는 식이라 기사들이 질리언처럼 큰 부상을 입어 본 적이 잘 없었다.
물론 기사들이 대응할 때도 있긴 하나 보통 제압하지 못하면 부상을 입는 게 아니라 모두 죽었다.
덕분에 블랫이 아는 부상이란 건 엄호하며 생긴 경미한 것들이었다.
목숨에는 지장이 없는.
잘 꿰매거나 부목을 대고 쉬면 낫는 것들.
‘……포션은 생각도 못 해봤지 뭐. 게다가 저게 그렇게 효과가 좋을 줄 누가 알았나.’
속으로 툴툴거리는 블랫을 향해, 질리언이 내내 했던 말을 한 번 더 해주었다.
“금방 좋아진댔잖나.”
“그러게요. 포션을 썼으니, 라는 말을 덧붙여주셨으면 좀 좋았습니까?”
그의 말에 억울한 듯 볼멘소리를 하지만, 부루퉁한 목소리와 달리 안심한 듯 표정은 한참 전부터 밝아져 있었다.
“네가 날 이렇게 못 미더워하는 줄은 몰랐어서.”
“그……!”
“짓궂으시네요.”
말문이 막힌 블랫을 구원한 건 서늘한 음성이었다.
“엘리자베스! 언제 왔어!”
“……대장이라고 직함도 붙여주시지요.”
호들갑스럽게 반기는 블랫의 모습을 못 본 체하며 시선을 돌린 엘리자베스가 질리언을 향해 인사를 올렸다.
“6성채 대장, 엘리자베스 스완. 경계를 마치고 보고합니다. 마물떼의 움직임은 현재 7성채에서 3시간 떨어진 지역에서 관찰되고 있으며, 약 1시간 전부터 운집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수고했어. 기사들은?”
“한 명도 낙오 없이 귀성했…….”
“아니, 부상자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엘리자베스의 말을 질리언이 담백하게 수정했다.
“넷인가는 상태가 꽤 위중한 것으로 보고 들었다.”
“아마 오늘을 넘기기 힘들 것 같습니다.”
주저 없는 대답에 블랫의 얼굴이 굳었다.
질리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물었다.
“넷인가?”
“일단 오늘은, 넷을 예상합니다.”
“오늘은……? 스완 대장은 내가 이 일에 매일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나 보군?”
“그런 의미가 아니라, 기적적으로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요.”
“지금 이 상황에 기적 같은 것을 기대하다니. 귀엽다고 말해줘야 하나?”
“죄송합니다.”
“모두 몇인가?”
“열하나입니다. 조짐 없이 성벽이 터졌던 터라 피해가 컸습니다.”
엘리자베스의 대답 후 임시 사령실은 고요해졌다.
이따금 들리는 건 잔뜩 격앙된 블랫의 시큰거리는 숨소리뿐.
그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는데?”
침묵을 가른 건 질리언의 질문이었다.
“어떻게 할 셈이지 블랫 아워드 대장?”
“유가족에게……충분한 보상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블랫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들지 않았다.
“벌써부터 유가족이라는 단어를 입이 올리는 건, 죽으라는 건가?”
“그런 의미가 아니잖습니까. 기적이…… 일어날 것 같지 않아서요.”
“블랫 아워드.”
“네, 공작님.”
“날 봐.”
명령에 고개를 든 블랫은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 젖어 있었다.
질리언은 그를 보며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희미하던 흔적까지 싹, 가진 그의 어깨를.
“포션은 넉넉해.”
“하지만, 포션은…….”
구하기가 어렵다.
성력을 가진 이가 꼬박 힘을 쏟아부어야 만들어지는 것으로 성력 소모가 만만찮아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씩 성력 발현이 되지 않는 탓에 신관들이 기피하기 때문이었다.
“가져가서 쓰도록 해.”
블랫은 질리언의 말이 고마운 한편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열한 명의 기사는 하나같이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중 하나만 고르기는…….
