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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7. 허기진 시선 (47/47)


047. 허기진 시선
2023.06.12.



“마물이 진화하고 있습니다.”

질리언은 엘리자베스의 보고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희미하게 찌푸린 미간이 아니었다면 잘 빚어놓은 석상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골치 아픈 듯 손을 들어 이마를 괸 그대로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완벽한 정리가 끝난 것은 지난 저녁으로 아직 정확한 수는 집계되지 않으나, 어림으로 작년 웨이브의 절반에 못 미치는 수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수는 절반인데, 시간은 동일하게 걸렸다?”

결국 시간이 두 배가 걸렸다는 의미다.

각 성채의 대장 중 첫 부임자는 없었고, 다들 기량이 한창때인 이삼십 대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마물이 강해졌군?”

다른 수를 찾을 수가 없었다.


“공격력이야 항상, 사람을 압도하는 것이었으니 저희가 알 수는 없지만. 체감하기엔 재생 속도가 이전보다 빨라진 것 같습니다.”

“재생 속도가 빨라졌다니…….”

“동시에 연타가 나가지 않으면, 반드시 재생됩니다.”

“몰랐어.”

질리언의 말에 엘리자베스가 쓰게 웃었다.

그러시겠죠.

유일한 오러 검사인 그가 연타라는 말을 알기나 하겠는가.

그의 모든 공격은 유효했다.

특히나 오러로 입힌 상처는 재생도 되지 않았다.

오러에 ‘무’로 돌리는 힘이 깃들어서였다.

발로크 공작인 그가 재생 속도를 모르는 건 당연했다.

차이를 여실히 느낀 엘리자베스는 가벼운 허탈감에 몸을 떨었다.


“뒷정리하며 사상자가 나온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저 정리 시간이 길었을 뿐입니다. 이번 추측이 맞는다면 대 마물용 무기의 효용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거창과 투석기.

마물을 압살시키는 투석기는 효과는 좋지만, 거대한 바위를 수급하는 게 일이었다.

그리고 한번 사용한 바위는 마물과 부딪히며 산산조각이 나는 터라 두 번 쓸 수 없다는 것도 치명적이었다.

거창의 경우 사정은 좀 낫지만, 가죽이 질긴 류에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지금처럼 재생 속도가 빨라졌다면 거창은 앞으로 전혀 쓸모가 없을지도 모른다.


“…….”

생각하니 답답하다.

정말 나중에는 발로크 공작만 바라보게 될 것 같다.

짙은 무력감에 절로 한숨이 터진다.


“겁나나?”

“아닙니다.”

“그럼?”

“무기력한 자신이 답답해서 그럽니다.”

“마물에 비견하겠다는 자신감이 일품이군.”

딴에는 진지했는데, 질리언은 재미있는 소리라도 들은 듯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길고 깊은 눈매가 부드럽게 접히며 표정 하나 없던 얼굴에 사람을 홀릴 것 같은 매혹적인 미소가 떠오른다.

늘 내리깐 눈으로 자비 없이 검을 휘두르던 모습만 봐왔던 엘리자베스에게는 생소한 모습이기도 했다.


“걱정 마. 이제 곧, 그대들이 마물로 고생하지 않아도 될 테니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희도 더 분발하겠습니다.”

그 말에 질리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일단 보고는 이쯤하고 저녁에 다시 보지. 안 그래도 서신이 왔어. 오늘 저녁에 다들 모인다는군. 경이 말한 것처럼 ‘달라진’ 마물에 대응할 방책이 필요하다고 말이야.”

“예, 알겠습니다.”

“마침 성을 개보수하려던 참이니 그것도 함께 고민해도 되겠어.”

말을 마친 질리언이 나가보라는 듯 가볍게 턱짓했다.

찰랑이는 그의 은발이 마치 빛을 듬뿍 받은 눈밭같이 찬란해 엘리자베스는 황급히 눈을 내리깔아야 했다.

마치, 눈을 찌르는 것같이 일순 그 빛이 강했던 탓이었다.

허둥지둥 경례를 붙이고 나오는 길.

