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한 걸음, 한 발짝.
(10/13)
10. 한 걸음, 한 발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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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한 걸음, 한 발짝.
2023.06.03.
“…….”
“…….”
커다란 홀에 덩그러니 놓인 테이블 위는 싸한 침묵이 한참 동안 흘렀다.
놀란 표정이었다가 찡그렸다가 다시 멍해지고 시시각각 변하는 유인과 다르게 남자는 요만큼의 흔들림 없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요?”
힘을 잃은 거 같은 가느다란 목소리에 가볍게 숨을 몰아쉰 남자는 테이블 위의 손가락을 비스듬히 세워 제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그리고 뭐라고 할지 고민하는 듯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눈동자가 유인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유인이 제게 박힌 직설적인 시선에 뒤통수까지 따갑다는 느낌이 들 무렵, 남자가 입꼬릴 당겨 씩 웃었다.
“뭐, 그건 유인 씨가 생각해보고.”
“제가요?”
“유인 씨 탓이니까 본인이 찾아봐요. 왜인지.”
뜬금없는 제 탓에 할 말을 잃은 유인은 어항 속 금붕어처럼 벙긋대기만 했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참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된 순간이었다.
이리저리 날뛰는 대화 주제를 따라가기도 어려운데 이젠 난데없이 탓까지 해버리니 복잡한 머리가 빵 터져버릴 거 같았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게 왜 내 탓이냐고 따져 물으려 했지만, 복도에서 트레이 바퀴 소리가 들려와서 도로 입을 꽉 다물었다.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해요.”
“……아니에요.”
퉁명스럽게 말하고 입술을 꾹 깨무는 유인을 본 남자는 픽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트레이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직원은 테이블에 수제 쿠키와 다쿠아즈, 밀푀유가 담긴 고급스러운 접시와 따끈한 김이 오르는 잔을 각각 앞에 놔주고 조용히 물러났다.
유인은 제 앞에 와 있는 정체불명의 차와 반대편 잔을 번갈아 봤다. 저 사람 건 커피인데, 이건 뭐지.
“우유 넣은 홍차예요. 그때 보니 커피 별로 안 좋아하는 거 같길래.”
웃음기 어린 저음이 하는 말에 고갤 드니 그가 금테가 둘러진 커다란 접시를 향해 눈짓한다.
말하지 않았어도 저 눈짓에 따라온 속뜻을 알 거 같았다. 예를 들면 ‘어때, 이것도 싫어?’라던가.
“……네. 좋네요.”
유인이 떨떠름하게 끄덕이자 남자는 유쾌한 소리를 내며 웃더니 많이 먹으라는 말과 함께 접시를 밀어주었다.
그 뒤로 대화는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가고 홀은 소음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이제야 한창 시끄럽던 속을 진정시킨 유인은 입에 제법 맞는 달콤한 홍차를 홀짝였다.
그리고 반쯤 마셨을 때쯤, 남자가 말을 걸었다.
“유인 씨.”
“네.”
유인이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대답했다.
반듯한 이목구비를 보다가 문득 시선이 닿은 남자의 커피는 어째서인지 하나도 줄어들지 않고 처음과 똑같았다.
마시지 않고 뭐 했을까, 설핏 의문이 드는 순간 허스키한 저음이 건너왔다.
“업계가 싫다는 말은 연예계가 싫다는 뜻이에요?”
“……비슷해요.”
“좀 더 얘기해 봐요.”
남자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렇다고 명령조인 말이 다르게 들리진 않았다.
저번보다 더 넓어진 취조의 범위는 어디까지 커지려는지 참 별걸 다 묻는다 싶었지만 남자는 꽤 진지한 얼굴로 유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유인은, 언니에 대해서 잘 안다고 했던 남자의 말을 떠올리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세계에선 진실이 중요하지 않잖아요.”
“음……남유진이 예능을 안 하는 이유랑 같네요.”
뭉친 실타래 같은 말에서 굉장히 빠르고 또 정확하게 논점을 잡아낸 남자는 단박에 결론까지 끝내버리곤 아무렇지 않게 살짝 웃었다.
유인은 너무 쉽사리 정곡을 찔려 내심 놀랐지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홍차가 든 잔을 입에 댔다.
최연소 이사 타이틀은 괜히 다는 게 아니구나 하는 조금의 감탄도 섞였다는 건 더더욱 비밀이었다.
“그건 좀 맘에 드나봐요.”
“……네. 맛있어요.”
유인의 솔직한 감상이 좋았는지 남자는 보조개가 보이도록 진하게 웃어 보이곤, 방금 전보다 훨씬 대답하기 수월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좋아하는 음식, 색깔, 날씨로 시작해서 다양한 취향을 물어댔고 휴일에 뭐 하냐는 질문에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본다고 하자, 남자의 눈이 한층 더 빛났다.
그는 요즘 영화나 드라마 제작 투자에 관심이 많다고 하며 연습 삼아 투자했다 망한 얘기나, 예상보다 큰 수익을 거뒀던 작품 얘기, 요즘 검토 중인 드라마와 영화들 같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그때 유인 씨 마주쳤을 때도 영화감독이랑 만나고 있었어요.”
