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 제어되지 않는
(41/47)
041. 제어되지 않는
(41/47)
041. 제어되지 않는
2023.05.22.
“……도 이렇게 주무실 줄이야.”
부드럽게 머리칼을 쓰다듬는 손길과 다정하게 깔리는 목소리.
기분 좋은 감각에 살짝 웃던 비앙카는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뭐지?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했으나 현실일 수는 없었다.
조금 전부터 코끝을 스치는 청량한 향은 웨이브를 정리하러 떠난 질리언의 것이었으니까.
설마 환청인 건가.
이런 식은 처음이지만, 나쁘지 않았다.
‘보이기도 하면 좋겠는데’
살그머니 눈을 뜬 비앙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황금빛 눈동자를 보자 반가워 코끝이 시큰해졌다.
“이런, 제가 깨웠습니까?”
출정하던 날 그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서일까.
인사를 건네는 질리언은 평소의 편안한 셔츠 차림이 아닌 무장을 한 채였다.
마스크만 넘긴 투구와 길게 늘어뜨린 망토, 벌어진 틈으로 보이는 단단한 갑옷 차림.
무장한 모습의 질리언은 군신 같았다.
푸르게 질린 낯빛이며, 여위어 턱선이 날카롭게 도드라진 지금에도.
이질적일 만큼 고귀하고 아름다운 그 모습이 세상과 섞이지 못한 채 유리되어 보였다.
그 모습에 홀로 와이번과 대치하던 순간이 떠올라 비앙카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넘치도록 고아하나 그 탓에 혼자여야 하는 그가 순간,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던 자신과 비슷하다 생각했다.
왈칵 감정이 넘친다.
“보고 싶었어요.”
진심이었다.
전해지지 않을 거라 생각한 날것의 속내를 들은 남자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그것이 꼭 내내 겁내던 ‘미래’인 것 같아 속이 쓰렸지만 그건 잠깐이었다.
비앙카는 이렇게라도 멀쩡한 그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 못내 기뻐져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그리워해 준 겁니까?”
“그럼요.”
“나를?”
짐승처럼 목을 울리는 목소리가 나지막하다 못해, 바닥에 깔리는 듯했다.
추궁하는 듯한 말투와 달리 질리언은 웃고 있었다.
기뻐하는 것이 여실한 그의 모습에 비앙카는 용기를 내 그간 가슴에 담아만 두었던 말을 쏟아내었다.
“보고 싶어요. 그러니까…… 빨리, 돌아오세요.”
순간 질리언이 뭐라 이루 말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하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얼굴 말이다.
잠시 후 그는 태양보다 눈부신 황금안을 곱게 접어선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는 지금 꿈을 꾸는 거야, 그렇죠?”
꿈속에서 꿈을 이야기하다니.
이제 끝인 모양이었다.
비앙카는 질리언의 미소에 같이 웃어주었다.
힘들 그에게 우는 것이 아니라, 웃는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었다.
“그럼, 나중에 일어나서 만날까요?”
아니나 다를까, 질리언이 작별 인사를 건네왔다.
“벌써 가요?”
“네.”
아쉬워서 붙잡아 보려 했지만, 그는 단호했다.
“주무세요.”
“조금만.”
“주무세요. 일어나서 만나요.”
마치 달래듯 그가 뺨을 부드럽게 쓰는 것과 함께, 갑자기 시야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는 곧 다시……나요.”
모든 감각이 멀어지고 있었다.
그의 말은 조각조각 부스러기가 되어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코끝을 스치던 청량한 내음도 더는 맡아지지 않았다.
평생, 환청을 붙들고 싶어질 줄 몰랐는데!
비앙카는 멀어지는 감각을 붙잡아보려 온몸에 힘을 줬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를 붙잡아 보려 내밀었던 손이 푹신한 이불 위로 내려앉는 감각이 끝이었다.
툭.
필사적으로 뻗던 희고 가는 손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자신을 원하는 손짓에 점잖게 굴지 못하고 덥석 맞잡아 버릴뻔했다.
지금 잡으면…….
질리언은 푸르게 핏대가 돋은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힘 조절이 되지 않아 말아쥔 주먹 위로 하얗게 관절이 돋아났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질리언이 입술을 비틀어 쓰게 웃었다.
