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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예정된 침범 (13/13)


13. 예정된 침범
2023.06.14.


자리에 돌아온 유인은 술기운이 싹 달아났다는 걸 깨달았다.

그 대신, 친구들 몰래 나쁜 짓을 잔뜩 하고 온 거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잘 익은 사과처럼 얼굴이 화끈대는 걸 막을 수 없어서 일부러 더 뻣뻣하게 굴었다.

유인의 그러한 행동이 자기들 탓이라고 단단히 오해를 한 친구들은 얌전히 식사에만 집중했고, 음식을 다 먹은 뒤엔 영양가 없는 대화를 좀 더 하다가 레스토랑을 나왔다.

지한이 발렛 맡긴 차를 찾으러 간 사이, 재희가 갑자기 볼일이 생겼다며 떠나버려서 둘만 돌아가게 된 차 안은 어색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재희는 술 마시러 간 거 같지?”

“내버려 둬. 우리한테 같이 마셔달라고 안 하는 게 어디야.”

유인이 던진 화젯거리가 맘에 안 드는지 전방을 주시하던 하얀 얼굴이 불편함을 내비쳤다.

반응을 보니 아까 재희와 제대로 화해를 하지 않은 모양이다.

저러다가도 잘 붙어 다니는 둘이라 걱정은 안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더 말을 붙일 분위기가 아닌 거 같아 유인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깥 풍경을 보며 둘이 뭐 때문에 싸웠더라, 기억을 더듬다가 레스토랑에 불쑥 나타난 남자가 얼핏 그려질 무렵에, 지한이 불렀다.


“유인아.”

평소보다 훨씬 무겁고 진지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유인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마침 신호에 걸린 차가 정차하고, 지한과 눈이 마주쳤는데 친구의 상태가 뭔가 이상했다.

소나기라도 맞은 양 늘 올라가 있던 입꼬리가 내려와 있고 생기가 돌던 눈꼬리도 축 처져 있다. 우중충하게 변한 지한이 유인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아까……기분 나빴어?”

“뭐가?”

“내가 그 이사님에 대해 물어봐서.”

아, 그거 때문이었나. 유인은 단박에 몸에 힘을 풀었다.

그 이사님과 지금까지 얽힌 일들을 다 말할 수가 없어서 어물쩍댔던 게 지한의 눈엔 물어본 일 자체를 싫어한다고 보여진 거 같았다.


“아니. 기분 나빴던 건 아냐.”

“……괜찮았어?”

“응. 근데 넌 언제 여자들이랑 술 먹고 다녔어? 난 왜 몰랐지?”

말이 나온 김에 사실 확인이나 하려 했더니 지한이 재희에게나 지었던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넌 그걸 믿어? 날 몇 년이나 봐 놓고도 모르냐. 하여튼 한재희가 문제야.”

“아니야?”

“어. 당연히 아니야.”

하긴, 고등학교 다닐 적부터 수많은 소녀 팬들을 몰고 다니고 대학에 와선 연영과 아이돌로 유명하기까지 한데도 지한은 무슨 이유인지 지금껏 연애하는 걸 보여준 적 없다.

아니, 연애는커녕 여자랑 있는 것도 본 적이 없었다.

뭐 하나 모자람이 없는 애가 그러니까, 예전에 재희가 우스갯소리로 윤지한 남자 좋아하는 거 아니냐는 농담까지 했더랬지.

유인은 다시 운전에 집중하는 친구에게 묻는 대신, 원래 그러던 것처럼 무신경하게 넘기기로 했다.

연애 같은 건 저도 잘 모르기도 하고, 또 참견해서 될 일 같으면 지금까지 저 잘난 윤지한이 솔로로 남아 있지 않았을 테니까.

유인이 다시 창밖에 시선을 두는 것으로 대화가 끝나고,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던 둘은 유인의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조용하던 둘은, 결코 짧지 않은 인사를 나눴다.


“내일은 재희랑 화해해. 알았지?”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네.”

“그래놓고 내일 카페에 같이 나타날 거잖아. 다 알아.”

“전혀 아닌데. 허언증이랑 이제 친구 못 하겠어.”

“친구 못 하겠단 말을 너무 들어서 너도 허언증 같아.”

“……유인아. 아무리 그래도 걔랑 나랑 동급은 아니지 않아?”

