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너를 부르는 쪽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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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너를 부르는 쪽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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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너를 부르는 쪽빛
2023.05.24.
유인은 뿌리가 박힌 사람처럼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빠르게 깜빡이는 눈은 아까부터 작은 종이에 박혀 들어 몇 글자 되지 않는 글씨를 읽고 또 읽었다.
자신이 잘못 읽었을까 봐, 잘못 이해했을까 봐.
그러나 정갈하게 인쇄된 활자는 제가 처음에 본 그대로였고, 아무리 다시 봐도 그대로였다.
일랑 엔터테인먼트의 이사. 그 옆에 당당하게 박힌 이름 석 자.
“하…….”
허탈한 숨을 뱉은 유인은 복도에 머리를 툭 기댔다. 갈 곳 잃은 눈길이 허공을 마구 헤맸다.
유인은 오늘 구세주처럼 나타난 남자를 봤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지금까지 저를 도와준 사람이 언니네 소속사 이사님이라니.
그제야 수상하고 기이하게만 보였던 남자의 행동이 하나둘씩 이해가 갔다.
술에 취한 자신을 무방비하게 차에서 재우고, 휴대폰을 핑계로 불러내 이상할 정도로 꼬치꼬치 캐묻거나 저를 대할 때 묘하게 익숙해 보이고 유들대던 태도들.
하. 유인의 입에서 어이없는 한숨이 다시 터졌다.
“……다 알고 있었나.”
그건 분명 유인이 남유진의 동생이란 걸 아는 사람의 행동들이었다.
그걸 알아서 자신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서슴없이 넘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거였나 보다.
소속 배우 가족이라 도와주고 호의를 베풀어 준 건데, 거기다 대고 가시 가득 세우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경고나 해댔으니, 듣고서 그 남자가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을까.
유인은 아까보다 더 진한 열꽃이 핀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진짜 쪽팔리고 창피한 와중에, 남자가 떠나기 전 했던 말이 떠올랐다. 할 말이 있으니 꼭 연락하라는 말.
뭐 때문에 연락하라고 하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정말로 감사 인사로는 부족해서? 지금까지 유인이 했던 말들이 기분 나빠서 한소리 하려고?
수상한 의중에 골몰하던 때, 불쑥 남자의 서늘한 체온이 쓸고 지나간 살갗이 유난히 불에 타는 것처럼 화끈거려 뺨을 만지작거리던 무렵이었다.
“남유인! 너 여기서 뭐 해?”
캡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을 다 가리는 마스크를 한 여자가 복도 벽이 쨍하게 울리도록 소리쳤다.
멍한 눈빛으로 얼굴을 만지고 있던 유인이 커다란 소리에 흠칫 어깨를 떨며 돌아봤다.
“화장실이 여기야? 하도 안 와서 나와 봤더니, 눈빛은 왜 맛이 갔어.”
“……언니.”
“얼굴은 왜 만져대. 뭔 일 있었어?”
유진이 성큼성큼 다가와 유일하게 밖으로 드러난 눈동자로 부지런히 유인의 몸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살짝 굳은 유인은 손이 꽉 쥐고 있던 명함을 보이지 않게 손안으로 말아 넣으며 중얼거렸다.
“배가……배가 아파서.”
“배가?”
“응. 화장실 갔다 왔는데 갑자기 아파서 쉬고 있었어.”
유인은 자신이 왜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 모른 채 말하고 있었다. 그저 반사적으로 남자가 준 명함을 숨긴 후부터 왠지 그래야 할 거 같았다.
“어떻게 아픈데? 병원 갈까? 별로 먹지도 않아 놓고 배가 왜 아파.”
동생의 아프다는 말에 진지하게 걱정 모드로 들어간 유진이 뭘 먹은 거 같지 않은 유인의 배를 살살 만졌다.
그러게, 들릴 듯 말 듯 읊조린 유인은 주먹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그러자 꾸깃꾸깃해진 종이처럼 제 마음 어딘가도 펴질 수 없도록 잔뜩 구겨진 거 같았다.
