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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9. 어서 와줘요 (39/47)


039. 어서 와줘요
2023.05.15.



“고마워라.”

살벌하던 래핀의 기세는 열린 침실 문 사이로 새 나온 가냘픈 미성에 싹 사라졌다.

내내 기죽어 있던 오헨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래핀의 험한 표정이 허망하게 바뀌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마음만 받을게요.”

이어지는 한마디에, 희비가 교차했다.


“난 벤슨 씨가 있어 걱정 없으니 좋은 약은 잘 두었다가 필요한 순간에, 경이 쓰세요.”

“전……!”

“그럼.”

당황한 오헨리가 무언가 말을 해보려 했지만, 그보다 더 빨리 줄리가 침실로 들어가 버렸다.

달칵.

잠금쇠가 물리는 소리와 함께 모든 상황이 끝나버렸다.

래핀은 허망한 표정을 짓는 오헨리를 향해 정중하지만 사나운 축객령은 내렸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상대는 발로크 가신 가문의 차남이라고 들었다.

장남은 지난 웨이브 때 목숨을 잃었고, 남은 후계자가 하나뿐이라 기사로 보낼 수 없어 시종으로 보냈다던가.

그런 상대로 이런 반응은 살짝 너무 과민해 보일 수 있다는 건 안다.

하지만, 기사에게 주인의 명령보다 위에 선 것은 없었다.

원래 문제는 이런 작은 미안함을 파고들어 발생한다.

래핀은 축 처진 오헨리에게 마음을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공작의 명령만 생각할 참이었다.


‘지켜라, 래핀 그래머. 필요하다면 목숨을 걸어.’

언제나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찰나에 불과한 생이니, 목숨을 소중히 아끼라던 말과는 상반된 명령이었다.

질리언 발로크가 그렇게 말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다들 떠드는 대로 황실에 트집잡히지 않기 위해서인지, 그도 아니면 예언에 나오는 대로 발로크의 죄를 사해줄 테르미나여서인지 자신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주인의 명령이라는 사실뿐.

래핀은 멀어지는 오헨리의 등을 가만히 바라보며, 질리언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어유 도련님 왜 이렇게 축 처졌어?”

점심을 먹으러 일 층에 내려오자마자 마주친 건 눈이 보이지 않을 만큼 싱글거리는 셰인이었다.

대체 저번에 무안해하던 기억은 어디로 날려 먹은 건지.

셰인은 그를 보자마자 당장에 달려들어 어깨에 팔을 척, 걸치고는 친한 체였다.


“왜, 다리가 많이 아파?”

“어깨에 올린 팔 내려.”

“겨우 이게 힘들어? 큰일이네! 우리 도련님.”

“그런 거 아니니까 좀.”

“그런 게 아니면 왜 이렇게 축 처졌어?”

평소에도 대놓고 네게 줄을 대겠다! 라고 외치던 녀석이 아닌가.

이렇게 살갑게 구는 것 또한 녀석의 말처럼 자신의 수족으로 살고 싶다는 야망 때문인 걸 안다.


“말해봐. 들어줄게.”

평소라면 당장에 짜증을 부리며 밀쳤을 터다.


“해결은 못 해줘. 알지? 나같이 한직에 있는 녀석이 도련님의 고충을 어떻게 도울 수 있겠어?”

그런데, 무안하리만치 내친 후라서일까.

싱글거리며 듣기만 해주겠다는 녀석의 살가운 말에 그만 흔들리고 말았다.


“실은…….”

“오! 좋아. 우리 한 발짝 가까워진 거지?”

“말하지 말까? 아무래도 수상하잖아.”

“수상하긴! 대놓고 말하고 있잖아. 너의 수족이 되어 심복의 심복 자리를 노리겠다고. 난 원하는 바가 명확해 도련님.”

코앞에서 눈꼬리를 접어 찡긋, 애교부리는 셰인의 모습에 오헨리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야망도 뭐 저런 야망이 있지?

하찮다 못해 기도 안 찬다.


“나 자신이 너무 하찮게 느껴져 기운 빠졌는데, 그런 내게 목메는 셰인 너를 보고 있자니 뭔가 허탈하다.”

“뭐가 허탈해. 이러면서 사는 거지 뭐. 도련님, 아직도 괘종시계처럼 서 있다 오는 거야?”