지한이 억울해서 죽을 거 같은 얼굴로 불만을 호소했지만 유인은 꿈쩍하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조수석 창문을 내린 지한이 하얗고 고운 얼굴을 찡그리며 울적하게 ‘남유인’ 하고 불렀다.

아무리 잘 다듬어진 얼굴을 무기 삼아도 유인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내 눈엔 둘 다 똑같아. 꼭 사과해. 조심히 가!”

 

 
미련을 뚝뚝 남기던 지한을 꾸역꾸역 보내고 집으로 올라온 유인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불편한 옷부터 벗어 던지고 씻었다.

개운해진 몸으로 침대에 눕자 그제야 평화가 조금씩 찾아드는 걸 느꼈다.


“하. 진짜 피곤하다…….”

동시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느라 한 고생과, 만나리라 생각지 못했던 이를 봐서 얻은 피로가 발끝에서부터 덮쳐왔다.

몸은 너무 피곤해서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는데 머리 안은 왜 더 활발해지는지 기억의 회로는 어느새 몇 시간 전 그 남자를 만난 호텔 장면이 재생되고 있었다.

참 이상하게도 밖에 잘 돌아다니지도 않는 자신이 날 잡아서 어디 갔다 하면 그 남자와 마주쳤다.

처음 클럽부터 오늘까지 전부 다 그랬다. 이제는 어디 가게 되면 그 남자가 있는지부터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닐까.

이게 전부 우연으로 가능한 일인지 믿기지 않다가도 눈앞에 일어나고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지 않나.

그리고 제일 큰 문제는, 유인이 그 누구도 넘어오지 못하게 그어놓았던 경계선을 그 남자는 너무 손쉽게 넘나든다는 점이었다.

지이이잉-.

베개 옆에서 울리는 진동에 눈꺼풀만 간신히 떠 화면을 보니, 제 말 하면 온다던 호랑이님이신지, 도기연 이사님이 보낸 메시지가 도착해 있다.


[집에 들어갔어요?]

바로 이런 게 그러했다.

집에 들어간 게 왜 궁금한지. 하루 종일 없던 연락은 왜 또 저렇게 쉬운지.

게다가 기다리는 것만 할 줄 알았지, 먼저 연락을 해보려는 것을 아예 생각조차 안 한다는 유인의 사고방식을 어떻게 알았는지 정확히 집어주기까지 했다.

대박 날 작품도 직접 고른다더니, 이 남자 진짜 그런 쪽으로 타고난 게 있는 거 아닐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들고 있던 기계의 진동음이 상쇄시켰다. 또 도기연 이사님.


[오늘 연락 못 한 건 바빠서 그런 거니 삐지지 말고. 내일은 꼭 답장해요. 잘 자요.]

“삐지긴 누가 삐졌다고! 허, 진짜.”

유인은 휴대폰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베개에 얼굴을 푹 묻었다.

그러다 꾸물꾸물 손을 뻗어 아직 켜져 있는 메시지를 다시 읽었다.

기분이 이상하다. 무섭고 불안하고 불편했던 상대에게서 잘 자라는 밤 인사를 듣게 될 줄 몰랐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이 자꾸만 가슴 안쪽을 간질거리고 술렁거리게 만든다.


“하아…….”

지금, 이 사람은 어디에 서 있는 걸까. 내가 그어놓은 선 밖일까, 아니면 하얗게 표시된 경계를 뭉개버리고 지워버리며 그 위에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벌써 모든 걸 뛰어넘고 안으로 뛰어 들어와 있는 걸까.

결론은 알 수 없었지만, 딱 하나 확실한 건 더 이상 그 사람이 제게 하는 행동과 말들이 더 이상 기분 나쁘거나 싫지 않다는 거였다.

****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던가.

투자하기로 한 드라마 리딩 현장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 기연은 들고 있던 태블릿에서 눈을 떼 차창 밖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쨍해서 화창한 날씨였던 거 같은데 지금은 어두운 잿빛 구름으로 온통 물들어서 한바탕 퍼부을 거 같은 분위기였다.


“김 비서, 오늘 비 온다고 했어요?”

운전대를 잡고 있던 어린 비서가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깨를 퍼덕거렸다.


