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그 남자의 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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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 남자의 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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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그 남자의 직진
2023.06.07.
수요일은 원래 강의를 들으러 학교에 갔어야 했지만 시험이 끝난 후 잡힌 교수님 세미나 때문에 휴강이었다.
그와 동시에 친구들과 SJ호텔 레스토랑에 가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약속시간은 저녁이었지만 늦은 아침을 간단하게 먹고 집을 나선 유인은 오랜만에 집 근처 대형 서점에 들러 신간을 구경하면서 유진과 통화를 했다.
“엄마가 언니 왜 전화도 안 받고 오지도 않냐고 물어보라던데.”
-바쁘니까 그렇지. 정신없었어, 요새.
“얼마 전에 드라마 촬영 끝났잖아. 안 쉬고 차기작 벌써 해?”
-나야 쉬고 싶지. 광고에 미팅에 아주 사람을 굴려 먹는다. 오늘도 무슨 영화사 감독이랑 미팅 있대서 거기 끌려 나왔어.
“아……그래?”
언니의 다음 작품이 영화가 될 거라는 건 유인도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궁전 같은 홀에서 그가 말하길, 언니가 추구하고 있는 이미지와 아주 잘 맞는 시나리오를 찾았고 흐름을 잘 타게 된다면 언니의 인생 작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뭐라더라, 국민 첫사랑이 될 기회라던가?
-어. 스트레스 받아…… 동생아, 넌 뭐 해. 수업 안 들어?
“지금 서점 왔어.”
-학교 안 가고? 너 등록금 내주는 사람한테 너무 당당하게 땡땡이쳤다고 말하는 거 아냐?
핀잔하는 말 속에 비난의 기색은 전혀 없었다.
유진은 오히려 유인이 학교에 안 간 게 재밌는지 말끝에 낄낄 웃었다.
“오늘 공강이거든. 허투루 안 빠지니까 걱정 마.”
-그래, 돈 쓴 보람 있게 공부 열심히 해. 언니가 뼈 빠지게 일해서 내주는 거니까. 아, 미팅만 아니면 남유인 데리고 쇼핑이나 가는 건데.
“어휴……난 빼줘. 재희랑 가.”
-그러게, 재희랑 지한이 안 본 지도 꽤 됐네. 어, 야. 나 끊어야 한다. 네 친구들한테 안부 전해주고 엄마한텐 조만간 간다고 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져 버렸다.
끊어지기 직전 언니를 부르는 낮은 목소리가 어딘가 익숙했는데, 혹시 그 남자도 함께 미팅을 간 걸까.
오늘은 처음으로 남자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도착해 있는 메시지를 확인하는 일이 적응되기라도 했는지 유인은 잠잠한 남자가 좀 궁금하던 찰나였다.
“…….”
바쁘면 그럴 수 있지. 직장인이니까. 거기다 대형 기획사 이사님이면, 당연히 바쁘지.
유인은 혼자 납득을 하며 방금 집어 든 책을 펼쳤지만 집중하지 못하고 금방 의식을 흐렸다.
근데, 아침부터 바쁜가? 보통 메시지가 8시쯤 오니까, 그때부터 바빴나. 그렇게 이른 시간부터? 문자 한 줄 못 쓸 만큼?
속으로 아무리 물어도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였지만 생각의 꼬리들은 줄줄이 엮여 나왔다.
탁-.
유인은 들고 있던 책을 제자리에 내려놨다.
아무래도 오늘은, 유일하게 즐기는 도서 쇼핑을 만족스럽게 즐기기엔 틀린 거 같다.
****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오라는 지한의 메시지에 유인은 현관 앞에서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자가드 위에 화려한 플라워 패턴이 박힌 원피스 위에 블랙 카디건. 앞코가 까만 플랫슈즈.
전부 언니가 떠안겨 주고 간 물건들로, 평소 유인의 스타일이 아니었지만 드레스코드를 잘 맞추고 오라는 한재희의 귀여운 명령에 나름 맞춰본 거였다.
재희는 분명 보자마자 힐을 신었어야 했다고 구박하겠지만 이 화려함에 높은 굽까지 감당하고 싶진 않았다.
유인은 웨이브를 살짝 넣은 긴 머리를 한 번 더 정돈하고 집을 나섰다.
“야, 남유인! 그 원피스에 힐을 신어야지, 무슨 짓이야!”
아니나 다를까, 지하에서 기다리고 있던 차에 올라타자마자 앞 좌석에 앉은 재희의 질타가 들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응하는 친구가 웃겨서 유인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집에 구두 없어.”
“남유인은 거짓말도 참 재미없게 하지. 언니가 때마다 사다 주는 거 아는데 어디서 뻥이야?”
이어지는 타박에도 웃어넘기던 유인은 콘솔박스를 사이로 고개를 빼꼼 내놓고 저를 보는 두 사람을 살폈다.