셰인은 오헨리의 어깨에 감은 팔에 힘을 줘 걸음을 슬쩍 옮겼다.

식당이 있는 방향이었다.


“괘종시계라니.”

“그게 뭐 어때. 괘종시계 하다가 어느 순간 되면 화병이 되었다가, 뭐 점점 더 가치 있는 기물이 되는 거지.”

“그게 위로야?”

“온종일 찬바람 들어오는 문 앞에 서 있는 나보다 낫잖아. 일단 도련님은 발이 시리진 않잖아. 아, 나 손이 언 거 같아. 호 해줘.”

오헨리는 능청스럽게 손을 들어 보이는 셰인의 모습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래핀인지 개핀인지 하던 녀석에게 위협당하던 것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얼었다면서 손이 하얗기만 하고만!”

오헨리는 호들갑스럽게 제 앞에서 흔들리는 셰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손아귀에 잡힌 손은 셰인의 허풍과 달리 따끈하고 거칠었다.


“아니야, 지금은 녹이고 와서 그렇지 진짜 손이 얼마나 시린지 몰라.”

이렇게 말을 받아주는 게 처음이라 신난 모양인지 셰인이 눈을 삐죽하게 세우고선 더욱 어리광을 부렸다.


“잘 보라니까? 아, 이거 언 자국 다 어디 갔어.”

눈앞에서 흔들리는 손을 쳐내며 오헨리는 콧방귀를 꼈지만 내심 셰인의 거친 손에 당황했다.

하급이라고는 하나 전부 귀족가의 자제였다.

피부가 거칠 수 없다는 의미다.

손이 틀 정도면 허풍은 아닌 모양이었다.


“엄살 그만 부리고 이거나 발라. 명색이 발로크가의 소속인데 손이 그게 뭐냐.”

오헨리는 품에 넣고 다니던 작은 통을 꺼내 셰인에게 건넸다.


“내 손이 어디가 어때서?”

“잔뜩 거칠어갖곤. 빨리 바르기나 해. 며칠만 잘 발라줘도 금세 다시 보드라워질 거니까.”

“이야. 우리 도련님, 지금 나 신경 써주신 건가?”

어깨에 두른 팔을 걷어낸 셰인이 코앞까지 다가와 싱글거리며 웃었다.

눈앞에서 곱게 접힌 녹안이 반짝, 빛을 뿌렸다.

* * *

그날 오후 내내 침대에 누워 쉰 비앙카는 기운을 차리자마자 줄리에게 펜과 종이를 가져오게 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에 줄리를 기다리는 잠깐이 억겁 같았다.

마침내 줄리가 돌아왔을 때, 비앙카는 목 끝까지 차오른 그리움을 터트리듯 쏟아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첫 줄부터 쉽지 않았다.

‘잘 지냈니?’라는 말은 건성 같았고 ‘보고 싶었어.’라는 말은 너무 무거웠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편지 쓰듯이 화려한 미사여구로 범벅이 된 문장으로 데보라에게 연락하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고심했을까.

수십 장을 버리고 나서도 결국 쓰지 못한 비앙카는 진이 빠져 몸을 허물어뜨리듯 의자에 기대고 말았다.


“잘 안 풀릴 땐, 잠깐 쉬는 게 좋대요. 차 한잔하시고 다시 쓰시면 어떠세요?”

“그럴까 봐.”

“정말 소중한 분이신가 봐요.”

“소중하지. 유일한 가족인걸.”

문득 비앙카가 황급히 덧붙였다.


“아, 유일한 동생, 그런 의미야.”

속사정은 아무도 모르니, 남이 들으면 오해할만한 소리였다.


“보고 싶으시겠어요.”

“그럼. 보고 싶지. 정말 귀여운 아이거든. 날 위해 시녀를 자청할 정도로 사랑스러……럽지.”

말을 하다 말고 비앙카는 기분 나쁜 감각에 입을 꾹 다물었다.


‘일 잘하는 일라이언 후작까지 잃고 싶지 않구나.’

비앙카는 죽음을 각오한 자리에 나가기 위해 제 손으로 치장했던 순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번 다시 부인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본보기를 보여야겠습니다. 성 하나면 확실한 경고가 되지 않을까요?’

죽으라 내보낸 자리에 살아남아 발로크의 신부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대우가 못마땅하다며 질리언이 로즈베네 궁을 부숴버리기까지 했다.

황제가 얼마나 분노했을까……?

