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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벚꽃 좋아해요? (9/13)


9. 벚꽃 좋아해요?
2023.05.31.


마이크를 통해서 나오는 단조로운 음성을 들으며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은 노트북과 앞을 번갈아 보고 있을 때였다.

노트북 옆에 놓여있던 휴대폰 액정에 소리 없이 불이 들어와 유인의 눈이 일순 그쪽으로 쏠렸다.


[유인아. 오늘도 도서관 갈 거지?]

화면 상단에 지한이 보낸 메시지가 떠 있다가 사라지려는 찰나,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네 자리 맡아 놓을 테니까 수업 끝나면 2열람…….]

뒤가 잘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어떤 내용인지 충분히 짐작 가능했다. 시험 기간이니 먼저 수업이 끝난 자신이 도서관에 먼저 가서 자리를 맡아놓겠단 얘기였다.

유인은 열변을 토하는 교수를 슬쩍 쳐다봤다가 꺼뒀던 PC메신저를 실행시키고 지한에게 간단히 답장했다.


[오늘은 못 가.]

보내자마자 말풍선 옆 1이 사라지고 상대방 풍선이 연달아 도착했다.

내용은 다 똑같았다. ‘왜?’

유인은 조용히 키보드를 눌러서 일이 있다고 써 보내고 습관처럼 입술을 씹으며 메신저를 꺼버렸다.

전화 말고 만나서 얘길 해야 한다는 남자의 말에 덜컥 걱정부터 앞서서 알겠다고 한 약속의 날이 바로 오늘이었다.

물음표에서 벗어나 언니네 소속사 이사님으로 탈바꿈하게 된 남자가 제게 던지고 간 찜찜함이 드디어 해결되는 날이었지만 불편한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는 긴장감은 어쩔 수 없어서 손바닥에 연신 땀이 찼다.

쉴 틈 없이 화면이 점멸하는 휴대폰을 엎어버린 유인은 치맛자락에 손을 문지르며 다시 강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기 20분 전.

부우우웅.

휴대폰이 우는 소리가 강의실에 크게 울리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모이고 그 시선들의 주인공, 유인은 눈을 크게 뜨고 울리는 휴대폰을 잽싸게 잡아챘다.


“크흠.”

난입한 소음에 헛기침으로 불쾌함을 표시하는 교수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인 유인은 손에 있는 기계를 힐금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중앙 도서관 앞에서 기다릴게요.]

도기연의 메시지였다.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교수의 말에 유인은 노트북을 가방에 대충 쑤셔 넣고 강의실을 튀어나왔다.

데리러 온다는 말이 캠퍼스 안에서 기다린다는 말이었나? 왜? 언제부터 그 말이 그렇게 됐는지 국문학을 공부하는 자신도 모르는 일이었다.

차에서 기다리시라고 쓴 메시지는 결국 보내지 못하고 인문대 건물을 나와 뜀박질을 시작했다.


“헉……하아!”

하필 유동 인구도 많고 보는 눈도 많은 도서관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한 남자를 발견한 건 숨이 차오른 지 10분쯤 지났을 때였다.

유인은 그와 저만치 거리를 두고 우뚝 멈춰 섰다.

남자는 제 머리 위에 그늘을 만드는 커다란 벚나무 가지 아래 서서 느릿한 봄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꽃잎을 무심하게 보고 있었다.

갑자기 올라간 기온 때문인지 짙은 네이비 재킷은 팔에 걸치고 흰 셔츠에 넥타이를 꽉 조여 맨 모습은 봄 화보지에 나올법한 앵글이었다.


“…….”

몇 미터 정도 떨어져서 남자를 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여학생들이 그를 훑고 지나가는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일절 눈길 주지 않은 남자는 그저 허공만 쳐다봤다. 세상 그 어느 것도 관심 없는 사람처럼.

유인은 좀처럼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술렁거리고 간질거리는 게 기침이라도 나올 거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봤다. 왼쪽 손목을 흔들어 시계를 확인한 그가 고개를 돌리다 자신을 발견할 때까지.

그리고 텅 비어 있던 그의 얼굴에 싱그러운 미소가 덧그려졌다. 눈이 부시도록.


“……아.”

순간 발끝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찌릿해 급히 숨을 들이켠 유인은 누가 끌어당기기라도 한 거처럼 그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림 같은 미소가 눈에 한가득 담길 만큼 가까워지자 남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인 씨.”

“……안녕하세요.”

 

 
어설프게 숙이는 고개를 본 남자가 눈을 찡그리며 웃었다.

서늘한 눈매가 긴장한 듯 딱딱하게 선 유인을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빠르게 훑었다.

그리고 미소가 좀 더 진해진 얼굴로 물었다.


“강의 잘 들었어요?”

유인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면서 완벽한 미소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학교 안에서 만난 남자는 어색하고 더없이 낯선 느낌이었다.