문을 닫던 엘리자베스는 뜻하지 않게 누군가와 부딪혔다.


“앗!”

“이런!”

어깨가 툭, 부딪혔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훌쩍 넘어가기에 엘리자베스는 곧장 손을 뻗어 움켜쥐었다.

손아귀에 잡히는 가늘고 말랑한 팔뚝.

보드라운 목소리.


“고마워요.”

엘리자베스는 자신에게 붙들린 미녀의 인사에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공작부인이었다.

말로만 듣던 테르미나의 황녀.

비앙카 테르미나.

황녀를 본 적도 없고, 아는 것도 없지만 엘리자베스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제국 제일미라는 건 과장된 소문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질리언 발로크 같은 미인을 또 보게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한 손에 들어올 것 같은 작은 얼굴엔 이목구비가 빠듯하게 들어차 있었다.

오뚝한 콧날도, 적당히 살집 있는 보드라운 뺨도.

갸름한 턱선이며 붉고 통통한 입술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어여쁘지 않은 데는 없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시선을 옭아맨 것은 크고 투명한 푸른 눈동자였다.

북부령에 가장 흔한 색이라 그다지 특별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 없다.

그런데, 황녀의 눈동자는 달랐다.

바닥이 깨끗하게 들여다보이는 깊고 커다란 호수가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까.

홀린 듯 바라보던 엘리자베스를 깨운 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고마워요.”

맙소사.

엘리자베스는 그제야 자신이 아직도 황녀를 붙든 그대로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보같이 굴었다는 생각에 단박에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훅, 차오르는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덕분에 넘어지지 않았어요.”

“아닙니다. 제가 잘 살폈어야 했는데.”

“손님이 있는 걸 몰랐어요.”

사근사근한 말투와 사랑스럽고 목소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가지가지로 불쾌하다.


“실례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그때까지 쥐고 있던 손을 풀며 고개를 까딱였다.

잠깐이라고 생각했는데, 소매 사이로 보이는 손목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

“전 괜찮아요. 경.”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어디에 닿았는지 안다는 듯 역시, 상냥한 말이 돌아왔다.

애교를 부리거나, 눈웃음을 치는 것도 아니다.

그저 정직한 감사 인사와 사교적인 게 분명한 옅은 미소가 고작인데 홀리는 기분이다.

엘리자베스는 이 자리에 있기가 힘들었다.

더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럼, 전 이만.”

빠르게 몸을 돌려 멀어지는 그녀의 옆으로 누군가 달려갔다.


“줄리, 뛰지 말라고 했잖니.”

“하지만 마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는걸요.”

등 뒤에서 뭐라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엘리자베스는 돌아보지 않았다.

우습게도 엘리자베스는 황녀를 만나고 나자 간밤 자신의 접견이 거절당했던 게 완벽히 이해되었다.

과연, 저런 미녀라면 질리언 발로크도 홀릴만했다.


“하…….”

문득 걸음을 멈춘 엘리자베스는 탁한 한숨을 뿜었다.

공작의 심정이 이해된 후 찾아든 건 거센 분노였다.

발로크령에 고작 예쁘기만한 공작부인이 가당키나 하나?


‘엘리자베스가 아니면, 누가 공작부인이 된담?’

지난날 숱하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북부령 출신의 명맥 있는 가문의 ‘기사’

사람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아카데미를 수료하고 돌아와 당당히 발로크의 기사가 된 그녀를 두고 다음 대의 ‘공작부인’감이라며 다들 떠들어댔다.

그녀가 기사로 두각을 드러내면서부터 질리게 들었던 소리였다.

딱히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은 것도 아니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나고 자란 발로크령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 누구보다 이곳을 사랑했으며 아꼈고, 제 손으로 지키길 갈망했다.

아마 공작부인이 된다면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처음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강렬한 갈망이 된 건 선대 공작의 죽음과 함께 소공작인 ‘질리언 발로크’가 세상에 온전히 드러나면서였다.

사일러스 발로크를 닮아 준수할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질리언 발로크는 그보다 더 했다.

엘리자베스는 첫눈에 그에게 반했으며 그의 부인이 되길 소망했다.

