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봄 답지 않은 첫만남. (1/13)


1. 봄 답지 않은 첫만남.
2023.05.03.


꽃이 피고 새싹이 돋아나는 어여쁜 3월.

오지 않을 거 같던 학생으로서의 마지막 한 해가 시작되고, 유인은 이제 곧 졸업이라는 침울함에 휩싸이기도 전에 기겁할 소식을 들었다.

바로 절친인 한재희가 23번째 생일 파티를 클럽에서 한다는 얘기였다.

즐거워만 보이는 친구에게 불만으로 얼굴을 찡그린 유인이 날카롭게 말했다.


“난 당연히 안 가.”

“뭔 소리야? 너랑 나 한 몸인 거 잊었어?”

“싫어. 내가 거길 가서 뭐 해. 난 술도 안 좋아하고 시끄러운 것도 질색인데.”

“너 언제까지 컴컴한 동굴 속 공주님으로 살래. 이제 그만 탈출해! 그럴 때가 됐어.”

“공주님은 무슨. 아무튼 난 안 가!”

유인이 거절한 그 순간부터 한재희의 집념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올랐다.

물불 가리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 시도 때도 없이 유인을 괴롭힌 결과, 끈기와 오기로 똘똘 뭉친 친구를 이기지 못한 유인은 결국 항복을 하고 말았다.


“자, 약속해. 나중에 딴소리하면 절대 안 된다?”

“……하아. 알았다고.”

누구보다 행복한 얼굴로 꼭 가야 한다며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한재희에게 완전히 질려 버린 유인은 ‘될 대로 되라’라는 심정으로 손가락을 걸었다.

그래. 잠깐만 있다 오면 뭐 별일 있겠어. 안일하고 단순한 생각을 하면서.

하지만 유인은,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선택이었다는 것을.

역시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

토요일 저녁, 주말의 번화가는 번잡하고 시끄럽고 복잡했다.

유인은 짧고 달라붙는 원피스가 불편해 연신 치맛자락을 내렸지만 이미 짧은 옷은 여전히 짧았다.

오전부터 무작정 집으로 쳐들어와 인형 주무르듯이 유인을 꾸며놓은 재희는 기분이 엄청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고 있었다.

친구의 고집에 또다시 꺾인 유인은 한숨을 쉬며 키가 커서 걸음이 빠른 친구를 따랐다.

드디어 클럽 입구 앞. 북적이는 인파를 노려보는 유인에게 어깨동무를 한 재희가 말했다.


“자, 준비됐지. 남유인?”

“아, 몰라. 빨리 들어가자.”

“준비됐다고? 오케이!”

제멋대로 출발을 외치는 재희의 힘에 밀려 들어간 클럽은 유인의 생각 그대로였다.

숨이 턱 막히는 답답한 공기. 스피커뿐만 아니라 머리를 울릴 정도로 큰 음악 소리. 이른 시간임에도 벌써 취해서 흐물대는 인간들.

술이야 친구들과 가끔 마시지만 유흥을 즐기는 일에 관심도 없고 애초에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유인에게 이런 장소는 최악이었다.


“……으.”

앓는 소리를 절로 낸 유인은 재희의 등 뒤에 바싹 달라붙었다.

코알라처럼 매달린 유인을 등에 달고 씩씩하게 층계를 오른 재희가 2층 통로 중간쯤에 있는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자 미리 준비하고 있던 친구들이 재희를 향해 폭죽과 샴페인을 터트리며 생일 축하 노래를 귀청이 떨어지도록 불렀다.


“생일 축하 합니다~ 한재희의 생일을~.”

“축하해, 한재희!”

“재희야, 생일 축하해!”

“재희 완전 생축-!”

축하 노래와 선물 증정식은 끝없이 이어졌다.

촘촘히 모여든 사람들 틈바구니 사이에서 간신히 몸을 피한 유인은 혼이 쏙 빠진 채로 테이블에 기대섰다.

룸에 들어온 지 채 몇 분 되지 않았건만 이리저리 치인 몸은 벌써 기진맥진 상태였다.

역시 이런 장소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타는 목을 적시려 테이블 위에 있던 크리스털 잔에 담긴 핑크빛 음료를 입에 털어 넣을 때였다.


“야, 쟤 남유인 아니야?”

“맞네. 저렇게 꾸미고 온 거 처음 본다.”

“그러니까. 근데 나 예전부터 느꼈던 건데 쟤 남유진이랑 엄청 닮지 않았어?”

“어? 진짜 그렇네. 왜 여태 몰랐지?”

이렇게 시끄러운 룸 안에서도 뚜렷하게 들려오는 이야기 덕분에 유인은 꿀꺽 넘어가는 액체의 맛도 느끼지 못하고 삼켜야 했다.

남유진과 닮았다는 말.

