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뜬구름 같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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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뜬구름 같은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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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뜬구름 같은 여자.
2023.05.10.
한가한 일요일 정오.
모던한 블랙 데스크 위는 아까 전부터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반짝이는 휴대폰을 바라보고만 있던 남자는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치기만 할 뿐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참을 이어지던 수신음은 뚝 끊어졌지만 일정하게 두드려지는 리듬은 멈춰지지 않았다.
자신의 집 서재에 앉아 있는 남자, 기연은 어제 클럽에서 마주친 여자를 떠올리고 있었다.
술기운에 다 풀린 눈으로 저를 보며 헤죽- 웃던 남유인.
듣던 대로 남유진과 엄청 닮은 얼굴을 가진 여자를 그곳에서 만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지이잉-.
이번엔 전화가 아니라 메시지 알림 진동이 울렸다.
기연은 불이 들어온 액정을 대충 훑었다. 발신자는 아까와 같이 ‘지한이’
별로 숨길 게 없는지 메시지도 함께 보이게 설정해놓은 탓에 간단한 내용이 함께 눈에 들어왔다.
[유인아, 전화 왜 안 받아. 걱정돼 미치겠-.]
중간에서 끊긴 문자는 더 보지 않아도 뻔해 보였다.
남자친구라기엔 저장된 이름이 건조해 보이고, 아니라고 하기엔 상대방의 반응이 너무 과하고.
아까부터 전화와 메시지를 번갈아 해대는 저것의 정체는 뭘까.
기연이 호기심에 골몰해 있을 무렵, 길게 이어지는 진동소리가 다시 들렸다.
또 인가. 짜증스러운 시선이 휴대폰 액정을 봤을 땐 쉼 없이 움직이던 그의 손가락을 멈추게 할 만한 발신자의 이름이 떠 있었다.
‘엄마’
기연은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귓바퀴에 갖다 댔다.
“네.”
-......
수화기 반대편은 먼저 걸어왔음에도 아무런 반응 없이 아주 조용했다.
그러나 그 침묵마저 전화를 건 사람이 남유인이라고 말하는 듯해서 기연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입술을 물며 참았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고요한 상대방 대신 먼저 물었다.
“남유인 씨?”
-......그게 거기 있네요.
체념한 거 같은 유인의 음성은 기연이 받지 않기를 바란 거 같았지만 그는 모른 척했다.
“그러게. 주인이 버리고 갔길래 내가 잘 주워놨어요.”
-제가 그걸 왜 버리겠어요.
“아니에요? 불러도 무시하고 가버리던데.”
-......아.
생긴 거만큼이나 가느다랗고 여린 목소리에 난감함이 가득하다.
유인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알 거 같았다. 제 옆에서 내내 보여주던 곤란한 얼굴을 하고 눈을 굴리고 있겠지.
그녀의 언니는 그런 얼굴을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얼굴은 비슷해도 성격은 영 딴판인 모양이라고 기연은 생각했다.
배우 남유진의 동생, 남유인.
기연은 어제 유인을 실제로 보기 전부터 그녀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다.
남유진은 본인의 사생활이 대중들로부터 철저하게 가려져 있길 바랐고 기연은 그걸 지켜줄 의무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남유진에 대해 누구보다 자세히, 상세하게 알고 있어야 했고 가족사항이야 기본적인 거니 당연히 알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알고 있었음에도 헷갈릴 수밖에 없는 닮은 얼굴이었지만, 가까이에서 눈을 마주한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타고 흐르는 분위기나 표정, 목소리, 행동 하나까지 모두 남유진과는 정반대라는 걸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름을 묻고 나서야 역시나 짐작대로 남유진의 동생 남유인이라는 걸 알았다.
물론 그녀가 남유진 동생이 맞다 해도 회원들만 다니는 고급 바 복도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기연과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왜인지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듯 투명하고 맑게 웃는 그녀를 별 이상한 인간들이 득실대는 거기다 놓고 지나치는 건 맘이 편하지 않았다.
그저, 단순한 변덕. 가벼운 친절. 딱 그 정도였다.
-그……편하신 곳에 맡겨두시면 제가 찾으러 갈게요. 어디가 괜찮으세요?
자신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명백한 말에 기연은 신경 끄트머리를 그을린 사람처럼 인상을 구겼다.
남유인은 뭐가 그렇게 불편하고 불안할까. 자신은 호의를 베풀었을 뿐인데.
순간 삐딱선에 오른 마음이 심술궂게 돌변해 남유인을 더 약 올리고 싶어졌다.
“왜요.”
-......네?
“나 만나기 싫어요?”
-아......그게 아니라, 바쁘실까 봐요.
“오늘 일요일인데. 아무리 바빠도 주말은 쉬어요.”
-......그렇죠. 오늘이 하필 일요일이네요.
“하필?”