숨겨진 비밀 장소에 몰래 들어온 침략자처럼 이곳에 있어선 안 될 사람 같았으나, 동시에 이 벚꽃 아래 있는 게 너무 잘 어울려서 괴리감마저 들었다.


“캠퍼스가 온통 벚나무네요. 유인 씨는 벚꽃 좋아해요?”

이번엔 유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와 동시에 남자가 불쑥 팔을 뻗기에 유인의 동그란 눈도 따라갔다.

그녀의 정수리에서 핑크빛 꽃잎을 떼어낸 그가 미련 없이 바닥으로 날려 보내며 말했다.


“잘 어울리는데. 싫어하는구나.”

나직한 혼잣말을 내뱉은 남자가 나른하게 웃었다.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명치끝이 아까보다 더 간지럽고 양 볼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거 같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인 유인은 시선을 휙 피했다.

그러자 남자의 등 뒤에서 저처럼 잘난 자태를 구경하던 무리와 눈이 딱 마주쳤다.

방금까지 두 사람을 감싸던 오묘한 공기 방울이 펑 하고 깨져 버리고 유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근데 왜 여기 계세요?”

“길도 익힐 겸 유인 씨 찾기도 편할 거 같아서요.”

남자는 그 무엇도 신경 쓰지 않고 가볍게 대꾸했지만 유인의 낯빛은 한층 어두워졌다.


“빨리 가면 안 될까요.”

“불편해요?”

나긋하게 묻는 소리에 유인이 불안이 물든 눈동자만 들어 올려 남자를 바라봤다.

뭐에 대한 불편을 물은 걸까. 도기연이라는 사람? 아니면 자신이 신경 쓰는 저 쓸모없는 관심들?

유인이 입술을 씹으며 대답을 잠시 고민하는 동안 남자는 몇 걸음 움직였다. 그러자 넓은 어깨와 등에 시야가 다 가로막혔다.

마치, 저들로부터 유인을 보호하듯이.


“……이사님?”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고 묻듯이 부르자, 은은한 미소를 띤 그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유인 씨가 회사 직원도 아닌데 내가 왜 이사님입니까?”

“네?”

“나보고 방금 ‘이사님’이라고 했잖아요.”

단단한 어깨 끝을 바라보다가, 너무 멀리 튀어버린 주제를 바로 따라잡지 못한 유인은 토끼처럼 눈을 떴다.

한껏 커진 눈을 보고 픽 웃은 남자는 방향을 확인하는지 좌우를 둘러본 후 유인의 등을 부드럽게 밀면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유인은 절로 움직이는 제 몸을 의식하지 못한 채 남자에게 물었다.


“그럼……뭐라고 불러야 해요?”

“나처럼 이름 불러도 되고, 뭐.”

흐려진 말꼬리가 남긴 여운이 묘했지만 알아채지 못한 유인은 남자를 슬쩍 올려다보며 반문했다.


“이름이요?”

“이제 내 이름 알잖아요.”

툭 던져진 말에 유인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지금 이 남자가 저를 부를 때 이름을 부르라고 하는 게 정녕 맞는 건지, 그리고 그 의도가 뭔지 알아내려 한참이나 뚫어지게 살폈지만 수확이 전혀 없었다.


“……그냥 이사님이라고 부를게요.”

“음. 혹시 가까운 미래에 일랑 직원 될 생각이 있어요?”

유인은 황당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봤다. 그렇게 싫은가, 이사님이란 호칭이.

명함에도 떡하니 적혀 있고, 언니도 이사님이라 부르는데 왜 저한테만 이러는지 당황스러웠다.


“아뇨.”

남자는 단호한 말투가 좀 의외였는지 유인을 내려다보며 곧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왜요? 그래도 업계에선 대우가 괜찮은 편인데.”

“전 그 업계가 싫어요.”

이 업계가 싫다라. 무덤덤하게 발음을 따라 한 남자는 유인의 등허리 부근을 짚고 있던 손을 뗐다.

그제야 붙어 있던 서늘한 감촉을 알게 된 유인은 제 등과 남자를 번갈아 보며 미간을 구겼다.

그러자 입꼬리만 올린 남자가 어느새 도착한 주차장 안에 자리한 윤이 나도록 새까만 세단의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타요.”

“어디 가는데요?”

“대화하기 좋은 곳.”

남자는 다른 뜻은 없다는 듯 싱긋 웃었다.

****

벌써 두 번이나 타게 된 남자의 차 안은 주인처럼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이었다.

희미한 가죽 시트 냄새가 나는 실내는 사용감이 거의 없어서 새것 같았다.

차로만 보고 있는 남자는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 않았고 덩달아 눈치를 보게 된 유인도 입을 다문 채 창밖에 지나가는 가로수만 쳐다봤다.

고요하던 차 안 정적이 부서진 건 남자의 차가 짙은 색 벽돌로 둘러싸인 어느 건물 앞에 멈춰선 다음이었다.


“유인 씨.”

느른하게 들리는 음성에 밖을 보다가 휙 고개를 돌리자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의 남자가 문을 보며 눈짓했다.


