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그들의 발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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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들의 발화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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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들의 발화점
2023.05.17.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들이 지나가고, 어느새 4월이 되었다.
완연한 봄기운을 담은 바람은 훈훈하게 불고 푸릇하게 자라난 나뭇잎들과 만개하기 시작한 연분홍 벚꽃들이 캠퍼스를 가득 채운 봄날이었다.
어여쁜 벚나무 아래 데이트를 하는 커플들이 붐비고 삼삼오오 모인 인원들은 꽃놀이를 즐기며 모두들 봄을 좇기에 바빴지만 유인은 그들의 세계에서 빗겨난 사람처럼 초연했다.
벚꽃이야 매년 피는 거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 같은 게 뭐 대수인가. 그런 시니컬한 생각뿐이었다.
“유인아. 너 오늘 약속 있다고 그랬나?”
분홍 꽃잎이 옅은 바람을 타고 휘날리는 캠퍼스 길목을 같이 걷던 재희가 교양 수업 내내 졸고도 잠이 안 깨는지 소리 내 하품을 하며 물었다.
“응. 남유진이랑.”
심란하게 날아다니다 제 긴 머리칼에 달라붙은 성가신 꽃잎을 떼어내던 유인이 대답하자, 반쯤 감겨있던 고양이 같은 눈이 순식간에 반짝이며 소리쳤다.
“어. 나도 갈래!”
“안 돼. 너 오늘 촬영 있잖아.”
“아, 맞다. 나도 오랜만에 유진 언니 보고 싶은데.”
촬영 싫다. 작게 중얼거리는 재희는 짧은 시간에 푹 절여진 배추처럼 풀이 죽었다.
작년 어느 날, 연영과 학생이면서 연기는 제 길이 아니라고 선언한 재희는 모델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쇼핑몰이었지만 어느새 SNS에서 유명한 브랜드들의 대표 모델도 곧잘 맡아 하고 있는 재희는 요즘 업계에서 유명세가 한창이었다.
오늘 잡힌 일도 중요한 촬영이라고 들은 유인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푹 숙인 재희의 어깨를 두드렸다.
“티브이로 봐.”
“그거랑 같아? 아씨, 그냥 촬영 쨀까.”
“그러면서까지 오는 건 남유진도 원하지 않을 거야.”
“흠, 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언니 못 본 지 반년은 된 거 같은데.”
“그을쎄.”
고뇌하듯 콧잔등을 찡그리며 허공에 턱을 괸 모습에 유인의 입술에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혼자 심각하던 재희는 웃음소리를 듣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 나도 언니가 사주는 밥 먹고 싶다고!”
“그럼 내가 가서 영상 통화 켜줄게. 그거라도 봐.”
“뭐? 야, 남유인. 너 나 약 올리는 거지!”
유인보다 키가 큰 재희가 유인의 목에 팔을 휙 감고 아프지 않게 졸라댔다.
약 올리지 말라고 소리치는 재희의 목소리에 유인은 아이처럼 눈꼬리를 잔뜩 휘며 웃음을 터뜨렸다.
둘은 벚꽃이 휘날리는 길거리에서 한참이나 소란을 피우며 웃어댔다.
염세적으로 굴던 유인이 이토록 밝게 웃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건 가족을 제외하곤 딱 두 사람뿐이었다.
봄이 오든 말든 관심이 없는 유인에게 다른 건 필요 없었다.
고등학생 때부터 제 곁을 든든히 지켜주던 두 친구만 있으면, 정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았다.
****
“감사합니다.”
작게 인사를 한 유인이 택시에서 구르듯이 내렸다.
주변을 볼 새도 없이 입구 앞 계단을 마구 뛰어오르며 한재희를 원망했다.
진심으로 펑크 낼 생각도 없으면서 끝까지 징징대는 재희를 택시에 욱여넣고 나니, 이미 언니와의 약속 시간에 임박해 있었다.
잔소리는 이미 예견돼 있음에 포기한 유인은 언니가 예약했다는 식당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좀 늦을 거 같다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화가 났는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어서 오십시오. 예약하셨습니까?”
“헉……남, 유인이요.”
가쁘게 차오르는 숨을 다 가다듬지 못하고 이름을 알려주자, 명단을 확인한 직원이 이쪽으로 오라며 안내를 해주었다.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실내는 조용하고 안온했다.
따뜻한 우드색의 길이 쭉 이어진 길을 걷자 새하얀 조약돌 사이에 우뚝 선 대나무들이 있는 정갈한 중정이 보였다.
숨을 가라앉힌 유인이 정원 양옆으로 늘어선 문들을 두리번댔지만 도착지는 아니었는지 그들은 길을 따라 좀 더 걸었다.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문을 직원이 똑똑. 노크를 한 후 부드럽게 문을 밀었다.
