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하면 안 됩니까?
(12/13)
12. 하면 안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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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하면 안 됩니까?
2023.06.10.
유인은 못 볼 걸 본 양 기겁한 얼굴로 기연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당신이 왜 여기 있느냐 말을 하려고 했지만 단어들이 죄다 조각나 목구멍 아래에서 맴돌기만 했다.
멍하게 눈만 껌벅대는 유인을 내려다보는 기연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짜증이 난 거 같기도 하고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근데 뭐가 재밌지?
“누구세요?”
기연의 등장으로 숨 막히도록 흐르던 정적을 뚫고 목소리를 낸 건 지한이었다.
경계심과 거북함이 섞인 음성에 소스라치게 놀란 유인은 어리둥절한 친구들을 둘러보고 나서야 딱 붙어 있던 입을 열었다.
“아, 어……얘들아. 이분은, 언니네 소속사 이사님이셔.”
“어? 유진 언니 소속사? 일랑?”
“응.”
유인이 고갤 끄덕이자, 수용이 빠른 재희가 아직 얼떨떨한 얼굴로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점잖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한 기연의 눈길이 재희를 지나쳐 지한에게로 닿았다.
그러자 지한은 무성의하게 고개만 까딱 숙이곤 만다.
기연은 방금 전보다 더 진하게 웃고는 양 볼이 발그레한 채 저만 보고 있는 유인에게 다시 돌아왔다.
“친구들이랑 식사하러 왔나봐요.”
“……네. 근데 이사님은 왜 여기 계세요?”
“나도 유인 씨랑 비슷해요.”
그걸 물은 게 아니었는데. 동문서답 같은 대답에 유인의 눈썹이 설핏 찡그려졌다.
친구들과 떠들며 잠시 잊었던 누가 봐도 이상적인 커플의 모습을 한 남녀의 모습이 머릿속에 다시금 등장했기 떄문이다.
기분 좋게 달떠있던 유인의 기분이 급격하게 가라앉아 시무룩하게 번져갔다.
가만히 보고 있던 기연이 짧게 웃고는 아직까지 잡고 있던 여린 어깨를 약하게 두드리며 말했다.
“내가 매니저한테 얘기해 둘 테니까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먹고 가요.”
“아니……안 그러셔도 되는데요.”
“오늘은 거절하지 말고.”
느긋하게 나온 저음과 다르게 어깨 위 손은 강한 힘으로 꽉 쥐어졌다가 떼어졌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시고 가세요. 유인 씨 친구분들.”
“안녕히 가세요.”
눈치를 보던 재희의 인사를 끝으로 뒤를 도나 싶던 남자가, 손으로 전화 모양을 만들더니 반대쪽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다.
저게 뭘까. 기연을 빤히 보던 유인은 무릎 위 얌전히 있는 제 휴대폰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다시 고갤 들자 그는 이미 레스토랑 입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기연의 재킷 자락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던 유인의 고개가 돌아오자마자, 잔뜩 흥분한 재희가 달려들며 물었다.
“야, 야! 저 사람이 일랑 엔터 이사님이라고? 진짜?”
“응.”
“정말? 이사님인데 저렇게 젊어? 몇 살이야?”
“……서른하나래.”
“와. 20대라고 해도 믿겠다. 근데 그거보다 얼굴이 완전히 미쳤는데? 키도 엄청 커서 슈트발이 그냥! 본인이 연예인 해도 되겠던데.”
재희는 최근에 제가 봤던 남자 중에 제일 잘생기고 부티나 보인다며 감탄을 연발했다.
유인은 친구의 말을 들어주며 주억거렸지만 의식은 영 딴 데 가 있었다.
‘여자친구일 사람과 함께 호텔에 있던 남자가 여기까진 왜 와서 아는 척 한 거지’로 시작해서 ‘애인도 있으면서 나한테는 왜 연락하고, 맛있는 거는 왜 먹고 가라고 해?’까지 무럭무럭 자란 의문에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할 무렵이었다.
“누나네 소속사 이사님이면 이사님인 거지, 왜 네 어깨는 잡아?”
항상 부드럽기만 하던 중저음에 잔뜩 날이 선 채로 귓가로 날아와 상념의 고리를 날카롭게 끊어냈다.
깜짝 놀라 옆을 보자, 화가 난 얼굴의 지한이 보였다.
“어깨? 아, 그랬……나.”
유인은 어물쩍 말을 흐리며 재희를 힐끔 봤다. 얘 왜 화났어? 눈으로 물었지만 재희도 모르겠단 듯 어깨를 으쓱거린다.
“그랬나는 뭐야. 너 저 사람이랑은 어떻게 알게 됐는데? 나이는 또 어떻게 알고?”
“야. 언니네 회사 사람이니까 언니 통해서 알게 됐겠지.”
