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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의 정체 (6/13)


6. 그의 정체
2023.05.20.



 


“아, 이사님! 이 사람 남유진 씨랑 엄청 닮지 않았어요? 너무 신기해서 제가…….”

곧 죽어도 빠지지 않을 거 같던 팔이 등 뒤 남자의 간결한 동작으로 탁- 떨어져 나갔다.

그러자 초점도 없이 기분 나쁘게 웃던 취객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어렴풋한 불쾌감을 풍기는 남자가 술 취한 이를 보면서 무감하게 말했다.


“어딜 잡고 있는 겁니까.”

“예? 아니. 잠깐 얘기 좀 하자는데 도망을 가서요.”

“요즘 같은 세상에 싫다고 도망가는 사람 맘대로 붙잡으면 경찰에 끌려갑니다. 아실만한 분이.”

얼결에 사이에 끼게 된 유인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는 두 사람을 보고 어리둥절함을 감추지 못했다.

어디선가 불쑥 솟아난 남자의 출연도 황당한데 주정뱅이와 일행으로 보이는 이 벼락같은 우연은 또 뭘까.

어쩌다 보니 당혹스럽게도 둘 사이에 끼게 된 유인이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이, 남자의 시선이 허공을 헤매고 있는 유인의 시뻘건 손목에 닿는가 싶더니 미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이윽고 매끈한 입술에서 날카로운 저음이 흘러나왔다.


“안에서 감독님이 찾으시던데요. 가보세요.”

“네? 지금요? 아, 그럼 화장실을 좀 갔다가-.”

“아뇨. 지금 당장 불러오라고 하셨습니다. 많이 취하셔서 얼른 가보는 게 좋을 거 같던데요.”

“어, 아. 네, 알겠습니다……그럼.”

명령 같은 강경함에 술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 꼼짝하지 못하고 대답을 했다.

자리를 뜨기 전 장신의 남자와 붙어 있는 유인을 힐끔 본 그가 죄송합니다. 사과를 건네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사라졌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사라져갈 때쯤이 돼서야 긴장에 둘러싸여 있던 유인의 목에서 한탄 같은 한숨이 나왔다.

순식간에 힘이 빠져 비틀거리는 몸을 뒤에서 단단하게 지탱하고 있는 남자 덕분에 유인은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남유인 씨. 괜찮아요?”

“…….”

“남유인?”

“……그건 반말인데요.”

뒤늦은 볼멘소리를 내자 덩달아 굳었던 남자의 표정에 미소가 살짝 피어났다.


“남유인 씨는 내가 볼 때마다 곤경에 처해 있네요. 왜 그럴까.”

유인은 슬며시 웃는 남자에게 되레 묻고 싶었다.

왜 자신에게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짠하고 나타나서 해결해 주는지. 왜 갑자기 나타나서 기억 저편에 다 묻어버린 제 기억을 다 헤집어 놓는 건지.

그러나 긴장으로 바싹 말라버린 입이 제때 답하지 못하자 남자는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안다는 듯 희미하게 웃으며 유인을 빤히 바라봤다.

얼굴을 천천히 쓰다듬듯이 지나간 까만 눈동자가 얇은 어깨와 팔을 타고 손목까지 내려갔다.


“손목은 어때요. 많이 부은 거 같은데.”

“……괜찮아요.”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 정돈 아니에요.”

“정말요?”

남자는 마치 어제 만나고 헤어진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화를 이끌어서 유인도 얼떨결에 휘말려 대답을 곧잘 했다.

그걸로 모자라 유인이 쓰러지지 않도록 감싸 준 커다란 손이나, 등으로 전해지는 뜨끈한 남자의 체온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위화감을 느낄 틈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유인은 놀랐던 심신이 조금씩 진정돼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아주 묘하게도 자신이 이 남자에게서 위안을 얻고 있다는 것도.

그 불편한 사실을 깨달은 유인이 거의 안기다시피 한 몸을 바르작거리기 시작했다.


“네. 그러니까 이제 이거 좀, 놔 주세요.”

그러나 남자는 유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풀긴커녕 더 꽉 잡아오며 고개를 그녀 쪽으로 기울였다.


“진짜 괜찮은 거 맞아요? 얼굴이 완전 하얗게 질렸는데.”

유인은 작게 끄덕였다. 대답을 했음에도 탐탁지 않은 듯 미간을 접은 남자가 점점 더 가까워져서 유인은 최대한 물러났지만 그래봤자 그의 품 안이었다.

진퇴양난에 빠져 이러지도 못하는 유인을 살피던 남자가 갑작스러운 제안을 했다.


“잠깐 같이 가죠.”

“네? 어디를, 지금요?”

대답을 들으려던 게 아니었던지 못 들은 척 무시한 남자가 유인을 뒤에서 밀어내며 걸었다.

운동화가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나아가던 남자가 얼마 안 가 보통의 룸과 색이 다른 문을 드르륵 열어젖혔다.

그러자 식사하는 공간이 아닌, 깨끗하게 잘 꾸며진 대기실 같은 방이 나오고 유인은 자의와 상관없이 들어가야 했다.