남들에겐 별거 아닌 그 한마디가 유인의 마음을 들쑤셨다.

화장도 즐기지 않고 꾸미는 일에 흥미가 없는 건 영락없이 따라붙는 남유진이란 낙인 때문이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붙어 다닐 꼬리표로 남을 그 이름을 더 이상 듣기 싫어서 헝클어진 표정을 애써 감추며 뒤를 돌았다.

막 걸음을 뗐을 무렵,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휙 잡아끌었다.


“남유인!”

“으앗!”

외마디를 지른 유인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다정한 빛을 부드럽게 내뿜으며 웃고 있는 얼굴을 발견하고, 놀람과 안도감이 동시에 얽혀든 유인이 짜증을 내며 타박했다.


“윤지한, 놀랐잖아!”

“많이 놀랐어? 미안해.”

잔뜩 굳은 유인의 어깨를 섬세하게 두드려주는 지한은, 재희와 마찬가지로 고등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다 대학까지 같이 온 절친 중 하나였다.

가벼운 장난에 좀 과하게 짜증을 낸 건 유인인데, 오히려 더 마음을 쓰는 건 지한이었다. 괜찮냐며 다시 묻는 그에게 유인이 됐다고 손을 내저었다.

자연스럽게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끄는 지한을 따라가 소파에 앉으려다, 자신을 보며 슬쩍 미간을 구긴 채 얼어 있는 지한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왜?”

“못 보던 옷이네.”

“아, 재희가 꼭 입어야 한대서. 많이 이상해?”

안 그래도 차림이 맘에 들지 않던 유인은 어색하게 워커를 신은 발을 까딱거렸다.

뭔가 맘에 안 드는 시선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쭉 내려간 지한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니, 이상한 건 아니고.”

“그래? 난 어색해 죽겠다. 얼른 집에 가서 벗고 싶어.”

“너 집에 언제 가게?”

“음……곧?”

그때, 시끌벅적한 무리들 사이에서 ‘윤지한, 뭐 해!’ 하고 지한을 부르는 큰 소리가 들려, 둘의 시선이 같이 휙 돌아갔다.

유인이 지한의 등을 툭툭 두드리며 그를 떠밀었다.


“너 찾는다. 얼른 가 봐.”

“넌?”

“나? 그래도 한재희 생일인데 샴페인은 한 잔 마셔야지. 이거 마시고 갈 거야.”

유인이 곁에 있는 테이블에서 잔을 들었다. 아까는 듣기 불편한 얘기에 맛도 느끼지 못하고 넘겼으니 이게 첫 잔이나 마찬가지였다.

옅게 빛나는 핑크빛 알코올을 살살 흔드는 손짓을 보며 잠시 망설이던 지한이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데려다줄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알았지?”

“어? 아니-.”

유인은 가끔씩 이렇게 과보호하는 지한에게 그럴 필요 없다 하려다가 괜히 말이 길어질 거 같은 예감에 고개를 대충 끄덕였다.

그러자 칭찬하듯 유인의 머리를 쓰다듬은 지한은 자신을 부른 무리 쪽으로 금방 섞여들었다.

큰 소리가 연달아 터지는 무리를 감흥 없이 바라보던 유인은, 손에 들고 있던 샴페인을 홀짝댔다.

맛을 못 느꼈던 음료를 음미하니 진한 복숭아 향과 함께 달짝지근함이 혀를 녹이고 적당히 시원해서 넘어가는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오지 않는 친구를 기다리며 한 잔, 두 잔 마시던 샴페인 병이 반 넘게 비었을 땐, 유인의 눈은 풀리고 몸은 흐물거리고 있었다.


“아, 안 되는데…….”

달콤함에 속아 자신이 취하는 줄도 몰랐던 유인은 두 손에 얼굴을 푹 묻었다.

이런 낯선 공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자신의 계획에 없던 일이다.

더 취하기 전에 여길 빠져나가야 했다.

힘이 빠진 손으로 주머니를 뒤져 친구들에게 먼저 가겠다 메시지를 겨우 보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핑 도는 시야에 눈을 꾹 감았다 뜬 유인이 곧, 힘이 풀린 다리를 끌고 취한 이들을 피하고 넘어서 룸 도어를 활짝 열어젖혔다.


“콜록……콜록!”

안보다 더 매캐하고 탁한 공기를 훅 들이마신 유인이 기침을 하며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뿌연 연기를 가르고 가까스로 계단을 내려가자, 커다란 홀에는 아까보다 사람이 배는 많아지고 음악 소리도 쿵쿵대며 훨씬 커져 있었다.

정신이 하나 없는 상태에서 알코올까지 끼얹어져 제대로 된 사고를 하지 못하는 유인은 입구를 찾기는커녕 같은 자리만 빙빙 돌았다.

