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5. 한밤 공작성을 찾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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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5. 한밤 공작성을 찾은 여자
2023.06.05.
해야 할 이야기.
“그렇네요.”
질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해야 할 이야기가 있었다.
입맞춤 한 번에 정신이 꿀에 절인 듯 녹작지근했는데 순간 바짝 여며진다.
줄리가 차를 준비하고, 티푸드를 놓는 동안 그의 시선은 비앙카에게 매인 채 떨어지지 않았다.
긴 다리를 꼬아 등받이에 기댄 질리언은 몹시 느긋한 모습이었으나, 시종일관 비앙카에게 붙어 떨어지지 않는 금안엔 여유라곤 없었다.
금방에라도 달려들어 물어 채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 시선이 따갑다.
그 시선을 받고 있자니, 어쩐지 뺨이 달아오르는 기분이라 비앙카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윽고, 줄 리가 자리를 비우고 집무실엔 단둘이 남겨졌다.
“향이 좋네요.”
점잖은 말에 비앙카가 내리깐 시선을 들어 올렸다.
맞은 편의 남자는 잔뜩 허기진 시선을 하고서도 웃고 있었다.
차 받침을 들고서 우아하게 향을 음미하는 모습에, 비앙카는 소리 없이 실소했다.
아낌없이 모든 숨을 약탈하던 것을 겪어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것이다.
부드럽게 일렁이는 저 황금안이 어떤 의미인지.
저건…….
따사로운 햇살이 아니었다.
잘잘 끓는 태양이었다.
집어삼킬 듯, 완벽히 압도당하던 순간 생생히 맛보지 않았겠나.
겁이 날 만큼 쏟아지던 오롯한 감정이라니!
“……요?”
“네?”
비앙카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분명 진득하게 시선이 얽히지 않았었나?
그런데 잠깐 사이 질리언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담백한 얼굴이다.
조금은 피곤해 보이는 푸르게 질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꿈이라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괜찮으세요?”
나?
“몇 번이나 불렀는데 못 들으시는 것 같아서요.”
‘내 말 들려? 괜찮아?’
질리언의 목소리가 둘로 나뉘고 있었다.
비앙카는 얼굴이 핼쑥해졌다.
시작이었다.
항상, 방심하고 있으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환청이 울렸다.
꼭 이럴 때마다!
‘하지 마!’
비앙카는 볼살을 사정없이 씹었다.
말캉한 속살이 어금니에 물려 단번에 짓이겨지고, 머리끝이 쭈뼛할 만큼 고통이 일자 몽롱하게 풀리던 정신이 단번에 돌아왔다.
몰랐는데 이미 집무실을 들어서던 순간부터 시작되었던 모양이었다.
그의 금안도, 하얀 얼굴도 이제 보니 달라 보인다.
미소 짓는 남자의 얼굴은 푸르게 질려 있었다.
새벽에 보았을 때보다.
아침에 보았을 때보다.
훨씬 더 생기가 옅어졌다.
“질리언?”
어쩐지 등허리가 선득한 느낌에 비앙카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불렀다.
“네.”
그는 눈앞에 있는데 이상하게 아스라했다.
금방이라도 멀리 떠나버려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확신처럼 든다.
‘이번엔 놓치지 않아.’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원해준 이.
비앙카는 눈앞에 두고도 멀게 느껴지는 질리언의 모습에 문득 조바심이 났다.
“결혼해줘요.”
콜록.
채근하듯 튀어 나간 목소리에 질리언에 놀라 기침을 터트렸다.
뒤늦게 아차 했다.
이렇게 할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그러나 후회는 없었다.
“마음이 바뀌지 않았다면, 해줘요. 결혼.”
“맙소사.”
당당하다 못해 흡사 추궁하는 것 같은 말투에 질리언이 신음했다.
그러나 비앙카는 어서 답을 듣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질리언. 어서.”
“비앙카. 청혼은 제가 하지 않았던가요?”
“맞아요. 하지만 꼭 답이 듣고 싶어졌어요.”
담담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말끝에 목소리가 떨렸다.
초조한 속내가 들킨 것 같아 비앙카는 문득 뺨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청혼을 받았고,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받아들이겠다며 원한다고 말해주었던 남자였다.
목줄 매인 발로크.