당황해서 머뭇대는 유인을 도와주려 재희가 끼어들었지만 그게 오히려 지한을 짜증 나게 한 건지 한층 더 인상을 구겼다.
“남유인, 네가 대답해.”
“아니,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 유인이가 너한테 허락받고 누구 만나야 해?”
“한재희. 너 남유인 대변인이야? 좀 빠져 있어.”
“빠지긴 뭘 빠져. 넌 여자랑 술 퍼먹고 다니는 거 유인이한테 다 보고하고 다니냐? 아니면 너 그러고 다니는 거 유인이가 추궁한 적 있어? 친구면 친구답게 적당히 선 지켜라.”
“내가 언제 여자랑 술을 마셨어. 네가 봤냐? 진짜 짜증 나게 할래?”
“그걸 꼭 봐야 아나. 그리고 짜증은 네가 먼저 냈잖아, 이 자식아! 지가 분위기 다 깨놓고 뭐래.”
유인은 저를 두고 싸우는 친구들 사이에서 한숨을 푹 내쉬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지한이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도 모르겠고, 재희도 왜 저렇게 성질이 났는지, 겨우 괜찮게 달래놓은 제 속을 뒤집어 놓고 간 남자는 또 뭔지 골이 다 아팠다.
둘의 설전이 한창인 그때, 유인의 원피스 자락 위에서 진동이 짧게 울렸다.
유인은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상태에서 손만 움직여 알림을 터치했다.
[잠깐 입구로 나와요.]
아까의 손 모 양은 이걸 예고했던 건지, 그 남자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유인은 갈등했다. 혼란을 주고 간 것도 모자라 괘씸하기까지 한 남자를 그냥 무시할지, 아니면 술기운에 실체 없이 불어난 용기로 제 궁금증을 풀어버릴지.
두 사람은 계속 싸우고 유인도 이성적인 판단이 점점 흐려졌다. 그래서인지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휴대폰을 쥔 유인이 드르륵- 의자를 밀고 일어나자, 핏대 올리며 싸우던 친구들이 성난 말들을 뚝 멈췄다.
“유인아?”
“나 화장실 좀. 나 갔다 올 때까지 화해하고 있어.”
유인은 경고하듯이 눈에 힘을 주고 한 명 한 명 봐주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일어서니 머리가 핑 돌면서 어지럽고 몽롱해졌다.
두꺼운 카펫을 딛자마자 비틀거리는 걸 본 재희가 같이 가줘? 물었지만 유인은 뒤로 손을 휘저었다.
정신을 차리려 양손으로 볼을 짝짝 치면서 입구로 천천히 나아가고 있던 유인의 팔이 별안간 강하게 잡혀서 어디론가 훅 끌려들어 갔다.
“으앗!”
놀라서 움찔 감았던 눈을 뜨자, 언젠가 봤던 룸 풍경과 함께 새하얀 셔츠에 베스트를 입은 가슴팍이 보이고 드르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이게 도대체 뭔 일인지 깨닫기도 전에 벽에 등이 닿고 유명 호텔 레스토랑 한복판에서 저를 납치하다시피 한 사람의 얼굴이 매우 가까워졌다.
“……이사님.”
속삭이듯 작은 목소리에 당당한 납치범은 웃을 듯 말 듯 하더니 매끈한 입술을 열었다.
“남유인 또 술에 취했네.”
그윽하리만치 가라앉은 저음이었다.
유인이 앉은 테이블에 찾아와 보여주던 산뜻하고 깔끔한 모습과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일까, 하려던 말은 전부 잊은 채 오로지 목만 타서 입술을 말아 물었던 유인은 침을 한번 꿀꺽 삼켰다.
“지금 또 반말하셨어요.”
“알아요.”
“아는데 왜 하세요.”
“하면 안 됩니까?”
차분하고 고요하게 새카만 빛을 내는 눈빛이 말문을 턱 막히게 만들었다.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에 와 있는 남자와 벽 사이에 갇힌 유인은 입술만 짓씹었다.
그러다 생각나지 않는 답 대신 남자의 어깨 부근을 꾹 눌러 밀어내자, 피식 웃은 기연은 순순히 물러났다.
“술도 못 하면서 왜 이렇게 많이 마신 거예요.”
“별로 안 마셨어요.”
유인이 아직도 잘 익은 복숭아처럼 달아올라 있는 볼을 손바닥으로 꾹꾹 누르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근데 여기 막 들어와도 돼요?”
“나랑 있으면 괜찮아요.”
“여기서……식사 하셨나봐요.”
“아니. 그건 아닌데.”
유인은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기연은 유인의 붉어진 눈가만 응시할 뿐 말을 잇지 않았다.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와닿는 눈빛에 견디지 못한 유인이 먼저 피하자, 한숨 같은 숨을 내쉰 남자가 고개를 삐딱하게 숙이며 말했다.