목적지를 잃은 돛단배처럼 홀을 돌며 사람들과 계속 부딪히던 그때, 유인의 눈에 살짝 열린 문이 보였다.

드디어 출구를 찾았다는 반가움과 그곳으로 달려들었다.


“……아, 뭐지. 밖이 왜 아닌 거야.”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그곳엔 웬 고요한 복도가 펼쳐져 있었다.

온통 보라색으로 칠해진 조용한 통로는, 클럽과 너무 동떨어진 분위기로 작은 샹들리에가 벽을 은은하게 밝히고 있어 고고한 느낌까지 들었다.

사이키 조명이 돌아가고 시끄러운 음악이 울리는 클럽에 왜 이런 통로가 있는지 의심 먼저 해야 했지만 유인의 몸은 이미 한계치를 넘어서고 있었다.

벽을 기댄 얄팍한 상체가 맥없이 벽을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리고 끙끙거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유인이 점점 심해지는 두통과 울렁거림과 싸우고 있던 중, 복도 저편에서 잠잠한 공기를 뚫는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뚜벅.

뚜벅.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던 유인은 스르르 고갤 들어 소리가 들린 방향을 바라봤다.

반대쪽에서 새까맣고 칼주름이 잡힌 단정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그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얼굴이 보일 정도의 거리에서 까만 구두가 멈춰 서고, 유인은 알코올에 푹 절여져 반쯤 감긴 눈으로 커다란 형체를 멍하게 응시하기만 했다.

정장 바지에 양손을 찔러 넣은 남자가 고개를 삐딱하게 꺾고 앉아 있는 유인을 살피더니 물었다.


“남유진?”

“……아닌데요.”

“……아니라고?”

“…….”

발소리만큼 무겁고 낮은 목소리가 되물었지만 유인은 답하지 않았다.

지겨운 남유진 타령은 이제 그만 듣고 싶었다. 다 귀찮고 그만하고 싶다. 제발.

유인이 껍질 안으로 도망치는 소라게처럼 고개를 다리 사이로 푹 수그리자 속도가 빨라진 발소리가 머리꼭지에서 들렸고, 위압적인 저음이 그녀를 불렀다.


“이봐요.”

“…….”

“고개 들어봐요.”

고개를 들지 않으면 안 될 거 같은 힘이 실린 음성이었다.

천천히 얼굴을 든 유인과 그녀의 머리 위로 허리를 굽힌 남자의 시선이 가까운 곳에서 얽혀들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던 이목구비가 한눈에 들어오니 유인은 평소답지 않은 대담한 눈길로 더듬기 시작했다.

그려놓은 거처럼 유려한 눈매와 우뚝하게 솟은 콧날에 이어진 단호하게 닫힌 입술. 그리고 눈매만큼 날카롭고 단단한 턱선. 그리고 마찬가지로 유인을 빤하게 보고 있는 새까만 눈동자.

감상을 마친 유인은 저도 모르게 양 볼을 봉긋하게 올려 헤, 웃었다. 윤지한보다 잘생긴 남자는 처음 보네, 술기운이 섞인 감상평도 속으로 남기며.

아름답고 예쁜 것을 본 후의 자연스러운 표현이었다.


“하……어이없네.”

고개를 기울인 남자가 한숨같이 작게 읊조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의 코앞에 커다란 손이 불쑥 들이 밀어졌다.


“여기 있으면 안 되니까 나가요.”

“……네? 왜요?”

“일단 나가자고요. 빨리.”

그러면서 보채듯이 손을 흔들었다.

멍하게 눈을 껌벅대던 유인이 영문 모른 채 커다란 손바닥을 잡자, 강하게 움켜쥔 힘이 단숨에 몸을 일으켰다.

남자는 깜짝 놀란 유인이 호흡을 가다듬을 시간도 주지 않고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둘은 얼마 가지 못한 채 멈춰서야 했다.


“아. 잠시! 잠시만……요. 너무 어지러워요.”

좀 가라앉나 싶었던 알코올 후유증은 어느새 큰 파도로 돌변해 유인의 몸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었다.

얕은 한숨과 함께 한심함을 담은 저음이 그녀의 정수리로 날아왔다.


“뭘 얼마나 마셨길래.”

“머리……머리가 너무 아파요. 토할 거 같아.”

유인은 방금 전보다 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성가시게 잡고 있는 손을 놔버리려 했다.

남자는 그럴 수 없게 더 힘을 주어 그녀를 당겼다. 허물어지는 몸을 제 상체에 기대게 한 뒤 화가 난 사람처럼 거칠게 물었다.


“이봐요. 이름이 뭐예요.”

“……이,름……그건 왜.”

“이름.”

“나……남……유인.”

그 말을 끝으로 유인은 아슬아슬하게 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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