배덕한 테르미나.
그들의 사이는 변한 것이 없었다.
그랬기에 비앙카는 설령 이 관계가 거짓이라도, 발로크의 덫이라고 할지언정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다짐했다.
거짓으로라도 이토록 다정한 한 때를 선물 받았으니 대가는 충분했다고 믿었다.
그에게 온전히 마음을 내주어도, 버림받아도 괜찮았다.
단번에 이 온기가 거둬진다고 하더라도 견딜 수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이건 견디기 힘들었다.
질리언이 사라지는 것만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초조함에 온몸이 와들와들 떨렸다.
“비앙카.”
맞은 편에서 그가 부르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금 입을 열면 이가 딱딱 부딪히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영리한 남자는 대번에 눈치채고도 남을 거다.
자신이 무슨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건지.
그때였다.
질리언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더니 그대로 한 무릎을 꿇었다.
순식간에 시선이 맞닿았다.
“나의 부인이 되어주세요.”
“…….”
“평생을 그대 곁에 머물게 허락해주세요.”
“…….”
“부디.”
초조해하는 자신을 달래기 위한 장난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질리언은 진지했다.
맞닿은 시선이 어딘지 아득했지만, 분명 그의 금안에 담긴 것은 비앙카 자신이었다.
비앙카는 술렁이는 마음을 다잡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혼, 받아들일게요.”
순간 막혔던 숨이 트이며 온몸에 뜨거운 피가 돌기 시작했다.
차게 식었던 손끝도 다시 제 온도를 되찾고, 파리하게 질린 입술에도 색이 돌아왔다.
아찔한 감각에 눈을 감고 길게 숨을 들이켜는데 문득 어깨가 감싸이더니 끌려갔다.
“비앙카.”
몸을 일으킨 질리언이 비앙카를 품에 보듬은 채 속삭였다.
“비앙카.”
그의 가슴에 닿은 뺨으로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가 무척 크게 울렸다.
“허락해줘서 고마워요.”
‘허락해줘서 고마워요.’
순간 또 한 번 그의 목소리가 두 개로 갈라졌지만, 비앙카는 웃을 수 있었다.
애통해하는 환청과 달리, 지금 그의 목소리에 밴 것은 짙은 기쁨이었으니까.
비앙카는 그의 가슴에 머리를 꼭 붙였다.
단단하게 감싸 안아주는 그의 품 안에 있으려니 이제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거대한 충만감이 들었다.
“혹시 이것들도 진화하나?”
마지막 마물을 베어낸 5성채 대장인 킬리언이 젖은 도끼를 뽑아내며 고개를 갸웃했다.
“진화라니?”
“재생 속도가 더 빨라진 것 같아서.”
그와 함께 움직였던 3성채의 대장이 더러운 소리라도 들은 듯 미간을 콱 찌푸렸다.
“이것들은 원래 빨랐잖아.”
“아니야, 이번엔 달라.”
“안 그래도 끔찍한데 진화를 하면 어쩌자는 거야?”
“난들 아나.”
뒷정리라고는 하나 그래도 각 성채의 대장들이 휘하 기사를 데리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엄연한 전투였다.
올해는 질리언의 채찍질 덕에 남은 마물 수가 적어 작년보다 수월해야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말끔히 정리하는 데 걸린 시간이 예년만큼, 혹은 그 이상이 걸렸다.
“그럼 어떻게 해?”
3성채 대장의 질문에 킬리언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떻게 하긴, 그냥 버티는 거지 뭐. 달리 방법 있어?”
덤덤하다 못해 다소 성의 없이 느껴지는 말투에 3성채 대장인 레이먼의 얼굴이 험하게 구겨졌다.
“지금도 간신히 버티는데, 진화했다며. 그런데 버티긴 무슨 수로 버텨?”
“그럼, 죽는 거고.”
이 자식이.
애가 타서 하는 소리에 무신경하게 대답하는 킬리언의 말에 드디어 레이먼이 폭발했다.
“어차피 죽을 거 오늘 내 손에 죽어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이먼이 장창을 휘둘렀다.
성질을 있는 대로 부리며 갈긴 창은 킬리언이 방패처럼 든 도끼날에 막혀버렸다.
분위기는 험악했는데 아무도 둘을 걱정하지 않았다.
