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악몽 같은 남자.
(2/13)
2. 악몽 같은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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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악몽 같은 남자.
2023.05.06.
방금까지 깊은 잠에 취해 있던 유인은 불현듯 깨어났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유인이 아직 몽롱함이 가득한 채로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어깨에 걸쳐져 있던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멍한 눈으로 고갤 내리자 처음 보는 블랙 슈트 재킷이 자신의 다리를 덮고 있었다.
그것이 뭔지 수 초간 고민하던 유인은 곧 경악을 하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새까만 대시보드, 희미하게 코를 자극하는 가죽 시트 냄새. 어둡게 선팅이 된 유리.
“헉!”
누워 있던 곳은 낯선 차 안 조수석이었다.
사용감이 거의 없는 실내에 숨 쉬고 있는 거라곤 유인 하나였다.
납치라기엔 너무 허술하고, 아니라고 하기엔 생경한 배경이 유인을 두렵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정황을 떠올려 보려는 그때, 운전석이 달칵 열리고 캄캄한 곳에서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먼저 들렸다.
“이제 일어났네.”
서늘한 밤공기와 매캐한 냄새가 동시에 풍기며 기다란 몸이 좌석에 구겨져 들어왔다.
위아래로 온통 새까맣게 입고 덩치마저 커다란 남자를 보고 까무러친 유인은 몸을 도어에 최대한 붙이며 구겨진 캔처럼 쭈그러들었다.
유인이 얼이 빠진 얼굴로 남자에게 물었다.
“누, 누구세요?”
“기억 안 납니까?”
“무슨……기억요?”
“그럼 곤란한데요.”
내리깔아진 날카로운 눈매가 동그랗게 커진 눈과 황당하게 벌어진 입을 쓱 살피더니 말했다.
“나 붙잡고 기절했잖습니까, 남유인 씨.”
“네? 제가요? 그럴 리가!”
혼란스러움으로 잔뜩 흔들리는 커다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방황을 하다가 일순 멈췄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어디에도 없던 장면이 어디선가 날아와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베일 듯 단정한 검정 슈트. 차갑고 무거운 저음. 엄청나게 잘났다 감탄해 마지않던 얼굴.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주인인 눈앞의 남자.
황망하게 커진 눈이 주춤거리며 매끈한 얼굴에 가닿자 남자는 덤덤하게 물었다.
“이제 좀 기억나요?”
작게 고개를 끄덕인 유인은 불안한 기색으로 연신 커다란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에게 절대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이 눈앞에 펼쳐져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럴 리가 없다는 말이 나온 것도 그런 뜻이었다. 진짜 믿을 수가 없어서.
술에 취했을 때부터 잘못됐음을 알았지만, 그 연쇄반응이 이렇게 번질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했다.
묵직하게 깔린 낭패감 위로 자라난 의심과 불신은 처음 본 자신을 클럽에서 데리고 나와 차에서 재운 낯선 남자에게로 향했다.
“저 왜 여기 있어요?”
“기절한 남유인 씨가 제 발로 걷진 않았을 테니, 답은 하나네요.”
어둑한 실내 안에서도 반짝거리는 남자의 새까만 눈동자에 웃음기가 어렸다.
그의 모습에 유인은 어깨를 한층 더 움츠렸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목소리를 냈다.
“왜 데리고 나오셨어요? 놔두셔도 되는데.”
“그 복도 바닥에? 남유인 씨, 거기가 어딘 줄이나 알고 그런 말 하는 겁니까?”
“클럽……아닌가요? 거기가 어딘데요?”
그러고 보니 남자는 그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도 얼른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짙은 보라색으로 칠해진 그 통로가 뭐길래 저리 과민반응인지 물었지만, 남자는 잠시 망설이더니 이내 모르면 됐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돌아오지 않은 답에 유인은 인상을 찌푸렸다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깨우기라도 하시지.”
“내가 안 깨웠을 거 같습니까?”
“안 일어나면 경찰서에라도 데려다 놓으시면 되잖아요.”
