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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43/47)


043. 서서히, 그러나 확실하게
2023.05.29.


정신이 아득해지도록 매혹적인 목소리였다.

나직이 깔린 음성이 고막이 아닌 머릿속을 곧장 헤집어버린 듯 어질했다.

비앙카는 자신이 들은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난…….”

“허락해줘요.”

응?

되묻는 소리가 코끝을 울려 달콤하게 들렸다.

질리언은 끌어안은 그대로 느릿하게 고개를 떨구었다.

비앙카는 고개를 젖힌 그대로 다가오는 질리언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태양이 쏟아진다.

코앞에서 멈춘 그는 화려하게 빛을 뿜는 금안을 휘어드린 채 한숨인 듯 속삭였다.


“어서.”

그의 목소리가 입술을 스친 것 같았다.

날숨이 고스란히 벌어진 잇새로 타 넘어 들어와 순간 목구멍이 좁혀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그만 허락해.”

명령인 것 같은 애원이 너무도 달콤해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비앙카가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떨어진 두 입술이 맞물렸다.


 
따끈하고 보드라운 감각이 한껏 예민해진 살점을 타고 흘러들어왔다.


‘아!’

견딜 수 없이 자극적인 느낌에 터트린 탄성이 소리도 없이 그에게 집어 삼켜졌다.

질리언은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어와 당연하다는 듯 비앙카의 모든 숨을 장악했다.

구분 없이 뒤엉키는 숨이 점점 달아올라 비앙카는 가슴이 자글자글 끓어버리는 기분이었다.


“……!”

집요하게 젖은 점막을 문지르는 느낌이 끔찍하리만치 자극적이었다.

짜릿하다 못해 순간순간 발끝이 꺼지는 것 같은 아찔한 추락감까지 들었다.

비앙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내밀어 질리언의 라펠을 힘껏 움켜쥐었다.

그러나 등골이 오싹하고 어깨가 절로 뾰족하게 솟는 감각은 낯설고도 너무 거대해 그렇게는 눌러지지 않았다.

달궈진 숨이 두 뺨을, 그리고 눈꼬리까지 붉게 물들이며 올라와 기어이 머리까지 녹여버릴 것 같았다.

어쩐지 왈칵 겁이 나 비앙카가 그를 밀어내듯 두 손에 힘을 주었으나, 질리언은 밀리기는커녕 끌어안은 팔에 힘을 줘 한층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는 욕심껏 비앙카를 들이켰다.

눈앞이 아찔해지도록 탐욕스럽고 온몸이 녹아내리도록 야릇했다.

더는 버티지 못한 비앙카가 녹아버린 버터처럼 흘러내리자, 질리언은 가볍게 안아 들고 다시 입술을 겹쳐왔다.

쪽.

쪽.

말캉한 살점이 뭉개지도록 한껏 힘줘 누르고서도 성에 차지 않는지 그는 기어이 이를 세워 비앙카의 아랫입술을 물었다.

질근질근, 반듯한 하얀 이에 씹힐 때마다 손끝이 따끔해질 만큼 저릿했다.

온몸으로 전기가 튀는 기분에 비앙카는 그에게 붙들린 그대로 신음했다.


“아응.”

도리질 쳐 그가 건네는 버거운 쾌감에서 벗어나 보려 했지만, 그녀의 목덜미는 커다란 손아귀에 움킨 채였다.

엄지로 가는 목선을 꾹 누르는 것만으로 목덜미에 힘이 쭉 빠지고 만다.


“달아나는 건, 안 돼.”

“지, 질리언!”

할딱할딱.

젖은 숨이 애처롭게 울렸다.


“두 번 다시.”

“흐읍.”

“약속해요.”

“으응.”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고막을 울리는 건 쿵쿵거리는 커다란 심박뿐이었지만, 비앙카는 최선을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호흡을 모조리 빨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황금빛 시선이 마치, 눈 안에 그녀를 가둬두고 싶기라도 하듯 집요하리만치 따라붙었다.

전신이 노곤하고 힘이 없어 쉬고만 싶은 와중에도 비앙카는 그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저건 뭐랄까…….

숫제 으르렁거리듯 하지만, 이상하게 질리언이 불안해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지 마.

비앙카는 축 늘어진 손을 들어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버림받은 건 나였잖아요.”

