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44. 황금의 주인과 짐승 (44/47)


044. 황금의 주인과 짐승
2023.06.02.


기묘한 위화감이었다.

발로크 령의 집사가 된 알렉은 히트로이센 출신이었다.

히트로이센가는 대대로 발로크의 가신으로 살며 발로크를 섬기는 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집사를 들여야 한다면 무조건 히트로이센이었다.

사일러스 발로크가 유별났지, 그 전만 하더라도 모든 공작이 히트로이센에게 발로크의 관리를 맡겼다.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크레타의 말에 알렉이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손끝으로 눌러 다듬으며 웃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이를 내보이지 않고 눈꼬리와 입술을 조금 움직여 은은한 듯 지어 보이는 미소는, 아주 훌륭했다.

자신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면서도 상대에게 또렷한 인상은 남기지 않는다.

그야말로 집사다운 표정이랄까.

뒷머리가 당기는 이 기분 나쁜 감각만 아니면 과연 히트로이센이라고 감탄할만한 순간이었다.


“히트로이센 자작께선 작고하셨던가요?”

“건재하십니다. 다만, 연세가 있으셔서 공작님을 오래 모시지 못할 터라 제가 오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집사의 교체는 주인에게 누가 되는 일이니까요.”

“그러시군요.”

크레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을 본성 3층으로 안내했다.

‘아직도 공작님께서는 3층에 머무시나 봅니다.’라는 알렉의 말에 크레타는 이번에도 웃어주었다.

* * *

질리언은 알렉을 보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케트릭 히트로이센을 많이 닮았군.”

“조부를 아십니까?”

“오래전에 보았어.”

자주는 아니었지만, 알렉 역시도 자신을 만나러 와주었던 케트릭의 옛 기억이 생생하다.

알렉은 질리언의 말에 반가운 기색으로 허리를 숙였다.


“다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업무에 관한 이야기는 내 부관, 크레타와 이야기하도록 하고 가급적 빨리 적응해주길 바라.”

“물론입니다. 공작님.”

짤막한 이야기를 끝으로 발로크에 집사가 생겼다.

이제 발로크에 부족한 인원은 없다.

하다못해 정원사까지 부족하다고 말한 인원은 전부 고용했고, 폭설로 들어오지 못했던 이들도 오늘로 모두 입성했다.

* * *



“집사님이 생겼대요!”

어지간히 기쁜 듯 소식을 전하는 줄리의 두 뺨이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렇게 기뻐?”

“그럼요, 크레타님은 잔소리가 보통이 아니라고요. 듣고 있으면 머리가 울리는 거 같아요. 줄리, 제대로 들지 못하겠나. 줄리 발을 그렇게 떼선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줄리, 줄리 줄리. 어휴. 멀미 나네.”

아.

비앙카는 짧게 웃었다.

이 어린 시녀의 잔소리가 어째서 이렇게 차진가 했더니, 크레타에게 보고 들은 모양이다.

흠흠 하는 잔기침 소리로 웃음 누른 비앙카는 흥분한 줄리를 다독여 성내 소식을 마저 들을 수 있었다.

가령, 공작님의 행방이라던가.

질리언이 집무실을 비운 이유 같은 것 말이다.

상당히 달큼한 분위기였는데, 눈이 그쳤다는 것을 말하기 바쁘게 크레타가 들이닥쳤다.


‘공작님! 눈이 그쳤습니다. 자재를 들여오기 전 잠깐 확인 부탁드립니다.’

어찌나 다급하던지 뭐라 입을 뗄 수 없었다.

그건 질리언도 마찬가지였다.

할 말 많은 표정도 잠깐, 그는 옅은 한숨과 함께 재촉하는 크레타를 따라 나갔다.

그렇게 나간 지가 벌써 세 시간째였다.

짧은 해는 벌써 기울고 있었다.

자재 확인이라기에 금방 와주겠거니, 못다 한 이야기를 곧 나눌 수 있겠거니 하고 기다리던 비앙카는 살짝 당황스러웠다.

그런데 줄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질리언이 못 오는 게 당연했다.


“워프진을 가동할 수 있게 된 거구나.”

눈이 쌓이지 않는 사이, 얼른 워프진을 사용 중이란다.

