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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 집에 돌아가야겠어 (40/47)


040. 집에 돌아가야겠어
2023.05.19.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멍청한 건 주인을 닮아서인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마물을 깔끔하게 베어 넘긴 질리언이 검을 털며 중얼거렸다.

웨이브는 모래폭풍 같았다.

사방이 까맣게 들어차 아무리 애써도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본능이 무섭도록 발달한 녀석들은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는 것도 알고 있을 텐데.

오지 말라고 얌전히 너희들의 영역으로 돌아가라고 과시하듯 힘을 드러내 보여도 마물들은 빙벽을 넘어오는 순간 자석에 이끌리듯 발로크로 향했다.

머저리들 같으니라고.

누가 반겨준다고.

혀를 차던 질리언의 앞으로, 퍽 소리와 함께 화살 한 대가 날아와 꽂혔다.


“엄호는 되었으니, 수성에 집중하라니까.”

혀를 쯧쯧 차보지만 엘리자베스의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는 건 블랫도 마찬가지였다.

7성채가 터진 후 블랫은 눈에 띄게 의기소침해 있었다.

성벽의 문제는 그의 책임이 아닌데도 말이다.

6성채의 엘리자베스는 그전에도 꽤 깐깐했는데, 이번 일로 자신을 꼭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지키려 들었다.


“성가시네.”

질리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는다.

자신이 무너지면 발로크령이, 더 나아가 이 제국이 끝이라 생각해서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건 아니나 역시, 성가시다.

질리언은 손아귀에 진득하게 들러붙는 검 자루를 대충 털어 다시 말아쥐었다.

숱하게 베어내 숫자가 줄긴 했으나 아직 ‘뒷정리’를 부탁하며 몸을 빼기엔 마물의 수가 제법 많았다.

아무래도 오늘까지는 꼬박 힘을 쏟아야 할 모양이었다.

하지만…….


‘돌아오시면 답을 드릴게요.’

귓가를 맴도는 예쁜 목소리 때문일까.

재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괜히 마음이 바빠진다.

질리언은 검을 고쳐 쥐고 곧장, 오러를 주입했다.

얄팍한 하얀 검신이 가늘게 진동하며 곧장 반투명한 빛이 뒤덮였다.

이제 그의 검에 닿는 것은 모두 무로 돌아간다.

이렇게 연속해서 힘을 개방하는 건 질리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질리언은 거기서 힘을 더해 이번에는 오러를 검 끝에서 길게 잡아 늘이기까지 했다.


‘원하는 답을 들려드릴 테니까. 꼭 돌아오셔야 해요.’

아무래도 마지막에 들었던 목소리에 물기가 가득해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게 끝이 보인다고 생각해서인지, 처음과 다르게 자꾸만 더 조급해진다.

질리언은 길게 늘어진 오러를 가볍게 털었다.

퍼석!

검끝에서 희미한 빛무리가 가볍게 땅을 후려치는가 싶더니 곧장 바닥이 길게 파였다.

첫날 기사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던 오러를 채찍처럼 휘두르는 기술이었다.

체력 소모는 좀 되지만, 이렇게 하면 오늘 안에 정리하고 출발할 수 있을 터였다.

퍼석!

습관처럼 폼멜을 가볍게 흔든 질리언이 곧장, 자신을 다가오는 한 무리를 향해 무섭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연이어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눈앞이 싯푸르게 흐려졌다.

슬금슬금 거리를 좁히던 마물들이 터져 나오는 푸른 안개가 신호인 양 단번에 질리언을 향해 쏘아져 들어왔다.

그가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와……. 봐도 봐도 장관이야.”

블랫은 질리언이 피워낸 싯푸른 안개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오러를 발현하기도 어려운데, 뽑아낸 오러를 채찍처럼 휘두르다니.

질리언이 피워내는 푸른 안개는 미처 사라지지 못한 마물의 잔해가 곱게 퍼지며 보이는 현상이었다.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는 수준임을 알고는 있었는데 볼 때마다 경이롭다.


“한가한 소리 마시고 그럴 시간이 있으면 한 놈이라도 더 베십시오!”

잠깐이었는데, 옆에 선 엘리자베스가 그걸 못 참고 또 타박이었다.

블랫은 툴툴거리며 검을 바투 쥐었다.