“아……그 취객이?”
“아니, 그 사람은 조감독인데. 유인 씨한테 하는 거 보고 덕분에 투자는 물 건너갔죠.”
남자는 가볍게 웃어넘겼지만 유인은 순식간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본인한테 해를 끼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쉽게 결정해 버린다고?
그의 일 처리 방식에 대해 미심쩍은 의심이 피어오를 무렵, 남자가 유인의 손에 억지로 다쿠아즈를 쥐여 주며 언니가 최근에 제안 받은 시나리오 얘길 시작했다.
발끝에 거슬리게 찰랑대던 서서히 안개가 거둬지고, 주거니 받거니 하며 평범하게 이어진 자리는 벽난로 맞은편 통창에 진홍빛 노을이 가득 번져서야 끝이 났다.
“저녁 같이할래요?”
“아뇨.”
함께 홀을 나서며 건넨 제안을 유인은 단칼에 거절했다.
기분이 상했는지 못마땅하게 눈을 맞추던 남자는, 유인이 긴장이 풀려 축처진 어깨를 으쓱하며 계단을 내려가자 이내 나지막하게 웃고는 그녀와 보폭을 맞췄다.
집으로 향하는 남자의 세단은, 퇴근 시간 정체에 갇혀 평소보다 가는 길이 오래 걸렸다.
낮게 틀어놓은 라디오를 들으며, 간간이 돌아오는 시선을 의식하며, 흐드러지게 쏟아져 들어오는 노을빛을 그대로 맞으면서. 단둘이 있는 차 안이 생각보다 불편하지도, 어색하지도 않다는 걸 느낀 유인은 괜스레 더 창밖만 봤다.
한참 걸려 도착한 집 앞, 차에서 내리기 직전 남자가 유인 씨, 하고 불러서 유인이 돌아봤다.
“잘 들어가고 다음에 또 봐요.”
유인은 왜 다음에 또 봐야 하냐고 물으려다가 말았다.
오늘 겪어본바, 그것도 유인 씨가 생각해보라는 대답을 할 거 같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유인의 표정만 보고도 머릿속을 본 사람처럼 빙긋 웃었고, 유인은 그를 향해 말없이 고개만 꾸벅 숙이고선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 완전히 지쳐버린 몸을 침대에 풀썩 눕힌 유인은 그제야 깨달았다.
“아……맞다.”
그의 용건이 무엇이었는지 묻지 않았다는 걸.
****
시험은 늘 그렇듯 기다려주지 않고 성큼 다가왔다.
중간고사 직전 비가 여러 번 내려 학교 안을 핑크빛으로 물들이던 벚꽃들은 다 떨어지고 푸릇푸릇한 잎사귀들이 자리 잡았다.
봄과 함께 다가온 따스함은 한 차례 더 진해졌지만 핑크빛이 사라지자 봄도 같이 사라진 것만 같았다.
유인은 대학 다니는 3년 넘게 해본 적 없는 벚꽃이 아쉽다는 생각을, 중앙 도서관 앞을 지나치며 스치듯 해버렸다.
그리고 그 아래를 제 자리인 양 차지하고 있던 누구의 모습도 떠올리면서.
“……길을 익힌다고 했었나.”
왜 여기 있냐고 물으니 그런 대답을 했었다. 대학교 캠퍼스를 다시 올 일이 뭐가 있다고 그런 말을 했을까.
유인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멈춰 섰던 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유인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남자를 뇌리 한구석에서 끄집어낼 수 있게 된 건,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꽤 많은 얘기를 나누고 헤어진 다음 날부터 시작된 남자의 메시지가 원인이었다.
처음엔 날씨를 들먹이며 좋은 하루 보내란 퍽 평범한 안부 문자였다. 딱히 답장을 바라는 건 아닌 거 같기에 며칠은 읽고 무시하다가 충동적으로 답을 하게 된 건 어느 한 문장 때문이었다.
[오후에 비 소식 있으니 우산 꼭 챙겨요. 자연현상은 막을 방법이 없으니 안타깝네요.]
비 오는 날이 싫다고 했던 걸 기억한 모양인데, 그 뒤에 붙은 범상치 않은 사족이 당황스러우면서 웃겼다.
그렇게 한 번의 답장으로 좀 더 잦아지던 메시지는 어디 촬영장 같은 곳에서 찍은 하얀색 털을 가진 강아지 사진과 함께 유인 씨랑 닮았어요. 라고 하는 정도까지 발전해 버렸다.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든 건 그러고도 한참 후였다.
“유인아, 여기!”
머리가 한창 복잡하게 돌아가는 사이, 다리는 부지런히 걸어 세 사람이 늘 모이는 곳, 학교 안 카페테리아로 들어갔다.
오늘은 늘 차지하던 자리가 아니라 더 넓고 푹신한 소파에 앉은 재희가 유인을 알은척하며 불렀다.
다가가자 함께 있던 지한이 유인의 가방을 받아주고 제 옆자리를 두드렸다.