부서진 성채를 보수할 자재와 보강재가 속속들이 들어오고 있고 눈에 발이 묶였던 고용인들도 속속들이 귀성 중이라고 하니 자연히 질리언이 바쁠 수밖에.

청혼에 대한 답을 해주고 싶다.

내내 기다렸다.

하지만, 비앙카는 안달 나는 마음을 가만히 삭였다.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지금은 그를 기다려주어야 할 때였다.


“오자마자 이렇게 일이 많아서야……. 공작님께서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닌지 몰라.”

“안 그래도 아까 뵈니 안색이 안 좋으시더라고요.”

“새벽에 오셨다더구나.”

“힘들긴 하시겠어요. 이번 웨이브도 평소보다 꽤 애먹인 모양이던데.”

“식사는 하셨니?”

“모르겠어요. 아마 못 하셨을걸요? 세 번째 워프진까지 확인해주시고 집무실에 가셨는데, 네 번째 워프에서 집사님이 오셨거든요.”

맞다.

새로 온 집사의 인사를 받고 있댔지.

정말 물 한 모금 마실 시간 없이 바빴겠구나.

시간 맞춰 식사하고, 차도 마시며 그를 기다렸던 자신과 달리.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은 비앙카는 살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줄리 주방에 가서 가장 단 쿠키를 좀 받아오겠니? 아무래도 공작님께 가봐야 할 것 같아.”

“찻잎도 받아올까요?”

“찻잎을?”

“공작님께서 뭘 드신다는 이야기를 못 들어 본 것 같아요.”

당연히 집무실에 차도 없을 거고요.

비앙카는 줄리의 말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이곳에 와서 비앙카를 가장 살뜰히 살핀 건 다름 아닌 질리언이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전혀 돌보지 않는다고?

이건 바쁘다는 핑계로 넘길 게 아니었다.

집무실에 찻잎도 없는 공작이라니.


“다구도 챙기렴.”

“네 마님.”

비앙카의 말에 줄리가 신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차가 다 식었네요.”

생각에 잠겨 있던 이자르는 때아닌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났다.


“어머니, 어쩐 일이세요?”

파세트라가 그의 집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그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설령 밖에서 고하는 소리를 듣지 못했어도, 살바르가 그에게 알려주었을 텐데.


“부관은 잠깐 심부름을 보냈답니다.”

역시.

이자르는 티 없이 입매를 비틀었다.


“단둘이 이야기를 좀 나누었으면 해서요.”

“물론입니다. 말씀 주셨더라면 제가 찾아뵀을 텐데요.”

“누가 감히 카르탄의 주인을 오라 가라 하겠어요.”

생긋 웃은 파세트라가 덧붙였다.


“마음은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이 어미가 찾아오는 편이 보기에도 좋겠지요.”

완벽한 섭정왕.

이자르는 접견 한 번도 치밀하게 계산하던 파세트라를 기억하고 있었다.

오늘 걸음 한 것도 아무 의미가 없진 않을 터다.

지겨워라.


“무슨 일 있으십니까?”

“일은요 무슨. 아무 일도 없기에 찾아뵌 참인걸요.”

“…….”

아하.

비앙카 테르미나를 재촉하러 오셨군.

파세트라 카르한은 성질이 급하고 독한 구석이 있었다.

어여쁜 얼굴과 나긋한 말씨, 늘 웃고 있는 저 얼굴에 가려졌을 뿐.

그녀의 본성은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아직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답니다.”

“벌써 한 달인걸요. 이미 황녀는 발로크령에 있어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불리해지는 건 이쪽이에요.”

“일에는 절차가 있는 법이지요.”

“세상은 곧이곧대로 살아서 되는 건 없답니다. 가끔은 남들이 가지 않는 길로 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에요.”

“그 길에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알아주세요. 어머니.”

“이 일에 시간을 들일 필요가 있습니까?”

사근사근하던 말투가 증발이라도 한 듯 싹 사라졌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무릎에 두 손을 포개 얹은 파세트라는 나이가 들어서도 범접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고귀함이 있었다.

그것은 무릇 ‘선왕후’라는 이름 때문만은 아니었다.

저건, 권력을 부려본 자의 잔혹함에서 나오는 오만이 뿜어내는 것이었다.