거슬리는 단어 하나를 다시 되뇌니 유인은 그게 아니고요, 라며 작게 웅얼거렸다.
그 조그마한 소리를 내는 게 꼭 강아지가 끙끙대는 거 같아서 기연은 설핏 나오려는 웃음을 또 참아야 했다.
방금 전 기분이 상했던 것도, 자신이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잊은 채.
“내가 갈까요, 남유인 씨가 올래요. 선택해요.”
생각이 많고 망설임이 심한 남유인 같은 스타일에겐 쐐기를 박아줘야 빠르다.
본래의 기연 성격대로라면 선택지도 주지 않았을 테지만 유인에겐 흔하지 않은 인심을 베풀어 주었다.
그러자 한참 동안이나 말이 없던 유인은 작은 한숨을 폭 쉬더니 대답했다.
-제가 갈게요. 어디로 가면 돼요?
****
SJ호텔 라운지 바.
이곳 대표가 특별히 공을 들여 리모델링했다는 라운지는 세련됨과 우아함, 고풍스러움을 다 겸비한 호화스러운 인테리어로 꾸며져 돈 좀 있다는 이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도시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도록 통유리로 된 고급스러운 프라이빗 룸은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이용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기연에겐 상관없는 사실이었다.
기연은 괜히 자신이 이만큼 능력이 있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그녀를 이곳으로 불렀지만, 정작 유인은 전혀 관심이 없는지 그저 불편해 보였다.
“뭐 마실래요. 커피? 여기 케이크도 맛있어요.”
“커피만요. 케이크는 됐어요.”
케이크는 됐다며 빠르게 도리질 치는 걸 본 기연은 피식 웃었다.
예상대로 오자마자 휴대폰만 받고 돌아가려는 유인에게, 어제도 구해주고 오늘 휴대폰도 찾아줬으니 신세 갚은 셈 치고 차 한잔하자고 제안하니 고민하던 유인은 못내 기연의 앞에 앉아주었다.
다른 뜻은 없었다. 그저 이런 우연이 아니라면 마주할 일 없을 거 같은 사람에게 느끼는 순전한 호기심이었다.
그리고, 남유인의 반응이 워낙 재밌기도 하니까.
“아이스?”
“아뇨. 따뜻하게요.”
작게 대답하고 유인은 아랫입술을 이로 꾹 물었다.
어제도 여러 번 목격한 버릇 같은 행동이 주문을 하고 있던 기연의 시선을 끌었다.
저건 곤란할 때 나오는 버릇인가. 저렇게 꽉 깨물면 아플 거 같은데.
스쳐 지나가는 잡념 한 조각에 눈을 찡그리며 살짝 웃은 기연이 점잖은 척 물었다.
“오는 데 꽤 오래 걸렸겠어요. 하필 주말이라.”
‘하필’이 강조된 걸 알아들었는지 얇은 베이지 코트를 입은 어깨가 살짝 움찔거렸다.
“그렇게 오래는 안 걸렸어요.”
“뭐 타고 왔어요?”
“버스요.”
“음.”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고 우리나라에서 잘 나가는 걸로 꼽으면 열 손가락에 드는 남유진의 동생이 버스를 타고 다닌다라.
남유진이 분기별로 백화점을 털어서 명품 옷과 신발, 가방 할 거 없이 밴을 가득 채울 정도로 구매해서 집에 나른다는 소문은 회사 안에선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 씀씀이를 가진 남유진인데, 그렇게 아낀다는 제 동생에게 그깟 차 한 대도 안 사줬다는 사실이 좀 아이러니했다.
설마 위험하다고 면허도 따지 않게 한 걸까.
뭐, 저 얌전하고 순해 보이는 손이 운전대를 잡는 게 좀 불안하긴 하겠네.
기연은 유인이 절대 알 수 없는 생각을 하며 느긋하게 턱을 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유인의 차림새는 수수하기 그지없었다.
얇은 코트 안에 창백하도록 흰 피부에 잘 어울리는 버건디 니트. 다리 라인이 드러나는 청바지.
잘 빗어 내린 긴 생머리에, 화장기 없이 말간 얼굴.
기연은 어제 같은 화려한 스타일링보단 이쪽이 더 그녀와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기연이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났다.
슬라이드 문이 열리고 트레이와 함께 직원이 들어와 주문한 것들을 놔주는데, 조각 케이크들이 함께 올라온 걸 보고 유인이 어, 하고 소리를 냈다.
세팅을 마친 직원이 목례를 하고 나가고 멋대로 주문을 바꾼 기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진짜 맛있으니까 먹어봐요.”
“아……네.”
못마땅한 듯 답한 유인은 역시나 케이크는커녕 마시겠다던 커피에도 입대지 않고 컵만 만지며 꼼지락거렸다.
한동안 둘이 앉은 테이블 위는 작게 들리는 클래식 음악 소리만 흐르다가, 기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 거긴 왜 있던 겁니까?”