“뭐 하러요. 거기서 일어났으면 뭐가 더 나았을 거 같아요?”
“적어도-.”
눈 뜨자마자 불안감에 떨지 않아도 되고 이 밀폐된 공간에 단둘이 있지 않아도 되니까.
유인은 말을 쏟아내기 직전,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이 겁먹고 있다는 약점을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을 거 같았다.
갑자기 말을 잃은 유인을 흥미로운 눈으로 관찰하던 남자가 되물었다.
“적어도?”
“……아니에요.”
답을 듣지 않았어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았다는 듯 남자는 픽 웃었다.
“그래도 이럴 땐 보통 감사 인사부터 하는 게 맞지 않나.”
“…….”
“내 딴엔 잘 자라고 옷도 벗어주고 차 밖에 나가 있기까지 했는데.”
그러면서 유인이 긴장으로 꽉 쥐고 있던 슈트 재킷을 턱짓했다.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행동을 깨달은 유인은 곧바로 힘을 풀었지만 이미 구김이 간 재킷은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하고 흐물거렸다.
당황한 유인이 망가진 옷과 그 옷의 주인인 남자를 번갈아 보자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혀를 찼다.
“저런. 맞춘 지 한 달도 안 된 옷인데.”
“……아. 죄송해요. 드라이 클리닉 비용 드릴게요.”
“그건 됐고요.”
남자는 유인의 손아귀에서 재킷을 뺏었다.
유인의 눈길이 성의 없는 손길에 의해 뒷좌석으로 던져지는 옷을 좇다가, 갑자기 진지하고 엄해진 목소리가 들리는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앞으로 술은 적당히 마시고 다녀요. 오늘처럼 누군가가 구해주는 일은 앞으로 없을 테니까.”
“…….”
“아무리 급해도 아무 데나 들어가서 쭈그려 있지 말고.”
“…….”
“알아들었어요?”
마치 잘못된 학생을 훈계하는 선생님처럼 말하는 남자 때문에 유인은 기분이 묘해졌다.
술에 취한 기절한 자신을 데려와 깰 때까지 기다려 주었으니 걱정이든, 간섭이든 해도 되는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 둘 중 어떤 것이든 불편하다는 생각이 든 유인이 침묵을 유지하자, 남자는 한술 더 떠 ‘대답.’ 하고 그녀를 재촉했다.
그래도 뜸을 들이니 그의 눈썹이 위협적으로 치켜 올라가는 걸 목격한 유인은 저도 모르게 작게 대답했다.
“……네.”
“그래요. 이제 벨트 매요.”
“네. 네? 벨트는 왜요?”
“집에 안 갈 겁니까?”
이제 남자는 유인이 당연하게 이 차를 타고 집에 갈 거라 단정 짓고 있었다.
그 태도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그냥 넘어갈 뻔했지만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유인이 양손과 고개를 다 내저으며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저 혼자 갈게요. 이 이상 피해를 끼칠 순 없어요.”
“남유인 씨. 지금 새벽 1시예요.”
“네. 저도 알아요.”
“학생이 돌아다니기에 너무 늦은 시간 아닌가.”
“네? 무슨……저 성인인데요.”
선생님처럼 혼내더니 이젠 아예 어린애 취급을 하기로 했는지 유인의 말을 무시한 남자는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러고 고개를 살짝 비틀어 내리깐 나른한 눈으로 유인을 빤히 바라보다가, 별안간 긴 눈꼬리를 곱게 휘며 웃었다.
그건 분명 자신의 미소에 어떤 힘이 있는지 아는 자태였다.
유인은 숨을 흡. 들이마신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래서. 집이 어딘데요.”
****
다음 날 늦은 오전.
침대에 널브러진 유인은 일주일 만에 찾아온 느긋한 휴일을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어제 있었던 찝찝한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너무 진하게 남은 해사하게 웃던 남자의 모습이 자꾸 떠올랐다.
그리고 살짝 웃을 때는 몰랐던 한쪽 뺨에 폭 패인 볼우물도.
