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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6. 달라진 발로크 (46/47)


046. 달라진 발로크
2023.06.09.



“어서 오십시오. 엘리자베스님.”

흠뻑 젖은 부츠를 탕, 소리 나게 굴러 눈을 털던 엘리자베스는 생각지 못한 정중한 인사에 하던 걸 멈추었다.

고개를 들자, 그녀의 앞에는 언제 온 건지도 모르게 와서 선 젊은 남자가 보였다.

옷차림이 말쑥하고 생김이 깔끔했다.

한밤인데도 불구하고 빗어 넘긴 머리칼은 한 올도 흐트러짐 없이 반듯했고 옷은 제대로 성장한 채였다.

기사의 차림은 아닐뿐더러,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누구지?”

“안녕하십니까. 저는 발로크 본성의 집사 알렉이라고 합니다. 눈보라에 발이 묶여 오늘에서야 입성했답니다.”

사근사근한 말투가 꽤 듣기 좋았다.

호들갑스럽지 않게 사람을 반기는 느낌을 주는 것이 고급스러웠지만, 도리어 엘리자베스는 눈을 가늘게 늘여 그를 훑었다.

집사라 하지만 그는 꽤 젊고 준수했으며, 더더군다나…….

실력이 보통이 아니다.

엘리자베스는 그가 말을 걸기 전까지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절로 머리끝이 쭈뼛 서며 본능적으로 경계가 돋는다.

발로크의 모든 남자는 기사다.

하지만, 자신은 평범한 기사가 아니라 대장이었다.

일반 기사와는 월등히 차이가 나는 실력자.

그녀가 느끼지 못하는 기척은 각 성채의 대장과 공작이 유일했다.

그런데, 고작 집사가 그녀의 오감을 속이고 다가올 만큼 뛰어나다고?

믿기지 않아 한참을 바라보았지만, 집사는 자신을 살피는 시선을 알면서도 피하거나 움츠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속 시원하게 보라는 듯 덤덤히 기다리는 태도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엘리자베스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고요한 대치가 얼마나 이어졌을까, 엘리자베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깜빡했다.

여기는 일반 영지가 아니라 ‘발로크’의 땅이라는 것을

하긴, 공작님의 집사니 이 정도는 당연한 건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가 눈에서 힘을 빼자 곧장 집사가 다가와 물었다.


“오신다는 전갈을 받고 손님방을 준비해두었습니다, 모셔도 되겠습니까?”

“그전에, 공작님을 먼저 뵙고 싶은데 청을 넣어주겠나?”

엘리자베스는 몸을 털어내느라 지저분해진 수건을 풋맨에게 돌려주며 경 갑옷을 가볍게 추슬렀다.


“가능하다면 지금…….”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뻣뻣한 거절에도 엘리자베스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이건 옳은 반응이다.

하지만 집사는 모르고 있다.

여기는 발로크, 일반 영지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시간이 늦은 건 알고 있다. 하지만, 웨이브 건이라고 말씀드리면 꾸지람듣지 않을 걸세.”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새로 온 집사에게 드물게 길게 설명해주었다.

그런데 집사가 영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1차 웨이브는 마무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말을 전해주게.”

“그건 곤란하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이것 봐라?

엘리자베스는 미간을 슬쩍 구기며 불쾌한 기색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런데도 눈앞의 선 미끈한 집사는 겁을 집어먹거나 수그러드는 낌새는커녕, 오히려 그녀를 마치 떼쓰는 어린아이처럼 달랬다.


“당장 웨이브가 터진 게 아니라면, 내일 만나시지요.”

“집사!”

“네, 6성채의 대장 엘리자베스 스완 경. 말씀하십시오.”

“지금 그대가 나를 가로막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6성채의 대장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공작님의 휴식 시간을 지켜드리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하?

혀가 얼마나 매끄러운지, 엘리자베스는 드물게 말문이 막혔다.

듣기에 공손했으나 집사는 시종일관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접견 금지’

감히 일개 집사장이 6성채의 대장을, 공작과 만나지 못하게 말이다.