질리언이 대단하다고는 하나, 그가 모든 마물을 처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웨이브였다.

거대한 파도처럼 보일 만큼 셀 수도 없이 많은 마물이 달려들었다.

질리언이 대부분이라고 할 만큼 많은 수를 상대하긴 하지만, 그중 몇 무리는 질리언을 지나쳐 성채로 다가왔다.

성채를 기어오르거나, 문을 부숴 진입을 시도하거나.

어쨌거나 그런 녀석들의 수도 만만찮기에 이쪽도 바쁘다는 뜻이었다.


“아이쿠!”

블랫은 자신에게 손톱을 휘두르는 마물을 피해 굴렀다.


“아직 안 죽었어?”

조금 전에 해치운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마물이 성가신 게 바로 이런 점이었다.

믿기지 않는 놀라운 재생력 때문에 치명상을 입혀도 눈 깜짝할 새 되살아 난다.

심지어 체력적으로 타격이 가지 않는지, 녀석들의 행동엔 찰나의 머뭇거림도 없다.

그래서 보통 한 명이 공격을 하고, 다른 한 명이 같은 자리를 다시 한번 친다.

재생할 시간을 주지 않고 잘라버리는 것이다.

마물 하나에 기사 여럿이 붙어야 하는 건 마물과 압도적인 힘 때문이기도 했지만, 이런 이유도 있었다.

키에엑!

블랫은 빠르게 자신을 쫓아와 아가리를 벌리는 녀석의 목을 쳤다.

그리고 떨어지는 검을 그대로 다시 위로 쳐올려 재생이 시작되는 마물을 목을 다시 한번 더 쳤다.

검의 궤적을 비트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으나, 조금 전 성벽을 타고 한 무리가 들어와 사방이 접전이었다.

그를 도우러 올 기사 같은 건 없다는 뜻이었다.

바로 옆에서 검을 휘두르는 엘리자베스 역시, 버거운 사정은 마찬가지다.


“으아아아!”

덜렁거리는 목덜미를 세 번째로 이어 내려치고 나서야 한 마리를 해치웠다.

덕분에 체액을 한껏 터져 나와 사방이 진득하고 시큼해 구역질이 절로 났다.

그러나 고개를 한번 터는 것으로 뒤집힌 속을 정리한 블랫은 그길로 곧장 엘리자베스에게 어깨를 맞대었다.


“혼자는 힘들어서 못 하겠다!”

“엄살 부리지 마십, 시오!”

검을 휘두르느라 엘리자베스의 말이 중간에 한 번 끊기는 듯 씹혔다.

블랫은 엘리자베스가 검을 휘두른 궤적을 뒤쫓듯 검을 한 번 더 휘둘러 마물을 마무리했다.


“엄살이 아니야, 나 방금 한 녀석 가지고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몰라. 혼자라 아무래도 시간이 걸려서 그런가 봐. 함께 하자.”

맞는 말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곧장 승낙해주지 않았다.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 무언가 실려 있었지만, 블랫은 모르는 척 같이 바라보며 씩 웃어주었다.


“부탁을 하는 거면 웃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비호감입니다.”

“뭐?”

“아시겠지만, 저는 눈이 높은 편이라.”

“이봐 엘리자베스 대장! 이만하면 나도 꽤 준수한 편, 으쌰! 잖아!”

“강요하지 마십시오.”

엘리자베스는 블랫이 검으로 내리찍은 자리를 연이어 내리치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성내에 기어들어 온 것들이 대부분 정리되고 뚫렸던 성문도 미리 준비한 것으로 교체가 되었다.

성채 쪽의 일은 마무리가 된 것이다.

급박한 순간이 지나자마자 엘리자베스는 망원경을 꺼내 성채 밖을 살폈다.

사방이 푸른 안개로 뒤덮여 질리언이 보이지 않았다.


“어우, 멋지다 우리 공작님. 사일러스 공작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점점 더 괴물 같아지는 거야? 아니면 이번 대가 유독 괴물 같은 건가.”

또 언제 따라붙은 건지 블랫이 휘파람을 불며 건들거렸다.


“주인에게 괴물이라니요. 명예를 아는 기사라면 그런 언사는 삼가십시오.”