“오늘은 왜 여기 앉았어?”
“한재희 어제 술 마셔서 뻗어 있고 싶대.”
지한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재희를 보며 비웃었다.
그러고 옆에 앉은 유인에게 미리 주문해 놓은 커피를 들려주었다. 유인은 땡큐, 하고 빨대를 물어 한 모금 쪽 마신 뒤 물었다.
“너희 오늘까지 시험 아니었어?”
“맞아. 난 쟤 오늘 시험 보러 안 오는 줄 알았어.”
지한의 말에 재희는 장난기 넘치는 얼굴을 찡그리며 한번 웃고는 소파에 눕다시피 하며 말했다.
“아니, 분명 시험이라 했는데 회식 빠지면 안 된다고 난리들 부리니까…….”
“그렇다고 떡이 되도록 마시냐? 애초에 그런 자리면 가질 말아야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오, 유인아. 저 잔소리쟁이 입 좀 막아 봐.”
“그러다 졸업 못 하고 계절학기 다니면 참 좋겠다.”
지한의 냉정한 악담에 재희가 듣도 보도 못한 험한 소릴 해서 그제야 유인이 나서서 대충 말렸다.
“이제 그만들 해. 시험도 끝나서 좋은데 왜 싸우고 그래.”
자주 투덕거리고 싸우긴 하지만 또 말리면 금방 관두는 친구들은 서로를 잠시 노려보다가 재희는 벌러덩 눕고, 지한은 혀를 차며 고갤 돌렸다.
저러다가도 한번 죽이 맞으면 둘도 없는 사이가 되는 걸 수도 없이 봐 온 유인은 둘을 보며 웃다가 테이블 위에서 진동을 울리는 제 휴대폰을 들었다.
액정에 메시지 알림이 떠 있어서 터치하자 앱이 켜졌다.
발신자는 도기연 이사님.
[유인 씨. 일주일간 시험 보느라 고생했어요.]
이 말을 해주려고 어제 시험 끝나는 시간을 물어봤던 걸까.
유인은 답장을 할까 말까 고민하며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때, 기척 없이 다가온 지한이 불쑥 물었다.
“누구야?”
“어? 아냐.”
깜짝 놀란 유인이 곧장 화면을 꺼버려서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지한은 잔뜩 찌푸린 눈을 떼지 않았다.
“뭐길래 숨겨? 수상하게.”
“뭘 숨겨? 남유인이?”
누워 있던 재희까지 상체를 벌떡 세우고 합세를 했다. 이들은 유인을 곤란하게 만들 때에도 꼭 한마음이었다.
유인은 짐짓 모른 척하며 빨대를 물었지만 테이블 앞에 재희의 눈이 너무 초롱초롱해서 부담스러웠다.
결국 유인은 한숨을 쉬며 커피를 내려놓았다.
“과 단톡 확인한 거야. 중간고사 끝나서 축제 준비 들어가나 봐.”
“아. 난 또 뭐라고.”
친구들에게 한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단지 과 단톡은 아까 전에 확인한 내용이고 얼마 전부터 연락이 오는 남자에 대해선 아직 말하고 싶지 않을 뿐.
벌써 마지막 축제네. 중얼거린 재희는 금방 흥미를 잃고 소파에 도로 누웠지만 유인의 옆, 선이 고운 얼굴의 주인은 의심을 떨쳐내지 못했는지 가만히 유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물어도 읽어낼 수 없는 표정을 한 지한은 말이 없다. 그 대신 하얀 손을 들어 유인의 머리를 다정스레 쓰다듬었다.
편안하고 포근한 느낌의 친구의 손은 언제나 따뜻하다. 유인에겐 익숙하고 오래된 손짓이었다.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서, 저도 모르게 서늘한 감촉의 누군가의 체온을 중간에 떠올릴 정도로.
아, 또다. 유인은 또 제멋대로 고개를 내민 형상을 몰아내며 지한의 팔도 치워냈다.
“지한아. 레스토랑 예약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수요일.”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시선을 피해버린 유인은 엉거주춤 내쳐진 팔이 천천히 내려와 주먹을 꽉 쥔 것까진 보지 못했다.
지한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유인에게 말을 걸었다.
“그날 공강 맞지?”
“응.”
“저녁에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유인은 그럴 필요 없다고 하려다가 재희는? 하고 다른 친구를 불렀다.
그러자 머리가 아픈지 천장을 보며 인상을 쓰고 있던 재희가 고개를 들고 씩 웃었다.
“당연히 가야지. 와인도 마실 거야. 오랜만에 윤지한 털어 먹자!”
신이 난 재희가 차별하지 말고 저도 데리러 오라며 지한을 타박하는 걸 들으면서 웃고 있던 유인은 소파 구석에 박혀 있는 휴대폰을 힐끔거렸다.
그러자 재희를 받아주고 있던 지한의 눈동자도 유인에게로 향했다.
그 뒤로도 내내, 뭔갈 망설이는 유인의 얼굴을 지한의 옅은 눈동자가 오래도록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