“내려요.”

“아……네.”

내리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나. 괜한 민망함이 든 유인은 빠르게 가방을 둘러매고 차 문을 열어 내렸다.

그러자 보닛을 돌아온 남자가 아까와 같이 유인의 등을 살짝 밀며 안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나무 화분들이 세워진 입구를 지나자 앞에 있던 데스크에서 두 사람을 발견하더니 별 절차 없이 인사를 하고, 2층으로 올라가시라 안내해주었다.

유인은 인형처럼 남자가 인도하는 대로 계단을 올라가서 복도를 따라 걸었다.

그러자 커다란 샹들리에가 달린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홀이 나왔는데 아주 놀랍게도 그 넓은 곳에 테이블은 달랑 하나였다.

어안이 벙벙해진 유인이 직원이 빼준 의자에 앉자 재킷을 의자에 툭 걸친 남자도 유인의 맞은편에 착석하며 말했다.


“간단한 디저트 준비해 달라고 했는데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뇨. 전 안 먹어도 돼요.”

“거절도 습관인가.”

“네?”

너무 낮게 읊조려서 잘 듣지 못한 유인이 되묻자, 남자는 설핏 웃으며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젓곤 휴대폰을 확인했다.

갸웃거린 유인도 더 묻지 않고 낯선 공간을 구경했다.

가까이서 보니 훨씬 웅장한 샹들리에와 한쪽 벽에 설치된 벽난로와 그 위에 장식된 엔틱한 액자들이 중세시대 궁전에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호텔에서부터 느꼈지만 장소 선정이 참 남다른 거 같다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하려는 얘기가 도대체 뭐길래 이런 곳까지 와야 하는 건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에 유인은 준비돼 있는 물만 꼴깍꼴깍 마시며 눈만 굴렸다.


“아직도 궁금한 거 없어요?”

“네?”

갑자기 던져진 질문에 크게 뜬 눈이 그를 향하자 비딱하게 턱을 괸 남자가 나. 하며 슬쩍 웃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리던 유인은 어느새 바닥을 보이는 물을 다 마신 후에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아셨어요?”

“뭘요?”

“제가 남유진 동생인 거요.”

남자는 탐탁지 않은 듯 한쪽 눈을 슬며시 찡그렸다가 목을 음, 낮게 울렸다.


“남유진에 관해서 모르는 게 거의 없거든요, 내가.”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남유진에 대해 다 안다고 동생을 알아보는 게 당연한가.

하긴 저도 의도치 않게 이 남자가 언제 입사했고 어떤 식으로 일하며 어떻게 이사가 됐는지 알고 있으니 이 질문은 패스하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알고 있다고 왜 말 안 하셨어요?”

“하려고 할 때마다 누가 도망가서요.”

“……기회는 충분히 있으셨던 거 같은데요.”

“그래서 그때 했잖아요.”

자세를 바로 세운 남자가 건성으로 답했다. 눈썹도 까딱. 뭐가 문제냐는 태도다.

한순간에 불량해진 남자를 보던 유인이 눈살을 조금 찌푸렸다.


“명함만 쥐여 주고 가신 거요?”

“좀 그랬나? 사실 난 내가 누구인지 설명하는 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거든요.”

“그럼 뭐가 중요하신데요?”

유인이 대화의 흐름이 이상하다고 느낀 건, 혼란스러워하는 자신과 다르게 이제야 흥미가 생겼다는 듯이 상체를 숙이며 다가오는 남자를 볼 때였다.

씩 웃은 그가 대답을 하려 입을 살짝 열었을 무렵, 둘의 목소리 말곤 사위가 조용하던 홀에 요란한 진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잠시만요.”

갑작스러운 소음에 흠칫거린 유인이 양해를 구하자 남자는 의자에 등을 느긋하게 기대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의자에 걸어둔 가방을 뒤져 끊기지 않고 울려대는 화면에는 이 순간 별로 달갑지 않은 이의 이름이 떠 있었다.

유인은 전화를 거절하고 나중에 연락하겠다 메시지를 보낸 후 휴대폰을 다시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자세를 고치는데 나지막한 음성이 넘어왔다.


“남자친구?”

“네? 아뇨.”

반사적으로 대답을 한 유인이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질문이 너무 사적으로 넘어가는 거 아닌가. 누가 봐도 언짢다는 기색을 뿜는 유인을 봤음에도 굴하지 않은 남자는 팔짱을 끼며 질문을 계속 이어갔다.


“아니면 될 예정?”

“전혀 아닌데요.”

“그럼?”

“그냥 친구요. 근데 그게 지금 왜 궁금하세요?”

얇은 음성에 날이 제법 섰지만 제 호기심을 다 해소한 남자는 흐음. 코를 울리는 소리를 내고선 말이 없다.

불만스러운 유인의 얼굴을 한참 응시하던 남자가 마침내 눈을 휘며 웃었다.


“나한테 중요한 게 그거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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