“공작님, 저는…….”
덜컹.
묵직한 나무 상자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잘그락거리는 유리병이 소리, 그리고 뒤이어 찰랑이는 물소리가 울렸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지 않았다고 해도, 심각한 부상자도 있을 테지.”
자신의 어깨를 눈짓으로 가리킨 질리언이 말을 이었다.
“두 상자면 모자람 없을 것 같은데.”
말끝에 질리언이 웃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시야를 가렸기에 블랫은 질리언이 웃었는지, 자신을 아까처럼 한심하게 쳐다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어떤 표정이든 상관없었다.
“고맙습니다.”
질리언의 곁에 선 스완의 표정 역시 눈물에 일그러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 또한 상관없었다.
으헝.
어린애처럼 소리 내 우는 바보짓을 하고 말았지만, 블랫은 괜찮았다.
한심하게 보여도, 어른답지 못하다 욕을 들어도.
“사,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 누구도 놓치지 않고 모두를 살릴 수 있었으니까.
그러니까 전부 좋았다.
블랫은 벅차오르는 기분을 참을 수가 없어 가슴에 손을 얹고 질리언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블랫 아워드, 공작님을 평생 충심으로 섬…….”
“기사의 맹세라면 거절하지.”
“……왜요?”
기쁜 건 기쁜 거고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블랫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싸늘하게 거절하는 질리언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쏘아보았다.
감히 자신이 이래서는 안 되는 건 알지만, 발로크 공작들은 정말 야멸찬 구석이 있었다.
역대 그 어떤 공작도 기사의 맹세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몰라서 물어?”
“아, 아무리 하찮아도 저도 도움이 될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질리언은 블랫의 말에 눈을 가늘게 늘여 웃었다.
“하찮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적어도 나보단 오래 살 자의 맹세를 받아야 좀 쓸만하지 않겠어?”
“…….”
설마하니 나이를 트집 잡을 줄이야.
블랫은 어안이 벙벙해져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저, 올해 서른밖에 안되었습니다.”
“난 얼마일 것 같나?”
티 하나 없는 희고 매끄러운 피부와 한창 피어나는 듯 물오른 미모.
확실한 나이는 모르지만 블랫보다 한참 어릴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래도…….”
“그나저나, 기사들이 버틸만한 수준인가 보지? 아직도 이런 하잘것없는 거로 입씨름을 하고 버티다니?”
“하잘 것 없……!”
볼멘소리를 외치던 블랫이 순간, 헙 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처럼 맹세가 더 중요한 건 아니었다.
블랫은 그길로 벌떡 일어나 포션 상자를 챙겼다.
잘그락거리는 유리병 소리가 정말이지 사랑스러웠다.
“고맙습니다. 공작님.”
“얼른 가봐.”
대충 손을 휘저은 질리언은 곧장 엘리자베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마저 이야기해봐.”
“예, 일단 다시 무리를 이루는 데는 시간이 다소 걸릴 것으로 예상됩니다. 눈보라가 심해서…….”
문을 닫고 나오는 등 뒤로 엘리자베스와 출정 시간을 의논하는 질리언의 목소리가 언제나처럼 평온했다.
순간 블랫은 또 한 번 울컥했다.
사람들은 알까.
이 빙벽을 발로크가, 공작이, 그의 기사가 어떻게 지켜내는 건지.
걸음걸음에 울리는 유리병 소리에 그의 가슴이 수런거렸다.
“……나?”
“예?”
블랫이 나간 후, 6성채 대장이 좀처럼 집중하지 못했다.
“걱정되나? 저래 봬도 꽤 효과가 좋으니 전부 말짱해질 거다.”
“아,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럼 무슨 일이지?”
질리언의 질문에 엘리자베스가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어.”
“……다.”
“뭐라고?”
“포션이 남았는지 궁금했습니다.”
아.
질리언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설핏 웃었다.
“엘리자베스 스완.”
“네, 공작님.”