“아까는 일부러 그런 거예요?”
“뭘요?”
“로비에서 나 보고도 모른 척 한 거.”
그의 말에, 술이 용기뿐만 아니라 솔직함에도 영향을 주는지 서운함을 차마 숨기지 못한 유인의 부드러운 눈꼬리가 처연하리만치 축 처졌다.
예상 밖의 반응에 살짝 놀란 기연이 왜 그러냐 묻기 직전, 작게 읊조리는 소리가 들렸다.
“같이 계신 분이 불편하실까 봐요.”
“뭐? 누구……아.”
황당한 기색의 기연이 유인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지더니 이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 동안이나 웃어대던 그는 벙한 유인이 기분이 상해 불만스럽게 변할 때까지 멈추지 못하다가 ‘왜 웃어요?’라는 볼멘소리를 듣고서야 그쳤다.
“그런 사이 아니에요. 그 사람, 친구 약혼녀거든.”
“…….”
“부탁할 게 있어서 셋이 보기로 했는데 친구가 바쁘다고 바람 맞혀서 나오던 길에 유인 씨 본 거고.”
기연의 웃음기 섞인 설명이 이어지자 안 그래도 발그스름하던 유인의 얼굴이 더 빨갛게 익었다.
민망함을 참을 수가 없는지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물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기연은 발갛게 물든 정수리를 톡, 치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제 오해 풀렸어요?”
오해고 뭐고 이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은 유인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괜히 말한 거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남 앞에서 이렇게 웃음거리가 되어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오늘만큼 창피하진 않았을 거 같다.
부끄러움을 참는 유인이 고개를 푹 수그리자 기연이 낮게 웃으며 유인 씨, 하고 불렀다.
대답하지 않자 남유인. 한 번 더 불러서 그제야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들었다.
양 뺨 하며 눈가에, 입술까지 온통 빨개진 유인을 보고 기연은 어쩔 수 없단 듯 웃었다.
그 미소에 이유 모를 망설임이 느껴져 유인은 이번엔 피하지 않고 그를 마주 보았다.
그러나 기연은 유인이 뭔갈 읽어내기도 전에 물로 씻은 듯 지워내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말한 건 생각 해봤어요?”
“……어떤 거요?”
“유인 씨 탓이라고 했던 거.”
유인은 물기 어린 순한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몇 초 뒤 유인이 아. 작게 소리 내니 그 소리만 듣고도 의중을 알아챈 기연이 짓궂게 물었다.
“벌써 잊어버렸어요?”
“생각……안 해봤어요. 그냥 하신 말 아니셨어요?”
“그런 말을 그냥 왜 합니까. 나 그렇게 한가한 사람 아닌데. 남유진이 얘기한 적 없어요?”
언니가 해준 말이야 무수히 많았지만 대부분 욕이었기에 유인은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입을 딱 다물었다.
슬며시 피어난 미소를 입가에 건 기연이 유인의 관자놀이 근처에 흐트러진 머리칼을 살며시 넘겨주었다.
“오늘부터 잘 생각해 봐요. 알겠어요?”
“……네.”
유인은 순식간에 닿았다 떨어지는 손가락을 보며 착한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원하는 답을 얻은 기연이 만족스럽게 씩 웃었다.
그러더니 자연스레 유인의 등 뒤에 붙어 양어깨를 가볍게 그러잡았다.
“데려다주고 싶은데 아까 그 친구가 눈에 불을 켜고 기다릴테니 오늘은 보내줄게요.”
“눈에 불? 누구, 지한이요?”
“아하. 그 친구가 지한이에요?”
유인은 마치 알고 있던 사람을 말하는 거처럼 지한의 이름을 발음한 남자가 수상해져서 의문스러운 눈빛으로 어깨 너머를 쳐다봤다.
“……지한이 아세요?”
“아뇨. 내가 유인 씨 친구를 어떻게 압니까.”
능청스러운 대꾸에 뭐라 더 물어볼 시간도 없이 기연이 팔을 뻗어 슬라이딩 도어를 열었다.
레스토랑 복도로 나아가기 바로 전, 유인은 귓가에 따끈한 숨을 내뱉는 입술이 바투 붙는 걸 느끼고 목덜미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내가 안 하면 유인 씨가 연락해요. 그래도 되니까.”
귓바퀴를 따라 고막 안으로 파고든 음성에 유인의 목덜미에 있던 솜털들이 죄 쭈뼛 일어났다.
격려하듯이 손바닥으로 잡고 있던 어깨를 두드린 남자가 유인을 놓아주었다.
휙 뒤를 돌자, 입구로 나가는 기연의 얼굴에 눈부시게 매력적인 볼우물이 아주 깊게 스며들어 있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