“아니, 잠시만! 여기 어디……뭔데요!”

“앉아요.”

아무렇게나 뺀 의자에 유인을 앉히고 일어나지 못하게 어깨를 꾹 눌렀다.


“지금 남유인 씨 얼굴 당장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니까 앉아서 진정 좀 해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어요.”

“뭔 소립니까. 내가 구해줬으니 끝까지 책임져야죠.”

제 어깨를 누르며 허리를 숙인 남자는 아까처럼 반반한 얼굴을 들이밀며 유인을 가로막았다.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곧은 눈썹이 위로 까딱거리는 걸 본 유인은 결국, 반쯤 일으켰던 몸에 힘을 빼면서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너무 놀라고 경직됐던 탓에 제대로 걸을 힘이 없는 건 사실이었다.

어처구니없게 다시 마주하게 된 남자와 단둘이 있는 공간이 심히 거슬리긴 하지만 잠깐은 괜찮을 듯싶었다. 아까 그 사람처럼 피해를 줄 사람은 아니라는 기묘한 믿음이 조금 생긴 터였다.

그리고 이 꼴로 언니에게 돌아갔다간 자기가 누군지도 잊어버리고 흥분해서는 동생을 이렇게 만든 놈을 잡겠다며 소란 피울 모습을 잠시 상상하자 소름이 다 돋았다.


“필요한 건 없어요?”

제 휴대폰을 조작하던 남자가 무심하게 물었다.


“네. 저 혼자 있다 가도 되니까 돌아가셔도 돼요.”

“여긴 누구랑 왔어요.”

불만이 섞인 가느다란 소리에 생뚱맞은 질문이 돌아왔다.

힘없이 눈을 굴리던 유인은 답을 망설였지만 무던한 얼굴에는 별 뜻이 없는 듯해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언니요.”

그러자 작은 화면을 보던 남자가 깊이를 알 수 없는 새까만 눈이 유인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둘이?”

“네.”

“식사는 다 했어요?”

“네.”

“그럼 이제 집으로 가요?”

“아닌……근데 왜 저번부터 자꾸 취조를 하세요?”

저도 모르게 착실하게 대답하고 있던 유인이 뒤늦게 깨닫고는 슬쩍 짜증을 냈다.

그러자 볼일을 다 봤는지 들고 있던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대충 던져놓은 남자가 늘씬한 눈을 휘며 싱긋 웃었다.


“그러게 왜 꼬박꼬박 대답해요. 더 물어보고 싶게.”

“그게 제 탓이에요?”

“그럼 내 탓입니까?”

“그쪽이 안 물어보시면 되잖아요.”

“싫으면 남유인 씨가 대답하지 말든가.”

이게 뭐 하자는 건지. 유인은 흡사 초등학생처럼 구는 남자가 어이없어서 코웃음을 치며 체념했다.

생겨난 믿음과 별개로 제멋대로 구는 걸로 모자라 말도 통하지 않는 남자는 상대하면 할수록 제 손해였다.

얼른 힘을 잃어버린 다리가 정상으로 돌아오길 바라며 제 무릎을 내려다보는데 그리 재밌는지 입꼬리에 미소가 떠나질 않던 남자가 불쑥 물었다.


“남유인 씨는 궁금한 거 없어요? 난 다 대답해 줄게요.”

“없어요.”

“음, 왜 없을까요. 우리 벌써 세 번이나 만났는데.”

냉랭한 목소리에 실망이라도 한 거처럼 들리는 말에 눈만 굴려 쳐다보자, 들리는 거와 다르게 완만한 입술 곡선은 딱히 기분이 상하거나 나빠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종잡을 수 없어서 참 이상하고 기묘한 남자였다.

둘 중 뭐가 그의 진심인지 알 수가 없던 유인은 그것마저 물음표로 남겨놓기로 했다.

봄이 지나가는 동안 깊숙이 묻어놓은 곳에서 이따금씩 깨어 나오려 했던 저 남자의 존재처럼 말이다.

불행하게도 오늘 한 번 더 우연처럼 만나긴 했지만, 분명 이걸로 끝일 테니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도 모르고 그냥 그렇게 서로에게 아무것도 아닌 거로 남고 싶었다.

이런 유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피해 고개를 돌린 작은 머리를 장난스럽게 웃으며 바라보던 남자가 어깨를 잡은 손을 떼고 테이블에 살짝 걸터앉으며 나지막이 말을 걸었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뭐 하고 지냈는데요.”

“그냥, 학교 다니고…….”

“대학교? 어딘데요.”

“선현대요.”

거기까지 말했을 때 유인은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깨달았다. 또 묻는 말에 성실히 대답하고 만 것이다.

아. 외마디를 내며 불안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자 남자는 우스워 죽겠는지 새까만 눈을 잔뜩 빛내며 소리 내 웃었다.

유인은 듣기 좋은 낮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민망함에 화끈해진 얼굴을 숨기려고 고개를 팩 돌렸다.


“화났어요?”

“아뇨.”

“그럼 얼굴 좀 봐요.”