“신전에서는 새 발로크 공작이 즉위식을 치르면 포션을 열 병 보내주지.”
갑작스러운 소리에 엘리자베스가 따라오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발로크 역사상, 포션은 단 한 병도 쓰이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아!”
말을 마치고도, 한 박자 늦게 감탄사가 터졌다.
질리언을 바라보는 엘리자베스의 시선엔 경악이 서려 있었다.
“포션은 넉넉하다.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난 발로크의 기사를 헛되이 스러지게 두지 않을 테니까.”
“대체 얼마나 다치신 겁니까?”
‘역사상 단 한 병도 쓰이지 않은 포션’
엘리자베스를 놀라게 한 건 그거였나?
질리언은 금방이라도 자신의 몸을 뒤져볼 기세인 엘리자베스에게서 한걸음 떨어졌다.
“블랫이 그 난리를 쳤는데 못 들었나?”
까딱, 그의 턱짓은 이번에도 말끔한 어깨를 가리켰다.
“역시, 심각하셨군요. 왼팔을 전혀 못 쓰시기에 짐작은 했었습니다.”
“괜찮아. 말끔해졌으니 됐지.”
눈앞에서 주먹을 쥐었다 펴는 모습에도 엘리자베스는 구긴 미간을 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되물었다.
“이렇게까지 몸 바쳐 황실을 수호해야 할 이유가 뭡니까?”
속이 들여다보일 것 같은 투명하고도 새파란 눈동자에 가득한 찬 것은 분노였다.
질리언은 이 시선이 익숙했다.
그와 이 성벽을 지키는 자들이라면 한 번쯤 내비쳤던 감정이기도 했다.
유구한 세월을 내리.
그래서 질리언은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똑같이 속삭여주었다.
“어째서가 아니야. 이게 바로 발로크의 의무니까 하는 거야.”
“…….”
엘리자베스는 더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해한 눈빛은 아니었다.
길게 내리깐 속눈썹 아래 새파란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문득 그 눈동자를 보자 질리언은 누군가가 떠올랐다.
똑같이 새파랗지만, 그 누구보다 따스한 눈빛을 가진 그분이.
비앙카.
그의 여왕님이 못 견디게 보고 싶어져, 질리언은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펴야 했다.
무섭게 솟은 이 감정을 다스리지 않으면 그의 두 다리가 지금이라도 본성으로 달리고 말 테니까.
“보고해. 마물 떼의 예상 도착시간은?”
질리언은 추궁하듯 엘리자베스에게 답을 요구했다.
그는 지금 미치게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아마 앞으로 눈보라가 가시면 귀성하지 않으실까요?”
“그렇게 빨리?”
비앙카는 헤일리의 말에 눈이 동그래졌다.
“원래 웨이브 토벌 자체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뒷정리까지 다 합쳐 길어야 한 달이면 끝나거든요.”
“마물 떼라고 하지 않았어요?”
질리언이 혼자 상대하는.
“이렇게 말씀드려봐야 안심되지 않으실 테지만, 공작님은 강하시니까요. 물론 기사들도 엄호하기도 하고, 더러 활과 창이 먹히는 종은 장거리 공격도 같이 이루어지고요. 투석기도 있으니까요.”
들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 수 있었다.
발로크 령의 그 어떤 이도 질리언이 잘못되는 가정 같은 건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모두, 그의 무사 귀환을 당연하게 입에 올리고 있었다.
그게 안심이 되면서도 묘하게 씁쓸했다.
당연한 승리라니 그런 게 어디 있나.
발로크 공작은 그런 부담을 내내 떠안았던 건가.
아무도 모르게 홀로?
울컥 자신만이라도, 온전히 그만을 생각하는 그의 편이 되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상 디자이너를 불러와 주세요. 헤일리.”
“예?”
“웨딩드레스를 맞춰야겠어요.”
비앙카의 말에 얼굴을 굳힌 헤일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어렵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