“거 참. 칭찬인 거 뻔히 알면서.”

또다시 의미 없는 실랑이가 이어지려나 했는데, 불현 듯 안색을 굳힌 블랫이 허공으로 높이 손을 뻗었다.

순간 거의 동시라 할 만큼 순식간에 새 한 마리가 그의 팔 위에 내려앉았다.


“윽!”

길이가 어른 한 뼘 길이만 한 갈고리 같은 발톱이 자비 없이 블랫의 팔뚝을 파고들었다.


“이 자식이! 살살 앉아도 되는데.”

이번엔 엘리자베스도 타박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신이 팔려 전서조가 날아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을뿐더러, 블랫의 팔뚝을 타고 핏물이 줄줄 흐르는 것이 꽤 심각해 보였으니까.


“편지 풀어봐.”

블랫이 새에게서 받아낸 편지를 엘리자베스에게 던졌다.

새하얀 맹금류.

발로크에서 부리는 맹금류는 종류가 한둘이 아니라 저것의 종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블랫은 정수리에 까만 반점이 있는 이 새를 잘 알고 있었다.

공작의 새.

덩치가 가장 큰 종류는 아니나, 가장 사납고 힘이 좋은 녀석이었다.


“무슨 일이래?”

웨이브 중, 본성에서 날아온 공작의 새.

그 어떤 상상을 해도 별로 좋은 게 떠오르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역시 그렇게 생각한 듯 편지를 푸는 손끝이 잘게 떨렸다.

바스락.

손 끝에 종이가 스치는 소리와 함께 편지를 연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었다.


“왜 무슨 일이야?”

엘리자베스는 블랫의 질문에 대답 대신 곧장 목에 걸고 있던 피리를 꺼내 힘껏 불었다.

상아로 만든 피리는 엘리자베스가 힘껏 불어도 아무런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건 원래 그런 거였다.


“왜, 뭔데? 뭐길래 공작님을 불러?”

공작이 상아로 깎아 만든, 성채의 대장들에게만 내린 그들의 비상 연락 수단 같은 것이었다.

블랫이 놀라는 것이 당연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끝끝내 편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뭐냐고!”

“남의 편지입니다.”

“전시에 내외하냐 지금?”

기가찬 블랫이 따졌지만,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소리를 듣고 귀성한 질리언에게 움켜쥐고 있던 편지를 건네준 것이 끝이었다.

편지를 받은 질리언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받았다고?”

엘리자베스가 받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기에 대답은 아무것도 모르는 블랫의 몫이었다.


“네. 아마도요.”

“이런 이런.”

그런데 심각한 일이 아니었던가.

질리언은 블랫의 대답이 끝나기도 전, 마치 녹아내릴 것 같이 달콤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이 전장이라는 것마저 잊을 만큼 예쁘고 다디단 웃음이었다.

블랫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아름답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덤덤하게 느껴질 만큼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고 이젠 그를 보고도 큰 감흥이 없었다.

하지만 그건 블랫의 착각이었다.

그의 얼굴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착각.

그는 이런 표정을 짓는 질리언을 처음 보았다.

생생히 살아 있는 감정에 겨운 젊은 발로크 공작 말이다.

평소 그는 잘 만든 조각상 같은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그는 사랑에 빠진 천사 같았다.


“와…….”

소름 끼쳐.

블랫은 주저 없이 팔뚝을 문질렀다.

저건, 진짜 사람이 아니야.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

“예? 웨이브는요?”

“뒷정리 정도는 늘 하던 거잖나? 각 성채에 전서조를 띄워. 경계는 끝났고 오늘 밤 마지막 정리를 시작한다고.”

“벌써 뒷정리라고요?”

자꾸 바보같이 질문하게 되는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질리언을 둘러싼 마물의 수가 어마어마했다.

그런데 그걸…….


“거의 다 정리했지.”

“벌써요?”

“날 못믿나?”

블랫은 순간 마주친 질리언의 눈동자가 꼭 짐승 같았다.

눈 깜빡할새 사라져 착각인 듯했지만.

그를 바라보던 황금의 눈이 정말로 짐승처럼 길게 쭉 찢어져 칼날같이 서 있었다.

그런 눈을 하고서 질리언은 더없이 달콤하게 웃었다.


“집에 돌아가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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