“왜요? 싫어요.”

단호하게 거절하는 음성은 지금껏 했던 말 중 제일 또렷했다.

그 뒤로 남자가 대꾸하지 않아서 실내는 숨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해졌다.

그렇게 기척도 없이 있던 남자의 길쭉한 손가락이 별안간 다가와 유인의 턱 끝을 부드럽게 쥔 채 끌어당겼다.


“싫기는.”

“아, 진짜-.”

 

 
예고 없던 스킨십에 화를 내며 뿌리치려던 유인은 일순 멈칫거렸다.

남자의 머리 바로 위를 비추고 있는 밝은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셔 일순 앞이 보이질 않았다.

점점 시야가 회복되면서 남자의 흐트러짐 없는 베스트와 넥타이가 보이고 느른한 미소를 걸친 얼굴이 선명해졌다.

왜 웃고 있는 건지 의문은 찰나에 사라지고 오래도록 공들여 만든 작품 같은 조화로운 이목구비가 눈에 가득 들어찼다.

나른하게 내리깐 눈꺼풀 아래 조용히 빛을 내는 흑요석 같은 눈동자에선 피할 수 없도록 만드는 알 수 없는 힘마저 느껴졌다.

홀린 것처럼 수 초간 눈만 깜박이는 유인의 열 오른 뺨을 차가운 손길이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유인 씨 열나네요.”

가라앉아서 살짝 허스키해진 저음이 귓가에 눅진하게 달라붙었다.

평이한 음성과는 다른 낯선 이질감에 퍼뜩 정신을 차린 유인은 적잖이 당황했다.

또 그때와 같은 상황이었다. 새벽의 가로등 불빛 아래, 어울리지 않게 활짝 피어난 미소에 홀랑 넘어간 그날처럼.


“왜 남의 얼굴은 만지고 그래요?”

번뜩이는 위기감에 날카롭게 말하며 손을 휙 밀어내자, 남자는 손쉽게 떨어져 나갔다.

불만스럽게 남자를 한 번 노려보고 고갤 돌려버린 유인은 밑바닥부터 스며드는 불안함에 입술을 꾹 물었다.

이 남자와 있으면 지금껏 곧게만 뻗어가던 직선이 조금씩, 조금씩 계속 어긋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유인에게 있어 그건, 매우 치명적이고 좋지 않은 징조였다.


“이제 좀 괜찮은가 보네.”

“아까부터 괜찮았어요.”

퉁명스러운 말에도 남자의 눈가엔 은은한 웃음기가 계속 서려 있었다.


“손목은 내일 상태 보고 병원 가 봐요.”

“이 정도는 안 가도 돼요.”

“장담하지 말고. 남유인 씨가 의사도 아닌데.”

껄렁대던 말씨가 순간 엄하게 들렸지만 유인은 그를 보지 않았다.

소심한 불만 표시를 물끄러미 보던 남자는 소리 없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제 가죠. 유인 씨 언니가 기다릴 거 같은데.”

듣던 중 반가운 말에 유인은 말없이 벌떡 일어나 대기실 같은 방을 빠르게 걸어 다소 거칠게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유인을 따라 나온 남자는 복도를 나란히 걷는 내내 조용했다.

휴대폰도 두고 나와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알 길이 없어 유인이 발걸음을 재촉하자, 조금씩 앞서나가는 유인을 가만히 따라오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남유인 씨. 오늘도 고맙다는 말 안 할 겁니까?”

“…….”

“진짜 안 하네.”

“……감사합니다.”

제대로 눈도 맞추지 않은 채 대충 건네는 인사를 받으면서도 남자는 유려한 눈꼬리를 접으며 씩 웃었다.


“근데 이제 말로는 안 갚아지는데 어쩌죠.”

“네?”

유인은 존재 자체도 황당함이고, 손톱 사이 거스러미처럼 계속 거슬리는 말만 하는 남자를 향해 뚱한 얼굴을 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을 가볍게 웃으며 넘긴 그는 재킷 안주머니에서 무언갈 꺼내 유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정말 고마우면 연락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말도 제대로 끝맺지 않은 유인은 살짝 인상을 쓰며 제 손바닥에 있는 연한 쪽빛의 작은 쪼가리를 들여다봤다.

그리고 곧, 커다란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작고 빳빳한 종이를 뚫어지도록 보며 한껏 놀라 있는 유인을 본 남자는 눈을 찡그리며 웃더니 굳어 있는 어깨를 감싸듯 툭툭 두드렸다.


“꼭 해요. 유인 씨한테 할 말도 있으니까.”

“…….”

“갑니다. 다음에 봐요.”

유인은 뚜벅거리며 멀어지는 남자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가 제게 안겨 준 작은 명함 때문에.

아까부터 눈을 뗄 수 없는 푸른빛의 빳빳한 종이에는 멋들어진 필기체로 회사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회사 이름은 유인이 너무도 잘 아는 곳이었다.

일랑 엔터테인먼트 전무이사 도기연.

일랑 엔터는 유인의 언니, 남유진의 소속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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