지금 파세트라는 ‘섭정왕’으로 카르한을, 대초원을 호령하던 주인의 눈을 하고 있었다.

딱, 그 눈으로 지금 카르한의 주인을 다그치는 것이다.

울컥.

눌러둔 뜨끈한 것이 역류하듯 치솟는다.


‘죽여버릴까?’

이자르는 누군가가 속살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직도 자신이 이 카르한의 주인인 줄 아는 저 건방진 것을 왕의 이름으로 처단하는 건 어때?’

‘이건 내 왕좌야. 내 것. 나를 위한 내 자리. 그런데 감히 누가 이 고귀한 자리에 앉은 나에게 명령할 수 있지?’

머릿속이 꽝꽝 울리도록 떠들어 대는 목소리는 짓이겨진 왕의 자존심이었는지도 모른다.


“대답해보세요. 이것이 시간을 끌만 한 일입니까?”

엄혹하게 깔리는 파세트라의 목소리가 점점 더 그를 참기 힘들게 만들었다.


“고작 여자 하나예요. 그걸 데려오는데 한 달이나 시간이 필요한가요?”

‘감히 나를 훈계해?’

‘섭정왕의 시대는 끝났어.’

파세트라의 목소리와 머릿속을 울리는 음성이 한데 엉켜 이자르는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

이러다가는 정말, 오늘 일이 벌어져도 단단히 벌어질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자르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만하세요.”

“그만하라니요? 잘하시라고 드리는 말씀 아닙니까?”

파세트라는 잊고 있나?

지금 그녀의 말은 왕에게 하기엔 ‘주제넘었다’는 것을?

욍욍 울어대는 머리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다.


“그럼, 뭐 전쟁이라도 일으켜 약탈혼이라도 하라는 말씀이십니까!”

“정신 차리세요!”

“정신은 어머니께서 차리십시오! 전쟁을 할 게 아니라면, 설득을 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려면 발로크에 사람을 심어야 하는데…….”

“왜 사람을 심습니까?”

“어머니!”

“왜, 사람을 심느라 시간을 낭비하시는지 묻고 있지 않아요!”

“그게 어떻게 하란 말씀이십니까!”

“어째서 설득이 필요하냐 묻는 겁니다.”

순식간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파세트라는 붉게 칠한 입술을 심술 맞게 비틀었다.


“데려오시라니까요. 데려오시라고요. 신붓값은 일 년 전에 치렀고, 아직 금을 돌려받지 못했으니 황녀는 카르한의 몫이에요.”

“발로크에…….”

“테르미나의 짐승은 테르미나가 알아서 할 일이죠. 말을 잘 듣는 개를 이유도 없이 죽였으니, 주인을 물어뜯어도 도리가 없지 않겠어요?”

말을 하다 말고 갑자기 파세트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큰 한숨이었다.


“정말, 예나 지금이나 마음이 이렇게나 올곧고 보드랍기만 해선……. 내가 그래서 십 년을 버텨가며 청소를 해주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아예 신부도 데려다 놓을 걸 싶습니다.”

내내 ‘왕’에게 경어를 바치던 섭정왕의 말투가 아니었다.

파세트라는 지금 온전히 이자르의 어머니로 말하고 있었다.


“절차니, 방식이니 하는 것에 발목 잡히지 마세요. 황녀는 카르한의 것이니, 가서 데려오세요.”

“사람을 잠입시키는 것도 아니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면 대체 뭡니까?”

“일단 모셔오세요.”

태연하게 납치를 입에 올린 파세트라가 경악하는 이자르를 향해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나의 왕. 황녀도 부리던 짐승보다는 황금의 주인이 더 끌리지 않겠어요?”

 

 


“비앙카?”

의자에 기대있던 질리언은 집무실에 들어서는 비앙카를 보고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집무실을 찾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니, 그를 먼저 찾아온 것이 처음이었다.

반갑고, 또 설레 질리언은 평소와 달리 매끄럽게 말을 하기 힘들었다.


“차, 한잔할까 해서 왔어요.”

‘우리 아직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았잖아요.’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입술만 달싹여 건네는 말에 질리언의 시선이 못 박힌 듯 매였다.

맞물렸다 떨어지는 비앙카의 붉은 입술에서 도저히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거, 좀 위험한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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