안에는 10명은 족히 앉아도 될 원형 테이블에 지루한 듯 턱을 괴고 있는 남유진이 심통이 난 얼굴을 하고서 앉아 있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야?”
“미안. 메시지 보냈는데 못 봤어?”
못다 나온 산소를 후 뱉은 유인은 가방을 옆 의자에 대충 던져놓으며 앉았다.
인상을 팍 구긴 유진이 신경질을 내며 딱딱거렸다.
“메시지 보내면 늦어도 되냐?”
“재희가 달라붙어서 어쩔 수 없었어.”
“한재희? 데려오지 그럼.”
“어휴. 다음엔 나 빼고 둘이 만나.”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방금 전까지 귀에 딱지 앉도록 들은 말을 또 듣고만 유인이 성가시단 듯 손을 내저었다.
그러자 자신과 비슷한 얼굴이 인상을 쓰며 짜증을 냈다.
“어디 늦게 온 놈이 성을 내. 근데……너 옷은 왜 그래?”
“옷? 내 옷이 왜?”
유진이 해괴한 걸 본 사람처럼 한쪽 눈을 찡그리길래 바쁘게 오느라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던 유인이 제 옷을 내려다봤다.
아침에 입고 나온 면 스커트가 조금 구겨지긴 했지만 그거 말고는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였다.
“꼭……길거리에서 산 옷 같아. 내가 가져다준 거 안 입어?”
“대학생이 이 정도 입으면 됐지, 뭘 바라. 내가 언니처럼 연예인도 아닌데.”
“궁상떨지 말고 사다 준 거 열심히 입어. 가방도 좀 바꾸고.”
“내가 알아서 할게.”
“알아서 안 하니까 하는 말 아냐. 그 시계는 또 뭐야?”
또 시작이었다.
때마다 언니가 한 아름 안겨주는 명품은 부담스럽게 화려하기만 하고 영 유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취향이란 사람마다 차이가 있는 게 당연한데도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언니는 한결같이 변하지 않는 유인을 볼 때마다 참견하고 잔소리했다.
유인은 자기가 언니처럼 보여지는 직업도 아닌데 좀 놔두라며 화도 내봤지만 저 언니란 인간은 꿈쩍도 하지 않고 늘 저랬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인 유인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한 마디 더하면 나 그냥 간다.”
“뭐?”
“더 할 거야? 나, 가?”
“……좋은 거 아무리 사줘도 싫다는 건 아마 너밖에 없을 거다. 동생아. 아무튼 내 동생 참 별나다, 별나.”
“언니만 할까.”
얼굴 말고는 비슷한 데라곤 거의 없는 자매가 서로에게 절레절레하는 걸로 투덕거림이 끝이 났다.
그러고 잠시 후, 미리 주문을 해놨었는지 커다란 접시에 담긴 종류별의 요리들이 원형 테이블 위를 가득 올라오면서 식사가 시작됐다.
둘이 먹기엔 한없이 많은 양을 시켜놓은 언니는 애초에 약속 장소가 이런 고급 중식당이란 언질도 주지 않았다.
짬뽕 먹으러 가자며 주소만 딸랑 보내놨길래 평범한 중국집에 가는 줄 알았더니.
유인이 칠리 새우를 깨작대는 동안, 유진은 얼마 전 촬영을 막 끝낸 드라마 얘기와 뒷말에 늘 빠지지 않은 제 소속사 이사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얼마 전엔 새 드라마 들어가는 줄 알았더니 이사님이 자기 맘대로 먼저 깠다는 거야.”
“그래? 언니는 하고 싶었던 거야?”
“엄청 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스토리가 나쁘진 않았어. 그래서 내가 왜 깠냐고 물어보니까 이사님이 뭐랬는 줄 알아?”
“뭐랬는데.”
“내 자리가 아니래. 그 드라마 망할 거라고.”
유인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려놓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턱을 괴었다.
“그 이사님 뭐 예언가 겸업이야?”
유진이 목젖까지 보일 정도로 입을 벌리며 크게 깔깔 웃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저번에 말했잖아. 성격이 개차반에다 거지 같긴 한데 감이 진짜 좋다고. 근데 아무리 그래도 망할 거라고 단정 지었던 건 없었거든?”
“흠.”
“그렇게까지 말하니까 나도 찝찝하잖아. 망할 드라마에 들어가고 싶은 배우가 어딨냐.”
“그렇지.”
“그래서 그거 안 하기로 하고 나니까 시간이 좀 비었어. 그랬더니 이번엔 또 예능이나 해보라네? 망할 인간이. 내가 극혐하는 거 알면서.”