응급실이라도 가야 하는 거 아니냐며 닦달하는 언니를 간신히 달래 식당을 나오자 매니저 없이 혼자 온 언니가 집에 데려다준다며 주차장으로 이끌었다.
그러자 웬 새파란 코발트색 스포츠카가 서 있어서 1차로 경악하고 꾸르릉- 거친 소리를 내며 시동이 걸렸을 때 2차로 멘붕이 왔다.
뭐든 요란하고 화려한 걸 좋아하는 남유진은 뭐든지 튀고 싶어 하는 본능을 이렇듯 감추질 못했다.
“이 차는 또 언제 샀어?”
“얼마 전에. 이번 드라마 스케줄 너무 빡세서 스트레스 받았거든. 뭐라도 안 지르곤 못 배길 만큼.”
“그렇다고……차를 사네.”
“왜. 너도 사줘?”
“아니. 면허도 없는데 뭔 차야.”
“따면 되지.”
“싫어.”
아직 학생이라 필요도 없거니와 면허를 따면 언니는 분명 본인 취향에나 맞는 비싼 차를 떠안길 게 너무 빤했다.
뭐든 해주고 싶은 언니의 마음이야 잘 알았다만 정도를 모르는 남유진한테는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놔야 했다.
제 언니를 찝찌름하게 살핀 유인이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옆을 지나가는 차들을 무의미하게 보던 유인은 문득 마구 쑤셔 넣어둔 명함을 떠올렸다.
그리고 아까 하던 고민이 마저 딸려 들어왔다.
그러자 할 말이란 게 혹시나 언니와 관련된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싫다는 이성을 계속 부추기고 있었다.
그때, 순간적으로 번쩍이며 지나간 한 가지 가정이 유인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언니가 저를 볼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던 뒷말의 주인공. 어느 날 낙하산을 타고 날아와 제 입맛대로 회사를 온통 뒤집고 나서 초고속 승진을 했다던 바로 그 사람.
유인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침을 꿀꺽 삼킨 후 언니에게 물었다.
“언니, 있잖아. 아까 얘기한 그 이사님.”
“응. 왜?”
“그 이사님……몇 살이라고 했지?”
유진은 뜬금포 같은 질문에 설핏 미간을 구겼다가 금방 펴내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서른하나.”
자신이 방금 만난 남자도 얼추 그 정도 돼 보인다는 불길함이 깃든 짐작에 또 물었다.
“이, 이름은?”
“이름? 도기연. 그건 갑자기 왜 묻는데?”
“아……아니야. 그냥 궁금해져서.”
“그게 왜 궁금해? 너 배 아프다고 한 거 꾀병이지.”
“아니. 진짜야.”
유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을 하는 언니에게 최대한 아픈 척 인상을 썼다.
연기자 앞에서 연기를 하려니 숨 막히는 자괴감에 죽을 거 같았다.
다행히도 언니는 미심쩍은 눈빛을 금방 거두며 가다가 약국이라도 들르자 했고, 유인은 알겠다고 냉큼 대답한 후 고개를 창문 쪽으로 휙 돌렸다.
그러자 참았던 좌절감이 밀물처럼 차올랐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언니가 말하던 이사님과 자신이 만난 남자가 동일인물이란 걸 알게 된 유인은 앞이 아찔해졌다.
입술을 짓씹으며 언니에게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약국 앞이어서 약을 사고, 뭐라고 말을 시작할지 입을 달싹이다 보니 벌써 집 앞에 도착해 내릴 시간이었다.
“얼른 올라가서 약 먹고 자. 엄마 아빠한테 안부 전해주고.”
“바로 가게?”
“응. 나 보면 엄마 또 잔소리해.”
유진이 바싹 말라 얄팍한 팔뚝을 귀찮다는 듯 내저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차에서 내리기 전, 잠시 망설이던 유인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발을 디뎠다.
시끄러운 배기음이 저만치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서 있던 유인은 복잡함이 가득한 눈으로 시퍼런 차 뒤꽁무니가 아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
명함 사건이 발발하고 주말 동안, 유인은 몇 번이나 언니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들었다가 그냥 내려놨다.