직업이 모델인 재희는 말할 것도 없고 지한도 학교 다닐 때와 다르게 단정한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늘 내리고 다니던 머리도 올려 훨씬 훤칠했다.
유인은 저를 빤히 보는 하얀 얼굴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윤지한. 오늘 멋있다.”
“고마워. 너도 오늘 엄청 예쁘다.”
곱상하게 마주 웃는 지한의 얼굴이 조금 붉게 변한 거 같았지만 조명이 어둑한 지하 주차장이라 확실하지 않았다.
그때, 재희가 발작하는 것처럼 큰 소리를 와락 질렀다.
“와, 너희 지금 대놓고 왕따 시키냐? 나도 예쁘다고 해줘! 멋있다고 해줘, 빨리!”
“어, 우리 한재희 모델님도 당연히 예쁘고 멋지지.”
유인이 코를 찡긋거리며 장난스럽게 말하자, 재희가 서운한 듯 입을 삐죽거렸다.
“남유인. 앞으로 나 빼먹지 마. 나 진짜 서운하다고……야. 윤지한. 넌 왜 조용해? 너도 빨리해.”
재희가 지한의 어깨를 툭툭 쳤지만 느껴지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무시한 지한은 룸미러를 만지며 뒷좌석으로 눈을 찡긋거렸다.
“자, 출발한다. 유인아, 벨트 매.”
지한이 가끔 끌고 나오는 차 안은 호텔에 도착할 때까지 한시도 조용하지 못했다.
해가 바뀐 후에는 재희는 제 일을 하느라 바쁘고, 지한은 군 제대 후 복학한 첫 학기라 정신이 없었기에 셋이 모이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서 묵힌 수다가 많았다.
재희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어가며 정신없이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호텔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지한이 많이 해본 것처럼 발렛을 맡기는 걸 보고 유인과 재희가 동시에 웃으며 말했다.
“오. 윤지한~.”
“오올. 호텔 많이 다니시나 봐요. 윤지한 씨~.”
“아, 뭔 소리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들어가라.”
아주 질색하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린 지한이 먼저 자동문으로 들어가서 뒤에서 저들끼리 웃던 유인과 재희도 그를 따랐다.
로비로 들어가자 새까만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실내 분수대가 제일 먼저 보이고, 그 옆에 선 지한이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분수대는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되네. 호텔 로비에 있기엔 너무 크지 않아?”
나란히 분수를 올려다보던 재희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유인은 그러게. 라고 대답하며 층층이 쌓인 대리석이 흘려내는 물줄기를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그 이사님이 저를 불렀던 호텔이었다.
처음 왔을 땐 이렇게 커다란 분수대가 있었는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관심 갖기도 싫었고 볼 새도 없었다.
그저, 휴대폰을 되찾고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지.
그리고 수작 부리는 그에게 다시는 마주치지 말자고 했는데. 그랬었는데.
“유인아, 가자.”
멍하니 분수만 응시하고 있던 유인을 깨운 건 재희였다.
아래 깔려 있던 의식을 퍼뜩 되살린 유인은 머릿속을 점령하고 있던 것들을 다시 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그러자 꽉 메우고 있던 것들이 사라져서인지, 친구들이 옥신각신하는 것도 가물거리며 잘 들리지 않았다.
“너 운전 잘 하더라. 나중에 나 회사 차리면 운전기사 할래?”
“넌 가만 보면 헛소리를 참 정성스럽게 해. 그냥 입 좀 다물면 안 돼?”
“아 왜. 월급 두둑하게 챙겨줄게, 윤 기사~.”
“그러는 것도 이제 지겹지 않냐?”
“아니. 안 지겨운데. 재밌는데. 더 할건뎅.”
떠드는 친구들의 뒤를 따라가며 유인은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두드렸다.
어떠한 알림도 오지 않은 상태. 깨끗하고 깔끔한 알림창. 항상 보던 화면과 다를 게 없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짜증이 나고 맘에 들지 않는다.
한숨을 쉰 유인이 가방에 전화를 쑤셔 넣고 고개를 들자, 로비 반대편에서 멀리서 봐도 잘 어울리는 남녀가 함께 걸어 나오는 게 보였다.
남에게 관심을 일절 두지 않는 유인은 바로 눈을 돌렸어야 했다.
한데, 저기서 걸어오는 반듯하게 주름이 잡힌 슈트 자락이, 우아한 걸음걸이가, 남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는 장신이, 그리고.
희미한 미소를 띠고 무어라 말을 하고 있는 저 근사한 얼굴이 시선을 놔주지 않았다.
“아…….”
그 남자였다. 도기연 이사님.
유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그리고 심장이 귓가에서 쿵쿵 소릴 내며 뛰는 게 느껴졌다.
불쾌함인지, 반가움인지, 서운함인지 모를 잡다한 감정의 파도가 거세게 밀어닥치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유인을 잡아당겼다.
“남유인! 여기서 뭐 해?”