칭찬인지 욕인지 헷갈리는 언니 이야기를 죽 듣던 유인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장장 한 시간이나 이어진 예의 그 이사님 얘기는 낙하산으로 회사에 입사했다는 3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야 슬슬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참을성 있게 언니의 푸념 같은 투정을 들으며 타이밍을 재던 유인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나 화장실 좀.”
“어. 이제 아이스크림 먹으러 가자.”
“또?”
시켜놓은 거 하나도 안 먹어놓고 무슨 아이스크림을 또 먹는다는 건지 인상을 헝클인 유인이 반문하자 유진은 토 달지 말라는 듯 앙상한 팔을 휘휘 흔들었다.
저번처럼 무슨 호텔로 끌고 가서 다 먹지도 못할 비싼 젤라토를 잔뜩 시킬 게 뻔했다.
언제부터 저렇게 돈을 못 쓰면 안달이 나는 사치병에 걸렸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한숨을 쉰 유인이 슬라이드 도어를 열었다.
언니와 있던 방이 워낙 깊숙한 곳에 있어서 복도를 좀 걸어 나오자 실내만큼이나 산뜻하게 꾸며진 화장실이 보였다.
손을 씻은 유인이 제 언니가 이상하다고 했던 옷을 거울로 다시 살폈다.
“괜찮기만 하고만. 괜히 시비야.”
구겨진 치마를 툭툭 털며 입을 삐죽대던 유인이 화장실 입구로 나올 때였다.
막 화장실로 들어오던 남자와 어깨가 살짝 부딪혔다.
“아. 죄송합니다.”
“네, 네. 괜찮습니다. 네.”
사과를 건네자 술에 취했는지 남자는 어눌하게 대답했다.
재희의 생일 이후 알코올에 관련된 모든 걸 멀리하던 유인은 그를 제대로 보지 않고 재빠르게 등을 돌렸다.
“어? 잠시, 저기요!”
서너 걸음 가다가 붙잡힌 유인의 미간이 저절로 조여들었다.
천천히 고개를 뒤로 돌리자 알코올에 절여진 눈동자가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 얼굴 좀.”
“……네?”
“얼굴 좀 볼게요. 얼굴.”
이상하게 주절거리던 남자가 천천히 다가왔다.
가까워질수록 진한 술 냄새가 훅 풍겨오며 불쾌한 소름이 온몸을 내달렸다.
유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 나왔다.
“왜 이러세요?”
“아니. 남유진이랑 엄청 닮았다는 소리 안 들어요?”
“네. 안 듣는데요.”
“어, 아닌데. 진짜 닮았는데요! 혹시 연예인이에요?”
“하, 저기요. 술 취하셨으면 곱게 들어가세요.”
“그게 아니라. 저기, 잠시만요!”
왜 대꾸를 해줬을까. 그냥 무시했으면 됐을 것을.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유인이 짧은 후회를 마치고 뒤를 돌았지만 얼마 가지 못하고 손목이 꽉 잡혀버렸다.
술에 취한 사람의 체온은 기분 나쁘게 뜨끈했고 땀까지 배어 있는 척척한 손바닥이 닿은 피부는 죽어가는 것처럼 불결했다.
당황스러운 비명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뭐, 무슨! 왜 이러세요. 진짜!”
“잠깐만!”
팔을 빼내려는 사람과 붙잡으려는 힘이 실랑이를 했다.
그 단 몇 초가 정말 길게 느껴진 유인은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순식간에 엄습한 두려움이 뇌를 강타했다.
어쩌지. 어떡하지. 하필 이 고요한 복도는 사람도 없었다.
안간힘을 쓰며 팔을 당기는데, 별안간 뒤통수가 벽처럼 단단한 무언가에 툭 닿았다.
뭐지. 분명 자신의 등 뒤는 뻥 뚫리고 개미 한 마리 없는 텅 빈 복도였는데.
화들짝 놀란 유인이 고개를 휙 돌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이죠.”
그녀의 머리 위에서 얼음장같이 차가운 저음이 들렸다.
자신의 머리에 닿았던 무언가의 정체를 확인한 유인은 방금까지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도 잊은 채 흐읍. 하고 산소를 머금은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늘씬한 몸에 딱 맞는 슈트를 입고 거만하게 턱을 살짝 치켜든 남자는 제 가슴에 기대 눈을 떼지 못하는 유인에게만 보이게끔 희미하게 눈으로만 웃었다.
아.
어떻게 이런 악몽 같은 일이 연달아 일어날 수 있을까.
망연자실한 입이 벌어진 채 다물어질 줄 몰랐다.
몇 주가 지나는 동안 제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정리 돼 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유인은 그를 보자마자 누군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바로 클럽에서 만났던 그 이상하고 수상한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