고작 바라보는 정도도 이런데, 맞잡았다간 부러뜨릴지도 모른다.
질리언은 다시 곤히 잠든 비앙카를 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힘들지는 않으세요? 언제쯤 돌아오실까 해서 소식을 전해봅니다. 부디 다치지 마시고, 건강히 돌아오세요.’
이거였구나.
본성에서 날아온 소식을 받은 질리언은 내도록 자신을 조급하게 만들었던 것이 무언지 깨달았다.
자신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거다.
비앙카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이미 충분히 서둘렀지만, 작은 종이를 받아든 순간 질리언은 더 서두르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 길로 뒷정리를 맡기고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평소보다 절반에 가까운 시간이 단축되었지만, 달리는 내내 가슴이 타버리는 것 같았다.
그녀를 기다리게 했다는 사실에 불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본성에 도착하자마자 슬그머니 비앙카의 침실에 숨어들었다.
동그랗게 말린 이불더미 아래, 잠든 비앙카의 모습을 보자 비로소 막힌 숨이 터졌다.
‘비앙카.’
밤이 늦었으니 잠깐, 얼굴만 보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예의를 모르는 손이 제멋대로 비앙카를 만지고 말았다.
달팽이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아 자는 그 모습이 가엽고도, 익숙해서.
홀로 외로워 보여서 그만 손을 뻗어버렸다.
분명 시작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런데 손끝에 감기는 아찔한 보드라움에, 그만 손이 멈추지 못하고 자꾸만 비앙카를 쓸었고 기어이 곤히 자던 그녀를 깨우고 말았다.
아차, 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하나 생각도 했고.
그런데 눈이 마주치자마자…….
‘보고 싶었어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해서는 하는 소리라니.
“아…….”
이건 반칙이지.
얼굴을 거칠게 문지른 질리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빠져나왔다.
더는 버틸 수 없다.
한계였다.
“오셨습니까?”
새벽 늦게까지 불이 켜진 집무실 문이 열리자 놀란 기색도 없이 크레타가 서류를 넘기던 그대로 인사를 건넸다.
이미, 출발하며 질리언이 새를 날린 터였다.
“바쁜 척은.”
“7성채가 무너지는 통에 정말 바쁩니다. 성채는 왜 부숴 먹었습니까? 공작님은 제가 조금 한가한 걸 못 보십니까?”
툴툴거리면서도 끝내 자리에서 일어난 크레타가 질리언의 투구와 망토부터 착착 건네받아 정리를 시작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부숴 먹은 줄 알겠어?”
“아닙니까?”
“아니야.”
“황성을 가뿐하게 날려버리시길래 저는 또, 공작님이 하신 줄 알았습니다만?”
“…….”
“정말 못 막아서 터지게 두셨습니까?”
당연히 질리언이 부쉈을 리 없다.
대대로 발로크 공작들은 제 기사들을 끔찍이 아끼기로 유명했다.
정말로 일이 생겨 질리언이 성채를 날려야 했다면 기사들을 미리 대피시켰으리라.
크레타도 답답한 마음에 해본 소리였다.
“도착 전에 이미 터졌더군.”
“하필.”
“그래 하필 말이야.”
간발의 차이였다.
철컥, 하는 소리와 온몸에 두르고 있던 갑옷이 마지막으로 떨어져 내렸다.
별로 무겁진 않은데 기분 탓인지 한결 몸이 가뿐하게 느껴진다.
“목욕물을 받아드릴까요?”
“좋지.”
“……정말 혹시나 해서 여쭙는데, 피곤하십니까?”
평소라면 쌩하니 가서 제 일을 해치웠을 녀석인데, 오늘따라 말이 길다.
질리언은 나른해진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비틀었다.
“왜?”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뭐?”
“피곤해 보이십니다.”
농담기 없는 크레타의 말에 질리언은 대답 대신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크레타의 인기척이 곧 사라졌다.
질리언은 고요해진 집무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내 푸른 안개를 두르고 있던 몸이라 끈적하게 느껴졌다.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어딘가에 몸을 기대 묻히고 싶진 않았다.
단기 그것뿐이었는데.
‘피곤해 보이십니다.’
크레타의 말에 문득 피식 웃음이 새 나왔다.
피곤하다니.