쉽게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남자에 대해 얘기하려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만났는지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럼 유진은 제 동생에게 사정을 듣는 거로 모자라 유인을 그 지경으로 놔둔 재희는 물론 지한까지 불러다 설교를 할 성격이었다.
그럼 당연히 아무것도 몰랐던 친구들까지 유인이 숨겼던 사실을 알게 될 거고 유진으로 모자라 친구들의 후폭풍까지 다 유인의 차지가 될 터였다.
그렇게 매우 번거롭고 성가시고 거추장스러워지는 건 제발 사양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주말이 지나고 아침에 일어나 학교 갈 준비를 하면서, 학교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도, 오후까지 이어진 강의를 다 듣고 나서 지한과 저녁을 먹으러 가면서도 끊어지지 않는 생각이 줄줄이 이어졌다.
“유인아 뭐 먹으러 갈래? 먹고 싶은 거 있어?”
“…….”
“너 저번에 돈가스 먹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저번에 못 갔던데 가볼까?”
“…….”
“남유인?”
유인은 저를 부르는 소리에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주말 내내 너무 곱씹었던 탓인지 비슷한 억양의 낮고 살짝 허스키한 음성이 별안간 겹쳐 들렸기 때문이었다.
유인의 과한 반응에 더 놀란 지한의 휘둥그레 하게 떠진 눈동자엔 의아함이 떠다녔다.
“왜 그렇게 놀라?”
“어, 어? 아냐. 왜 불렀어?”
“뭐 먹고 싶냐고 계속 물어봤잖아. 대답 안 하더니 이름 부르니까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놀라고. 왜, 학과 애들이 또 이상한 얘기 하고 다녀?”
지한이 고운 눈매를 찡그리며 물었다.
본인의 의지로 ‘자발적 아싸’ 생활을 4년째 이어온 유인을 둘러싼 말도 안 되는 소문은 수그러들 만하면 퍼지고, 가라앉을 틈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 행사는 물론 동기, 선배 할 거 없이 누구와도 이렇다 할 교류를 하지 않으면서 연영과 스타 재희와, 선현대 아이돌이란 별칭을 달고 다니는 지한과는 친하게 지내니 다른 이들 눈엔 그게 눈엣가시고 꼴불견이란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저를 따라다니는 발 없는 말을 모를 리 없는 유인은 이제 남유진 얘기만 아니면 크게 신경 쓰지 않는데 지한은 항상 마음이 쓰이는지 가끔 물었다.
유인은 그 내용이 아니라고 고개를 붕붕 흔들고선 말했다.
“아니……그, 지한아.”
“응. 말해.”
흰 피부에 잘 어울리는 밝은 라임색 얇은 니트를 입은 지한은 걷던 것도 멈추고 유인을 빤히 바라봤다.
갑자기 길 한 가운데 멈춰선 둘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고 지나갔다.
요즘 유독 진지한 빛을 띠는 일이 많은 지한의 옅은 눈동자는 무엇이든 다 들어주겠단 말을 하고 있는 거 같았다.
유인은 커다란 키에 순하고 유한 얼굴을 한 지한을 보고 불쑥 대형 강아지가 사람이 된다면 이런 모습일까. 하는 우스운 상상을 하다가 하려던 말도 잊고 설핏 웃고 말았다.
“말하다 말고 갑자기 왜 웃어? 오늘 좀 이상하네.”
지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왜 그러냐고 계속 묻자 팔을 끌고 다시 걷기 시작한 유인이 입을 열었다.
“너는 망설여지는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
“망설여지는 일? 고민 같은 거?”
“응.”
“왜. 너 고민 있어? 뭔데?”
“아니……내가 있다는 게 아니고 넌 어떻게 하냐고 물어본 거야.”
지한은 그 말이 그거 아니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유인을 쳐다봤지만 대답이나 하라며 잡고 있던 팔을 툭 치자 잠시 생각하는지 지한의 시선이 짧게 허공을 봤다가 되돌아왔다.
“그 고민이 뭐냐에 따라 달라질 거 같은데. 예를 들어줘봐.”