비앙카는 순간 배속까지 오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정신없어 흘려보냈던 것들이 하나로 뭉치자 전신으로 소름이 돋는다.

이 상황에서 데보라에게 편지를 쓴다고?

소스라치게 놀란 비앙카가 황급히 쓰다만 편지지를 모으기 시작했다.

누구를 죽이려고!


“마님?”

비앙카는 종이를 움킨 그대로 벽난로에 집어넣고 태웠다.

부지깽이로 뒤적거려 데보라의 이름이, 일라이저 후작이 보이지 않도록 완벽하게.

옆에 선 줄리가 놀란 듯 그녀를 불렀지만, 비앙카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안부 따위 평생 전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그리운 목소리를 죽을 때까지 듣지 못한대도 상관없다.

그들이 안전하기만 한다면.

황제가 그들을 갈가리 찢어먹지만 않는다면, 사랑했던 모습을 평생 추억으로 가슴에 품고만 살 수 있었다.


“마님.”

없애버려야 해!

완벽히!


“마님!”

비앙카는 남은 재도 끌어모아 마구 짓이겼다.

까맣다 못해 희게 질린 가루가 난로 안에서 비상하는 것을 보아도 불안감이 스민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이걸 쓰는 게 아니었는데.

혹시라도 사술 같은 게 있어서 이걸 황제가 복원하면 어떻게 하지?


“마님! 진정하세요!”

불안감에 바들거리는 비앙카의 시선을 돌린 건, 줄리의 고함이었다.


“마음에 안 드시면 제가 할게요. 네? 마님께서는 편지를…….”

“쓰지 않을 거야! 안 써!”

편지라는 말에 비앙카는 발작하듯 고함쳤다.

이 머저리가 방금 무슨 짓을 저지를 뻔했나.

자신이 용서되지 않았다.

편지라니!


“그럼 쓰지 마세요.”

“…….”

“쓰지 마세요. 안 쓰셔도 돼요. 쓰기 싫으심 쓰지 않으셔도 돼요.”

“다, 다, 없애야 해. 남으면 안 돼.”

“제가 티끌도 남지 않게 싹 없애 드릴게요.”

“혹시라도 누가 알아보면 어떻게 하지?”

크게 벌어진 까만 동공과 이치에 맞지 않는 질문.

비앙카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러나 줄리는 내색하는 대신 태연하게 대꾸며, 비앙카의 손에 들린 부지깽이를 넘겨받았다.

이미 헤일리를 통해 황적에서 파인 딱한 사정까지 귀띔들은 터다.

버림받은 황녀에게 소중한 ‘혈육’이란 건 황가의 일원일 리 없다.

소중한 이에게 편지를 쓸 거라며 웃던 사람이 갑자기 이런다고?

자신의 소식이 그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서겠지.

추측은 어렵지 않았다.

줄리는 허덕이는 비앙카를 부축해 소파로 이끌었다.


“차 한잔 드세요. 제가 가서 같이 드실 달콤한 티푸드도 챙겨올게요. 이럴 땐 함께 드시면 좋아요.”

“…….”

“혹시 해서 드리는 말씀인데, 불안하시면 공작님께 저, 재 처리해달라고 할까요?”

“질리언에게?”

“오러는 흔적도 남기지 않거든요.”

말도 안 되는 부탁이다.

누가 오러를 그런데 사용하나.

하지만 불안에 잠식된 비앙카는 이미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게 가능해?”

‘완벽한 처리’에 반응을 보이는 비앙카의 모습에 줄리는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마님. 마물도 안개처럼 터트려버리는 게 바로 오러인 걸요.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눈이 그쳐야 오신댔지? 언제 그칠까? 빨리 그치면 좋으련만.”

곧장, 공작의 귀성을 이야기하는 비앙카의 말에 줄리가 은근한 목소리를 냈다.


“그럼, 전서조를 띄워볼까요? 언제 오실지?”

“그래도 될까?”

“원래 정기적으로 보내고 있는걸요.”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줄리는 비앙카를 안심시킬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것이 설령 웨이브를 처리하는 공작을 불러들여야 하는 일이라도.


“본성에 일이 생기면 가끔 좀 빨리 돌아오시기도 해요.”

“정말?”

어느새 빛을 되찾아 반짝이는 파란 눈동자에 대고 줄리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어서 오시라 쓰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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