이 둘이 대장이 된 후 매일같이 있는 일이었기에, 오히려 한때의 여흥처럼 응원하는 기사들도 있을 정도였다.
얼마나 엎치락뒤치락했을까.
지칠 대로 지친 레이먼이 푸른 피로 흠뻑 젖은 자신의 투구를 벗어들고는 눈밭에 그대로 풀썩 주저앉았다.
“아, 짜증 나!”
“짜증 부린다고 없어질 것들이 아닌데 뭐하러 힘을 빼.”
“이제 좀 할만하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실력이 늘었던 거겠지.”
“죽기 살기로 늘렸지.”
“그럼 더 늘려. 그럼 되겠네.”
옆자리에 주저앉은 킬리언은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놀리는 것 같지만, 저건 원래 킬리언의 말투였다.
알고 들어도 얄밉다.
하지만 딱히 또 틀린 말은 아니다.
“넌 그냥 입을 다물어.”
픽, 짜증 부리듯 쏘아붙인 레이먼이 아까부터 물끄러미 서 있는 엘리자베스를 불렀다.
“어이, 거기. 이거 보고해야 하는 거지?”
“거기가 아니라 엘리자베스, 혹은 6성채 대장이라고 불러주십시오.”
“아무튼. 보고해야 하는 거 맞지?”
“보고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공작님께서는 이 차이를 모르실 테니까요.”
역시 이쪽도 거침없는 말투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들어 기분이 나쁘다는 의미다.
마물이 진화했다고 화를 내던 레이먼만 이상해지는 꼴이었다.
“관둬라. 이제 화내는 것도 지친다.”
어깨가 들썩이도록 요란하게 한숨을 쉰 레이먼이 끙 소리를 내며 아예 누워버렸다.
“더럽다. 일어나라.”
“못 일어나. 힘들어. 나, 힘들다고. 어이, 거기. 보고는 서 있을 만큼 기운이 남은 쪽이 가는 거로 하면 어때? 나 진짜로 기운이 없어.”
“약아빠진 놈이군.”
“약해빠진 놈이라고 해줘.”
킬리언이 통박을 놓아도 레이먼은 꿋꿋하게 버텼다.
“그러겠습니다. 어차피, 6성채도 성벽 개조가 있을 예정이라 보고하러 가야 하니까요.”
레이먼은 엘리자베스의 말에 ‘거봐’라고 눈을 부라리며 킬리언을 흘겼다.
눈이 멎은 하늘은 그들의 땅만큼이나 새파랬다.
사방이 비리고 역한 내음으로 가득했다.
그날 밤.
본성은 6성채 대장인 엘리자베스의 스완의 방문에 떠들썩해졌다.
“7성채가 아니라 6성채 대장이 온다고?”
“보고 할 게 있다나 봐.”
“아니 그래도 여기가 어디라고 와?”
“왜?”
“왜긴 왜야. 몰라서 물어?”
“6성채 대장은 여기 오면 안 돼?”
전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껌뻑이는 시종을 향해, 혀를 찬 다른 이가 몸을 바짝 붙이며 속삭였다.
“스완 몰라? 그 왜, 한참 차기 공작부인으로 거론되었는데.”
“그런데 여길 온다고?”
“그러니 다들 몰려든 거 아니냐.”
“구…….”
“쉿!”
투덕거리던 시종들을 제치고 앞에 나선 풋맨이 손가락을 입술 앞에 세웠다.
“온다.”
“뭐가?”
크게 힘주지 않은 것 같은데 어찌나 아픈지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시종은 얻어맞은 옆구리를 쓸며 인상을 찌푸렸다.
“너 괜히 그러는 거지!”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입 다물어.”
서늘한 말투에, 옆구리를 문지르던 시종이 찔끔해 열린 문 앞을 살폈다.
사방이 새카매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무언가 어른거렸다.
그건 잠깐 사이 더욱 선명해지고, 더욱 커졌으며 또 한 번 눈을 깜빡이는 사이 또렷이 한 무리를 그려냈다.
“저, 저건!”
“6성채 대장이다!”
“진짜로 왔잖아?”
사람들의 시선이 엘리자베스에게 닿았다 본성을 향했다.
3층, 공작부인이 있는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