“음……가기 싫은데 가야 할 것도 같고, 아닌 거 같기도 한 거.”
간단하고 두루뭉술하지만 가장 직관적인 말이기도 했다.
어깨를 가볍게 으쓱한 지한이 듣자마자 금방 답을 내놓았다.
“그럼 가봐야지. 안 가보고 후회하면 깨끗하게 끝맺음 한 거 같지 않잖아.”
“아…….”
“간다고 내가 손해 보거나 하는 거 아니면 가는 게 낫지 않을까.”
하나도 어려울 거 없이 싱긋 웃으며 말하는 지한을 보며 유인은 주말 동안 제가 했던 어둑한 고뇌가 맑게 개는 걸 느꼈다.
자신이 생각으로만 했던 걸 타인의 입에서 들으니 명쾌한 해답처럼 들렸다.
그 남자를 만나서 자신이 손해 보는 건 없었다. 오히려 도움을 계속 받아서 껄끄럽고 더 엮이기 싫은데 자꾸 마주쳐서 부담스럽고 불편할 뿐.
하지만 또 이대로 무시하자니 언니가 이사님 얘기를 할 때마다 괜스레 신경이 쓰일 거였다.
지한이 말한 대로 만나서 할 말이란 걸 듣고 나면 언니에게 굳이 말하지 않아도 깨끗한 끝맺음을 할 수 있을 테니, 지금에선 최선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삽시간에 속이 후련해진 유인은 지한의 팔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 감탄으로 빛나는 눈으로 지한을 올려다봤다.
“너 똑똑하다.”
“이제 알았어?”
잡힌 팔을 스르르 놓게 만든 지한은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하며 귓속말하듯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그러니까 오늘은 저번에 대기 많아서 포기했던 돈가스 집에 가보는 건 어때.”
“그래!”
잔뜩 꼬여 있던 속이 후련해진 유인이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며 대답하자, 귀여워 죽겠다는 눈빛의 지한이 소리 없이 웃었다.
커다랗고 온기가 스민 손이 동그란 뒤통수를 마구 쓰다듬는데도 유인은 너무 익숙해진 손길은 신경 쓰지 않고 휴대폰으로 길을 찾고 있었다.
도착한 경양식집은 예전처럼 대기 줄이 길었고, 이번엔 포기하지 않은 두 사람은 한참을 기다려서야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자리를 잡았어도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까지 오래 걸려서 둘 사이에 잡다한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재희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거 같아.”
“그러게.”
“요새는 얼굴 보기도 힘들고.”
“시끄러운 애 없으니까 좋기만 한데.”
“윤지한. 너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 허전하지? 나보다 너희 둘이 더 친하잖아.”
지한은 뭔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눈살을 한껏 찌푸렸다.
“그런 소름 끼치는 소리 하지 마. 그리고 우리 사이에 누가 더 친하고 그런 게 어딨어.”
진심으로 짜증을 실은 목소리여서 유인은 푸흐흐 소리를 내며 웃었다.
비슷한 류의 시답잖은 소리가 더 오가자 드디어 음식이 나왔다. 돈가스를 잘게 썬 지한은 당연하게 유인의 접시를 바꿔주었다.
오랜 기다림 탓에 굶주렸던 둘은 한동안 말없이 먹기만 하다가 지한이 먼저 입을 뗐다.
“아, 맞다. 유인아 나 SJ호텔 식사권 있는데 날 잡아서 같이 가자.”
“SJ? 어디서 났어?”
“설에 알바하고 받았는데 서랍에 넣어놨다가 이제 발견했어.”
“아. 그때 재희랑 같이 촬영했을 때?”
“응. 기억하네.”
별생각 없이 알았다며 주억거리던 유인이 재희는? 하고 묻자, 떨떠름하게 웃던 지한은 걔도 같이. 라고 하며 물을 마셨다.
좋다고 또 방긋 웃는 유인에게 지한은 눈을 휘며 마주 웃었다.
일랑 엔터 이사라는 남자가 유인에게 명함을 준 지 일주일이 되기 딱 하루 전 날의, 기분 좋은 저녁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