그런데, 질리언 발로크는 공작 위를 물려받아 곧장 수도로 올라가더니 신부를 데려왔다.

공작부인이 될 거라던 엘리자베스를 두고.

영지민 모두가 공작부인이 되는 게 당연하다고 입 모아 말하던 엘리자베스 스완이 아니라.

황후를 잡아먹고 태어났다는, 그 황녀를.

제국 제일미라는 명성에 걸맞게 첫눈에 머릿속이 녹작지근해지는 기분이 들 만큼 사랑스럽고 어여뻤다.

그, 질리언 발로크가 누군가를 위해 움직이는 게 당연히 이해될 정도로.

제대로 된 표정 한번 보여주지 않던 저 남자가, 선대 공작을 죽인 황제가 꺼내든 ‘화친혼’을 선선히 받아들이는 게 너무 잘 이해될 만큼.

하지만, 그래서 화가 났다.

이 북부령에 어울리지 않는 저 약해빠진, 고작 얼굴만 반드르르한 여자에게 홀렸다는 것이.

엘리자베스의 눈매가 사납게 솟았다.

황녀의 손목을 감아쥐었던 손아귀가 으득, 소리가 나며 단단히 말렸다.


 


“차 한잔해요.”

집무실로 들어선 비앙카는 무작정 질리언을 잡아끌었다.

저번에 해쓱하게 질린 질리언의 얼굴을 본 후로 비앙카는 그가 무척 자기 자신을 험하게 다룬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해보면 잠을 자고 식사를 하는 건 비앙카 자신의 몫이었다.

공작성에 도착해 처음부터 호되게 앓았기에 ‘동침’은 생각도 해보지 못했고, 어쩌다 보니 사실 그들은 부부가 아니라 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그에게 청혼을 받게 되었던지라 새삼 한 침실을 쓰는 것이 이상해져 어영부영 떨어져 지내고 있다.

듣기로 눈을 감을 때도, 뜰 때도 질리언은 항상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회의할 때도 있고, 출정할 때도 있었으며, 가끔은 사냥을 했다고도 들었다.

그가 자고 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심지어 식사도.

돌이켜보면 그와 함께 식사했다고 기억은 했으나, 먹고 마시는 건 자신이었지 비앙카는 질리언이 식사를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않으니, 몸이 버텨낼 리가 있나.

비앙카는 오랜 시간 학대 아닌 학대를 당하며 자신의 ‘몸’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우쳤다.

박대받는 삶이라고 할지언정 비앙카는 단 한 번도 죽고 싶다고 생각해본 적 없었다.

더러 억울하고 슬펐던 날들이었지만, 그런 날들조차도 비앙카는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떠올리지 않았다.

질리언을 만나러 가던 날에도 죽게 될까 봐 벌벌거렸다.

비앙카는 매 순간 절실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데, 질리언은 생에 대한 집착이 없는 걸까.

이제 생각하니 그는 참 위험천만하다.

인간을 훨씬 상회하는 능력을 갖춰서 초연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이런 사소한 것으로는 그를 해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한가지는 분명했다.

비앙카는 살고 싶었다.

이제는 행복하게.

그와 함께.


“좀 쉬어가며 하세요.”

그러니까 그가 하지 않는다면, 비앙카 자신이 그를 보살펴 줄 생각이었다.

이제야 사랑받는다는 걸, 사랑하고 싶다는 걸 깨우쳤는데.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비앙카는 파리하게 질린 남자의 손을 양손으로 움켜쥐었다.


“…….”

가만히 바라보던 남자가 손을 슬쩍 비틀어 손가락 사이사이를 옭아맸다.

벌어진 틈으로 곧고 길쭉한 것이 쑥.

그리고는 단단히 움켜쥐었다.

옴짝달싹도 못 하게.


“원하시는 대로.”

별것 아닌 소리에 괜히 가슴이 울렁거렸다.

옅게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이 정말 눈부셨다.

정말 근사한 모습이었건만 순간 몹시 허기져 보여 비앙카는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고 말았다.

황금안이 꼭, 먹이를 갈망하는 짐승처럼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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