찰나에 아름답게 타오르던 그의 금안이 빛을 잃고 까맣게 죽어버렸다.


“……!”

비앙카는 그만 깜짝 놀라버렸다.

처지를 비관한 건 아니었다.

이건 사실일 뿐이었다.

아비에게 죽으라 버림받은 처지인 건, 부인할 수도 없는 사실이 아니었나?

하지만, 삽시간에 그의 표정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해졌다.

죄책감에 짓눌리다 못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에 비앙카는 자신이 그의 역린을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 뭐가 그를 이렇게 괴롭게 했을까?

뭐라도 상관없었다.

비앙카는 후회했다.

불안해하는 그에게 곱게, 떠나지 않을 거라고 말했어야 했는데.

난, 당신이 좋아서 이곳에서 계속 머물고 싶다고 속삭였어야 했는데.

오히려 불안한 건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신이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았어야 했는데.

안심하라고, 갈 곳이 없는 처지임을 알려주려던 것이 오히려 그의 속을 헤집고 만 모양이었다.


“질리언, 내가 하려던 말은…….”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조금 전까지 탐욕스럽게 비앙카를 몰아세우던 남자는 순식간에 얼굴이 파리하게 질려 고개를 떨구었다.


“아냐, 질리언. 아니에요. 내가 잘못했어요.”

“비앙카. 그대가 잘못한 게 뭐가 있겠어요. 죄는 발로크의 몫인걸요.”

비앙카는 눈을 홉떴다.


‘죄사함을 다한 발로크를 테르미나가 자유롭게 하리라’

머릿속을 스치는 예언 구절에, 비앙카는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도 잊고 순간 물을 뻔했다.

너의 죄가 무엇이냐고.

네 무릎을 꿇린 그 죄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아슬아슬했다.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그러나 비앙카는 치미는 것을 꾹 삼키며 푸르게 질린 그의 뺨을 감싸 쥘 수 있었다.

강렬한 충동은 순간이었고 푸르게 질린 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이었다.

비앙카는 질리언에게 시선을 맞대고 속삭였다.


“불안해하지 말라고 한 말이었어요. 사실이잖아요.”

“…….”

“여기는 내 집이잖아요.”

“…….”

“아니에요?”

“…….”

“아니야?”

“아니긴. 그대는 이 발로크의 주인인걸요. 나의 여왕님.”

억지처럼 졸라 내 들은 답이었다.

하지만, 비앙카는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결국 나의 여왕을 입에 올리던 남자는 웃었으니까.

평소처럼.

아니, 평소보다 훨씬 아득하리만치 아름답게.

해를 두른 그는 정말이지 전신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넋 놓고 바라보던 비앙카는 한참 만에야 깨달았다.


“햇빛이라고?”

얼마만에 보는 해인지 기억나지도 않았다.

끝도 없이 퍼부어대던 눈보라가 그쳤다.


 
눈이 그쳤다.

질리언 발로크가 말한 그대로였다.

크레타는 쏟아지는 햇살을 가득 받으며, 일꾼들을 독려했다.


“거기! 수레를 워프진에 바짝 대서 곧장 자재를 싣도록 해! 들어 옮기지 말란 말이야. 최대한 체력을 아껴라! 다음 웨이브 전까지 보수와 보강작업을 끝내야 하니 할 일이 많다!”

“예, 크레타님!”

“워프진에서 곧장 짐을 싣고 7성채까지 이동해. 시간이 별로 없으니 다들 지체 말고 서둘러!”

몰아치는 일이 '헉' 하는 소리가 날 만큼 많았지만, 그 누구도 불평하지 않았다.

웨이브는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7성채가 터졌다는 말은 삽시간에 퍼졌다.

성채가 터지자마자 마물이 발로크 령을 헤집었다.

누구도 사람들을 닦달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소중한 이를 잃으며 뼛속 깊이 체감했다.


“참 별일이지.”

까마득히 늘어진 수레 줄 가운데 있던 남자 하나가 중얼거렸다.


“뭐가 별일이야?”

“아니, 이번 일 말이야. 제국이 생긴 이래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던 성채가 아니었나. 그런데 이렇게 덜컥 무너졌다니…….”