“네가 웨이브 보고를 막는 것이냐! 당장 접견 신청을 넣어!”

엘리자베스가 검집에 손을 올리자, 사방에서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터졌다.

그 순간이었다.

내내 빙긋 웃는 얼굴이던 집사가 순식간에 표정을 싹 지웠다.


“네가, 라는 말은 사양합니다. 저는 이 성의 관리와 손님 접객을 일임받은 발로크의 집사입니다. 경, 공작 내외께선 잠자리에 드셨으니 이만 손님방에 드시겠습니까? 이 이상 소란을 피우시면 본성에서의 접객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저는 피곤하실 공작님의 휴식을 방해하고 싶지 않습니다.

허?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엘리자베스는 푸르르 떨었다.

집사는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6성채의 대장인 저를 내쫓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절로 기가 차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보다 엘리자베스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공작 내외’라는 표현이었다.


“……주무신다고?”

“그렇게 말씀드린 적 없습니다. 두 분께서 휴식을 취하시는 중입니다.”

“곤란한 사정은 알겠지만…….”

“공작님께서 6성채 대장님의 접객을 제게 일임하셨습니다.”

내내, 공작과의 대면을 요구하던 엘리자베스의 입이 꾹 다물렸다.

대장의 접견은 언제 어느 때고 받아들여졌다.

예외란 없었다.

그런데, 그 접견을 막은 것이 공작이라는 말에 엘리자베스는 충격이 심했다.

고작 부인과 잠자리에 들려고?

난전 한가운데서도 그녀를 침착하게 해주었던 평정심이 쩍 소리 내며 갈라져 버렸다.

가슴에서 뭔가 끓어 엘리자베스는 입을 열 수 없었다.

그것을 뭐라 생각한 건지 가로막듯 앞에 버티고 섰던 집사가 한 팔을 내밀어 안내하듯 안을 가리켰다.


“2층으로 모시겠습니다.”

내쫓길 게 아니라면 따라가야 했다.

엘리자베스는 삐걱거리는 걸음으로 그를 따랐다.

순간 발이 푹 잠기는 푹신함에 엘리자베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게……?”

“자이언트 레빗의 가죽입니다.”

그걸 몰라 묻는 게 아니었다.

빤히 응시하자, 집사가 속내를 읽기라도 한 듯 설명을 이었다.


“본성 추위가 보통이 아니어서 공작님께서 지시하셨답니다.”

끔찍하게 추웠던 겨울이 한두 번이었나.

그러나 숱하게 드나들면서도 이런 모습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 이렇게 갑자기?


“…….”

불현듯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들려 계단참 위 어딘가를 향했다.

발끝을 휘감는 느낌이 꼭 늪에 빠지기라도 하는 듯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2층의 계단의 끝에서 조용히 앞서가던 집사가 입을 열었다.


“사사롭게 말씀드리자면, 오늘 영지에 일이 있었답니다.”

“무슨.”

그가 안내하는 대로 걸음을 옮기지만 발이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멍하다.


“영지민이 마물에 먹혔습니다.”

“뭐? 어떻게!”

“저수지에 눈을 나르던 영지민 몇이 당했다고 합니다. 짐작기에 7성채가 무너지며 타 넘어온 녀석들인 것 같다고 합니다.”

“그런…….”

“그 일을 마무리하신 참이니, 부디 오늘 밤은 피로하실 공작님의 상태를 헤아려주십시오.”

간곡한듯하나 비굴하지 않다.

마치 수십 년을 집사로 살아온 듯 노련한 태도였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집사를 빤히 마주 보았다.


“이곳입니다.”

“고맙군.”

“목욕물은 준비되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설렁줄을 당겨주십시오. 혹시 목욕 시중이 필요하십니까?”

“아니 됐어.”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적절히 사담을 섞고 적당한 시점에 몸을 뺀다.

안내를 마치자마자 몸을 돌려 나가는 집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엘리자베스의 표정이 미묘했다.

유능하다고만 말하기엔 넘친다.

저건 대체 뭐지?