발로크 공작으로 살며 별소리를 다 듣는다 싶기도 하고, 이 몸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 새삼 와닿아 기분이 이상했다.
피곤하다……?
그런 소리를 들어서일까.
날아갈 것 같은 기분과 달리, 몸이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질리언은 지금과 같은 경험이 있었다.
하얀 리시얀셔스가 좋다는 비앙카의 말에 꽃을 불러낸 날이었다.
기뻐하는 비앙카의 모습에 그 역시 덩달아 기분이 좋았었지만, 그날은 오후 내내 영 의욕이 나지 않았다.
그때는 한 번씩 찾아오는 무료함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그럼……피곤함이었던 건가.
생경한 깨달음에 질리언은 크레타가 돌아올 때까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 * *
“그거 들었어? 웨이브가 시작됐대.”
은근한 한마디에 눈이 가득 쌓인 수레를 몰던 이들이 삽시간에 몰려들었다.
“그거 진짜야?”
“건너 건너 사는 윌리엄 씨네 딸이 공작성에서 일하잖아. 그 아이가 어제 휴일이라 집에 와선 그랬다는데? 공작님이 7성채로 가셨다고.”
“허……. 이거 심상찮은데?”
“심상찮긴. 원래 이렇게 눈이 내릴 때면 항상 웨이브였는데. 올해는 눈이 빠르니 웨이브도 빨라졌나 보지.”
“뭐 그렇긴 하지만.”
모여 섰던 사람들이 며칠째 쉬지 않고 무섭게 쏟아지는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절보다 이르게 내린 눈이었다.
원래 이렇게 눈이 쏟아질 때면 웨이브가 시작됐으니 엄연히 웨이브 시기가 달라졌다고 말하기는 애매했다.
“그런데 올해는 왜 이렇게 눈이 빨리 쏟아지는 거야?”
“난들 아나?”
갑작스러운 웨이브 소식에 놀랐던 것도 잠시, 진정되자 영지민들은 수레를 끌며 다시 한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눈을 내다 버릴 ‘저수지’는 거리가 꽤 되었고, 수레를 끄는 건 언제나 고되고 지루한 일이라 수다는 당연한 일상이 된 지 오래다.
“추워서?”
“아니야, 눈 오는 것 치고는 날이 별로 안 춥단 말이야.”
“그건 그래. 그래도, 수도에 비하면 굉장한 추위지 않나? 이젠 쌓인 눈이 얼어서 워프를 봄까지 못 쓸지도 모른다는 소리도 있던걸.”
“수도 쪽 상단 사람들이 그 소리에 아주 죽겠다고 난리를 부렸다던데?”
익숙하게 수레를 끄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쪽에 납품을 못 하면 손해가 크니 그렇겠지 뭐. 겨우내 바깥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사나 몰라.”
“어떻게 살긴, 잘 살겠지. 바깥사람들은 우리가 어찌 사나 궁금할걸?”
“발로크는 겨울에 쌓인 눈을 모아서 봄 여름에 저수지 물로 가둬뒀다 산다!”
“미쳤나.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
“눈수레가 너무 무거워서 미쳤다 왜!”
낄낄거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수레를 끌던 사람들은 이내, 그들의 저수지에 도착했다.
조금 전에 소리친 말 그대로 거대한 구덩이에는 영지민이 모아다 버린 눈으로 가득했다.
올해는 눈이 빨리, 그리고 많이 내린 덕에 벌써 반쯤 찼다.
매년 저 거대한 구덩이에 눈을 성처럼 쌓아도 봄이 오면 겨우 찰랑하게 채운다.
귀찮고 힘들어도 많이 모아둬야 봄 가뭄을 잘 버틸 수 있을 터다.
“으쌰!”
눈 수레를 비우고 모두 송글송글 땀이 맺힌 이마를 닦으며 한숨 돌릴 때였다.
누군가가 저수지를 보며 손짓했다.
“저거 뭐야?”
“뭐?”
“저, 저거 꼭 눈덩이가 움직이는 거 같지 않아?”
“눈이 어떻게 움직여.”
수레를 끌고 오느라 다들 지쳐 대답이 시큰둥했다.
크르릉.
그러나 여기서 울려서는 안 되는 소리에 모두의 얼굴은 무참히 일그러지고 말았다.
“도망쳐! 마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