“거의 건국과 역사를 함께 하는 성채가 아닌가. 오래되어서 그런가 보지. 올해는 웨이브가 끝나고 아예 대대적으로 성채를 보수한다는 이야기도 있다던데?”

“뭐 그거야 그렇지만, 난 그런 생각이 들어.”

시시한 잡담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야기가 길어지자 주변의 시선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별것 아닌 소리였지만, 주목받으니 역시 좀 으쓱한 기분이 든다.

남자는 뒷머리를 괜히 긁적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시기가 좀 공교롭다고 말이야.”

“공교롭다는 게 무슨 의미인데?”

누군가의 질문에 남자는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 대답했다.


“테르미나 황녀님이 오시자마자 터진 거잖아.”

“허?”

어디선가 기묘한 탄성이 터지며 분위기가 미묘하게 굳었다.

다들 얼굴이 굳어 당황한 기색이 여력 했다.

몰랐는데, 생각해보니 시기가 너무 절묘하다.


“그럼, 이게…….”

누군가 남자만큼이나 훌쩍 낮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을 때였다.

뒤 수레에서 신경질적인 타박이 울렸다.


“보자 보자 하니 별소릴 다 듣겠네. 테르미나가 와서 나쁠 일이 뭐가 있어? 예언에 따르면 좋은 일만 생겨도 부족하겠더구먼.”

“아 아니, 누가 뭐랬나 그냥 그렇다구.”

“뭐가 그렇다는 거야? 너 괜히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큰일 나려고.”

“내가 하긴 뭘 해. 방금 생각나서, 그냥 우리끼리니까 해본 소리지 뭐.”

“아무튼 하지 마. 이제 입에도 올리지 말고 머릿속에서도 싹 지워.”

질색하는 말투에 맨 처음 말을 꺼낸 남자 역시 머쓱한 표정으로 고삐를 감아쥐었다.

해는 아직 한창이었고, 워프진에서는 쉴새 없이 자재가 나오고 있었다.

* * *

발이 묶인 집사가 도착한 건 네 번째 자재 꾸러미가 도착할 때였다.

이미 수레 수십 대가 움직이고 남은 건, 잔짐이라 한산해진 때이기도 했다.

크레타는 워프진 위에 서 있는 말쑥한 인상의 남자를 보고 허리를 살짝 굽혀 인사를 건넸다.


“크레타 바르한입니다. 공작님의 보좌관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알렉 히트로이센입니다. 도착 날짜를 넘겨 오게 되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북부의 폭설은 모두가 익히 아는 바이지요. 이렇게라도 오시게 되어 정말 다행입니다.”

사실, 4월에나 오시겠거니 하고 있었거든요.

빙긋 웃으며 속삭인 건 크레타의 ‘농담’이었다.

온통 낯설고 차갑기만 한 이 발로크 령의 집사가 될 이를 위한 작은 배려.

알렉이라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크레타의 농담에 고개를 끄덕였다.


“봄에 오게 되었으면, 마님을 위한 꽃다발을 준비해왔을 텐데 빈손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그건 저도 좀 아쉽습니다.”

반듯하다 못해 온몸에 걸친 모든 것이 각 잡혀 있는 느낌의 남자였다.

그런데, 또 선선히 웃으며 하는 말을 듣자니 아예 앞뒤 없이 꽉 막힌 건 아닌 모양이었다.

크레타는 알렉을 훑던 시선을 티 없이 갈무리하고는 사람 좋게 한 번 더 웃어 보였다.


“마님은 꽃도 좋아하시지만, 상냥한 사람을 더 좋아하시니 괜찮으실 겁니다.”

“아, 상냥한 사람을 좋아하시는군요?”

“상냥한 사람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요.”

실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크레타는 알렉을 성안으로 한발 앞서 안내했다.

사박.

그의 한걸음에,

사박.

일렉의 걸음이 뒤따랐다.

문득 크레타는 뒤를 돌아 자신을 따라오는 젊은 집사를 바라보았다.

눈을 치웠다고는 하나 오래도록 내린 눈은 한겨울 추위에 꽝꽝 얼어버린 지 오래였다.

자신은 공작의 부관이며, 동시에 기사였다.

빙판 위를 걷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외부 인사이며 집사가 될 알렉의 걸음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안정적이다.


“길이 미끄럽습니다. 조심하세요.”

크레타가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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