겁낼 땐 언제고, 한심하게 그 미소에 넘어가서 사는 동네를 알려주고 말았다는 거에 깊은 자괴감이 든 유인은 제 머리를 퍽퍽 때렸다.
그래도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제가 사는 아파트와 두 블록 떨어져 있는 곳의 이름을 댄 건 참 다행이었다.
하지만 같은 동네 다른 아파트 이름을 들은 남자가 무슨 연유인지 서늘하게 웃어서 뇌리 어딘가에 왠지 모를 꺼림칙함을 남겼다.
“아, 몰라. 잊어. 잊어버려, 남유인!”
유인은 어제 겪은 모든 것들을 제 머리에서 다 튕겨내듯이 허리에 다리를 뻥뻥 차며 침대 위에서 뒹굴었다.
그래. 살면서 한 번쯤 겪는 최악의 한 종류일 뿐이다.
클럽에 간 것도. 기절할 정도로 술에 취한 것도. 그런 자신을 구해줬다고 우기는 남자도.
모두 다 묻어버리자. 어차피 그런 곳엔 다시 가지 않을 거고, 술도 안 마실 거고, 그 남자도 다신 볼 일 없을 거다.
별스러운 일은 어제부로 다 끝난 거다.
주문을 외우듯 한참 동안 되뇌고 나니 시끄러운 속이 한결 나아진 유인은 기지개를 쭉 펴고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시선에 걸린 책상 위의 흰색 쇼핑백을 보곤 화들짝 놀랐다.
“아, 맞다!”
그때서야 이름도 모르는 남자에게 휘말리느라 친구들을 까맣게 잊고 말았다는 걸 알았다.
집에 간다고 연락해놨으니 재희는 괜찮지만 유별한 윤지한은 아마 난리가 나 있을 게 뻔했다.
다급하게 잘 걸어놓은 재희 가죽 재킷의 주머니를 뒤지는데 안이 텅 비어있어서 당황했다.
“……뭐지.”
휴대폰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다.
어젯밤에 집에 들어와서는 꺼내보지도 않았으니 거기에 있는 게 맞는데 왜 없을까.
혹시 몰라 온 방 안을 다 찾아봤지만 작은 기계는 나오지 않았다.
유인은 결국, 거실로 나가서 티브이를 보며 쉬고 있는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내 휴대폰 봤어?”
“아니, 못 봤는데. 방에 없어?”
“응. 안 보이네.”
그러면서 앉지도 않은 거실 소파를 괜히 뒤적거렸다. 어디 갔지.
유인이 마지막으로 휴대폰의 존재를 확인한 건 재희 생일 파티 장소인 클럽 룸이었다.
재희와 지한에게 먼저 간다고 메시지를 보낸 후 주머니에 넣고 꺼낸 기억이 없었다.
술에 취해 잘못 넣었던 걸까. 아니면 그 이상한 복도에서 쭈그려 있을 때 떨어뜨리기라도 했나.
그것도 아니면…….
설마, 진짜 설마 그 차 안에 흘린 건 아니겠지.
또 상황이 이상한 쪽으로 흐르기 시작해서 유인은 삽시간 불안에 휩싸였다.
“엄마! 나 휴대폰 좀 빌려줘. 내 거 잃어 버렸나봐.”
“뭐어? 어디서?”
“기억이 안 나. 엄마 거 어디 있어?”
유인은 건네주는 기계를 받아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눌렀다. 바로 통화를 누르지 못하고 심호흡을 여러 번 했다.
차라리 아무도 받지 않길. 그냥 땅에 떨어져서 고장 났길. 제발 그러길 바랐다.
마침내 버튼을 누르자 뚜르르르- 뚜르르르- 대기음이 몇 번 이어졌다.
그리고, 유인의 예상을 처참히 깨버리고 상대방이 받는 소리가 들렸다.
-네.
그와 동시에 유인의 심장도 쿠웅- 저 아래로 한없이 떨어졌다.
한 글자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아직 조금도 잊혀지지 않은 목소리여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입을 꽉 다문 유인 대신, 상대방이 먼저 물어왔다.
-남유인 씨?
어제의 그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