며칠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웨이브 전 들렀던 본성과 너무 많이 바뀌어 이곳이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간밤 본성 입구에서의 6성채 대장과 집사의 실랑이는 새벽 동이 트기도 전 시종과 시녀의 입을 통해 파다하게 소문이 나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3층에서 따로 생활하는 오헨리만 빼고.


“도련님, 잘 잤어?”

점심을 먹으러 1층을 향한 오헨리를 발견한 셰인이 다가와 어깨에 팔을 척 걸쳤다.


“팔 치워. 당장. 지금 점심 먹으러 온 거 안 보여?”

“기운찬 걸 보니 간밤에 아주 잘 잤구나?”

평소같이 느물거리는 목소리였다.

오헨리가 그때까지도 어깨에 걸쳐진 셰인의 팔을 걷어내고 제 몫의 두툼한 스테이크를 잘라 입에 넣으려고 할 때였다.


“도련님, 도망쳐.”

오헨리를 빤히 바라보던 셰인이 소름 끼칠 만큼 나직한 소리를 냈다.


“……뭐?”

평소 실실거리는 녀석이 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음산한 소리에 오헨리는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마주한 얼굴엔 웃음기가 하나도 없어 평소처럼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라며 타박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공작부인은 틀린 것 같아.”

“뭐?”

“도련님, 공작부인을 위해 배치된 인력이잖아?”

맞다.

아무나 드나들게 두면 위험해질까 봐, 연락책으로 딱 한 명.

발로크에게 큰아이를 내어준 카젤가를 위한 발로크의 ‘호의’로 3층의 유일한 시종으로 배정받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리지?


“간밤에 6성채 대장이 왔어. 웨이브 보고를 한다는 걸 집사가 막았어. 공작님 부부가 주무신다고.”

“……뭐?”

“이번 웨이브가 심상치 않았다는 걸 도련님도 알지? 그런데 그 보고를 안 받겠다고 했나 봐. 집사님에게 ‘손님 접객’을 맡긴다고 했대.”

웨이브라면 만사 제쳐놓고 나서던 공작이?

고작 자겠다고?

셰인은 발성이 좋아 말이 귀에 쏙쏙 들어오는 편인데도, 오헨리는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6성채 대장이 잔뜩 화가 났어.”

“저, 그러면…….”

“공작이 자신의 책무를 등한시했고, 성채 대장의 반발을 샀어. 공작부인이 과연 무탈하게 발로크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어?”

“웨이브를 돌보지 않은 공작님이 이 발로크를 제대로 지킬 수 있을까?”

무섭지 않냐?

귓가에 입을 붙이고 속삭이는 셰인의 말에 오헨리는 들고 있던 포크를 놓치고 말았다.

챙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육즙이 흐르던 고기 조각이 바닥에 떨어져 붉은 자국을 냈다.


“무슨 일이야?”

“아, 손이 미끄러졌어요.”

오헨리는 헤실거리며 새 포크를 받아오는 셰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거, 어쩌면 좋지?


‘너를 내치지는 못할 거야. 그러니, 너는 발로크로 가서 공작부인의 마음을 사로잡으렴’

그는 아직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얼굴이 좋지 않으십니다.”

영지에 일이 있었다더니, 며칠 만에 만난 질리언의 얼굴이 엉망이었다.

언제나 희게 빛나는 그 누구보다 이 겨울에 잘 어울리던 남자였다.

그런 이가 마치 겨울에 잠식당하기라도 한 듯 희다 못해 푸르게 질려 있었다.


“괜찮으십…….”

“웨이브 건으로 보고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엘리자베스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바짝 굳는 것을 느꼈다.


‘6성채 대장님의 접객을 제게 일임하셨습니다.’

‘공작 부부께서는 잠자리에 드셨습니다.’

간밤 매끄럽게 혀를 놀리던 집사의 말이 떠올라서였을까.

사사로움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 모습은 익숙하지만, 처음으로 그게 서운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도 그 어떤 배려도 없이 왈칵 쏟아냈다.


“마물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질리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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