“친구 생일이라서요.”
친구 생일이라.
기연은 자신이 다니는 바가 일반 클럽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었다.
두 곳이 복도로 연결돼 있는지는 그도 처음 알았지만, 고작 23살 대학생인 남유인이 친구와 간 곳은 당연히 그 클럽이라는 건 간단하게 유추가 가능했다.
“친구는 어디 가고 혼자 취해서 방황했어요? 길 잃은 강아지도 아니고.”
연약해 보이는 손가락이 커다란 머그를 들다가 멈칫했다.
룸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기연을 똑바로 쳐다보는 눈동자는 동공이 커다랗고 물기가 살짝 어려 있었다.
아. 술에 취해 그런 줄 알았는데, 저 눈은 원래 저러네.
우는 모습은 어떨까. 울고 있는 얼굴이 참 예쁠 거 같은데.
순간, 위험한 감상을 품은 기연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리기 위해 검지로 입술을 꾹 눌렀다.
그러자 뭐가 거슬린 건지 불편한 심기가 그녀의 음성에 묻어나왔다.
“집에 가려고 나왔는데 출구인 줄 알고 착각했어요. 문이 열려 있어서.”
“출구를 못 찾을 정도로 술을 먹는 타입이에요?”
“아뇨.”
“그 클럽은 자주 갑니까?”
“그것도 아닌데요.”
“그럼 친구 생일이라 어쩔 수 없이 가서 할 수 없이 술을 마셨다는 건가?”
“……네, 뭐.”
대답이 반 박자씩 느려지는 유인의 얼굴에 그게 왜 궁금하냐는 비난의 빛이 어렸다.
그러면서 대답은 또 꼬박꼬박 잘해서 기연은 유인이 싫어하는 기색인 걸 알면서도 자꾸 말이 걸고 싶었다.
여자애들이 놀던 고무줄을 끊고 도망가는 남학생의 짓궂음처럼.
뭔가 말하고 싶은지 달싹이는 작은 입술을 본 기연이 말해요. 하자 퍽 또렷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평소에 모르는 사람한테 친절을 잘 베푸시나봐요.”
“나요? 그런 데에 시간 낭비하는 사람 아닌데.”
“근데 저한테는 왜.”
“아. 남유인 씨는 특별하니까.”
자신을 떠보는 말에 기연은 더 큰 미끼를 던졌다.
그러자 유인의 시선이 혼란스럽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기연에게 다시 돌아왔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요.”
“그래요? 커피 다 식겠네, 마셔요.”
“…….”
보통 이렇게까지 했으면 기연에 대해 궁금증이 생기거나, 방금 한 말이 무슨 말이냐고 따져 묻기라도 해야 하는데.
유인은 오히려 아까보다 더 조용해져서 싱긋 웃는 기연을 빤히 보기만 했다.
방금까지는 훤히 보이던 유인의 생각이 이번만큼은 읽히지 않아서 기연도 덩달아 입을 다물고 그녀를 응시했다.
저 조그만 머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번엔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하나 유인은 기연의 기대감을 와장창 깨버리고 갑자기 가득 담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꿀꺽꿀꺽 다 마신 컵을 테이블에 소리 나게 내려놓은 후, 기연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다 마셨으니까 제 휴대폰 주세요.”
“남유인 씨.”
“얼른요. 약속하셨잖아요.”
얼어붙은 표정이 꽤나 단호하다.
뭐 하나 예상대로 따라주지 않는 유인 때문에 헛웃음을 지은 기연은 아쉽지만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려 재킷 안주머니에서 유인의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그녀에게 내밀자마자 재빠르게 빼앗겼다.
“갈 거예요?”
“네.”
“데려다줄게요.”
기연이 의자에서 일어나려 하자 아뇨. 단박에 거절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인은 어느새 룸 문 앞에 가 있었다. 이번엔 절대 잡히지 않겠다는 결연한 표현이라는 게 보였다.
뭐라 말리기도 전에 유인이 먼저 그를 가로막았다.
“하지 마세요.”
“뭘요?”
“그쪽이 하려는 모든 거.”
“…….”
“다시는 마주치지 않길 바랄게요.”
제발. 뒷말은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만으로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얼마나 빠르게 나갔는지 문이 채 닫히기도 전에 유인의 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허. 쟤 뭐야.
특별하단 말 한마디에 도망가 버린 유인이 어이없어서 허탈한 웃음을 픽 터트린 기연은 유인이 나간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본 후 중얼거렸다.
“뭐, 귀엽네.”
그게 다였다. 기연이 생각하는 유인은.
덕분에 어제, 오늘 심심하지 않고 재밌었네. 라고 덧붙이며.
그리고 기연 역시, 유인의 말처럼 다시 볼 일이 없으리라고 단정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