순간, 서늘한 눈매가 이쪽을 보는 거 같았지만 유인은 멈췄던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등을 돌렸다.
그러자 지한이 작게 들썩이는 유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물었다.
“뭔데. 아는 사람 봤어?”
“아니. 호텔에 무슨 아는 사람. 빨리 가자.”
한껏 굳은 얼굴로 어설프게 웃는 유인을 보고 멈칫했던 지한은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더 묻지 않고 유인의 어깨를 꽉 잡은 채 엘리베이터 구역으로 향했다.
혼자 기다리고 있던 재희가 유인을 보더니 투덜거렸다.
“호텔까지 와서 미아 찾기 시키지 마시죠, 남유인 씨.”
“미안.”
유인은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다시 올려 웃었다.
딩동-.
호텔 특유의 고급스러운 소릴 내며 기계가 문을 열고, 최상층에 있는 레스토랑에 올라가는 동안 유인은 다시 감정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댔다.
함께 있는 게 무척 자연스러워 보였다. 잘 어울렸고, 또 감탄이 나오게 예뻤고, 아름다웠다.
그런 사람이랑 만나는구나. 그 정도는 돼야, 만나는구나. 그렇구나…….
방금 본 잔상에 푹 빠져들어 정신 못 차리다가 유인이 가까스로 눈에 초점을 찾았을 때는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아 메뉴 주문을 하던 재희가 와인 마실 거냐고 물었을 때였다.
“응?”
“와인 마실 거야?”
“어, 어. 마실게.”
“오케이. 윤지한, 넌 안 마실 거지?”
“응. 너네 데려다주고 가야지.”
두 사람은 와인 선정하면서 잠시 싸웠고, 애피타이저와 적정선에서 합의를 보고 시킨 와인이 나왔을 때야 조용해졌다.
“자, 짠-.”
“짠!”
붉은 레드 와인이 담긴 세 개의 와인 잔이 챙그랑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두 사람은 적당히 입을 축이고 내려놨지만, 잠시 잔을 내려다보던 유인은 목을 꺾어 원샷을 하고 탁 소리 나게 내려놨다.
입가에 남은 와인을 손등으로 쓱 닦는데, 앞과 옆에 앉은 친구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
“남유인. 왜 그래?”
“유인아……이제 술 맛을 안 거야?”
각자의 이유는 달랐지만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유인은 아무렇지 않게 눈을 깜박거리다가 잔을 다시 내밀었다.
싸하게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붉은 열기가 복잡스러운 속을 잠재워 줄 수 있을 거 같았다.
“맛있네, 더 줘.”
재희는 일일 술친구가 생겼다며 신이 나서 유인의 잔에 와인을 콸콸 부었다.
“야, 야! 술도 약한 애한테 미쳤어?”
“좀 많은가? 유인아, 잘 나눠서 마셔 봐.”
지한이 성질을 내며 막으려 했지만 혀를 낼름 내밀고 그의 손을 피한 재희가 씩 웃었다.
유인은 벌써 술기운이 도는 거 같은 뺨을 봉긋 올리며 같이 미소를 지었다.
지한이 예약을 하면서 메뉴까지 정했던 건지, 와인을 마시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송아지 스테이크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라비올레, 연어가 올라간 핑거 푸드, 아보카도 샐러드들이 테이블 위를 가득 채웠다.
“우와, 잘 먹을게. 지한아.”
“응. 이제 와인 그만 마시고 이거 먹어.”
“왜에?”
“……벌써 취했어, 너?”
지한이 고운 눈을 찡그리며 발그레하게 열이 오른 유인의 뺨을 쓸었다.
맞은편에서 샐러드를 콕콕 집어 먹던 재희가 혀를 차더니 곧바로 유인을 놀렸다.
“남유인 봐라, 와인 세 잔에 취했대요. 얼레리 꼴레리.”
“아냐. 안 취했거든?”
유인이 복어처럼 볼록하게 뺨이 잡힌 채 재희에게 항의하자 빙글거리며 웃는 재희가 안 취했거드은? 하고 따라 했다.
얘네들은 저를 놀릴 때만 되면 진짜 신기할 정도로 죽이 잘 맞는다.
우씨, 신경질을 내며 지한의 손을 떨어뜨리자 그 손이 다시 다가와 기어이 유인의 잔을 가져가 버렸다.
“야, 왜 그래, 그거…….”
그때였다.
뚜벅, 뚜벅 카펫 위를 걷는 조용한 구둣발 지척에서 우뚝 멈춘 건.
그리고 셋이 둘러앉은 테이블 위를 은은하게 비추던 빛이 사라지고 커다란 그림자가 생겨나 세 쌍의 눈동자가 그림자의 주인을 향해 올라갔다.
와인 때문에 뜨끈하게 열이 오른 유인의 어깨 위로 서늘하고 커다란 손이 내려앉았다.
“유인 씨?”
로비에서 봤던 그 남자가, 여기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