“엇, 그게, 아뇨. 아니었는데……지금 상황을 봐선 조만간 내릴 거 같습니다.”

기연의 비서팀에 합류한 지 얼마 안 된 신입 비서는 별거 아닌 대답을 하면서 허둥지둥했다.

우물쭈물하는 걸 싫어하는 상사의 스타일을 알고 있기에 말 좀 똑바로 하라는 호령이 곧 떨어질 거라 생각하고 잔뜩 긴장해 눈을 깜박이는데, 어째 뒷좌석이 너무 조용하다.

룸미러를 재빠르게 힐끔대니 조각 같은 얼굴이 무심히 바깥만 쳐다보고 있다.

쉽게 가까워지지도, 적응이 될 거 같지도 않은 상사가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더 두려울 수도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신입이 겁에 질려갈 동안, 기연의 머릿속엔 오직 한 가지가 점령 중이었다.

비 내리면 안 되는데. 가뜩이나 비가 싫다는 그 애가 집에 갈 때 무척 곤란할 텐데.

날씨에 관심도 없고 의미도 두지 않던 기연은, 유인의 말 한마디로 평생 고수해오던 스타일을 단번에 바꿔버릴 만큼 변했다. 그래야겠다 정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결과였다.

기연은 여전히 햇빛이 가려져 어두컴컴해진 거리를 내다보며 물었다.


“오늘 오후 스케줄은 별거 없죠.”

“네? 네. 3시에 비서팀 회의 한 건 예정돼 있습니다.”

신입 비서가 목에 힘을 바짝 주고 딱딱하게 답했다.

기연은 창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며 음. 목을 울렸다.

거부할 새도 없이 틈새를 파고들고 들어와 당당하게 지분을 차지하고도 더 요구하는 남유인을, 기연은 이젠 완전히 인정하기로 했다.

정확하게는 일주일 전, SJ호텔 로비에서 주인이 잃어버린 휴대폰에 정신없이 전활 걸어댔던 장본인으로 추정되는 남자에게 안겨 걸어가는 걸 보고 난 후부터 그랬다.

그걸 제 눈으로 본 순간 당장이라도 성큼성큼 다가가서 그 팔과 품에서 떼어내 버리고 싶은 걸, 단둘이 온 게 아니라 엘리베이터 앞에 일행이 더 있는 걸 보고 나서야 겨우 참았더랬다.

꾹 참은 결과로 레스토랑까지 쫓아 올라가서 존재감을 한껏 내고 왔지만.


“이사님……다른 볼일 있으십니까?”

망설이는 기색이 가득한 목소리가 물어왔다.

기연은 행동도 말도 어설픈 신입 비서의 말에, 방금까지 하던 고민을 끝내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아침에 나눴던 메시지를 보고 잠깐 웃었다가, 짤막하게 입력했다.


[우산 있어요?]

답장은 조금 더뎠고, 짧았다.


[아뇨. 왜요?]

오늘이 무슨 요일이더라.

잠시 생각하던 기연은 빠르게 답을 채워 보냈다.


[강의 3시에 끝나죠?]

메시지를 발송하는 것과 동시에 신입 비서가 기연에게 재차 물었다.


“이사님?……혹시 개인 일정이 있으십니까?”

비서의 입장에선 제가 모르는 상사의 스케줄이 있을까 최대한 파악하고자 하는 의도였지만, 재차 이어지는 질문이 거슬린 기연의 서늘한 눈매가 룸미러를 응시했다.


“김영현 비서. 아직 모르는 거 같으니 한 번만 설명합니다.”

“네, 넵!”

“질문은 해도 좋은데 대답이 없으면 다시 하지 마세요. 비서 팀이 알아야 할 일이 있으면 나중에 내가 얘기합니다. 내 개인 스케줄은 이진석 비서실장이 관리하니까 신경 쓰지 말고. 정 알고 싶으면 이 비서한테 물어 봐요.”

“아……예, 옙.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이사님.”

운전 중이라 몸을 돌리지 못하는 그가 앞을 바라본 채로 목덜미까지 시뻘게져서 꾸벅거리자, 기연의 얼굴이 더 차게 식었다.

아무래도 저거, 잘못 뽑은 거 같은데. 저 신입을 차출한 진석에게 깊은 짜증을 느낀 기연은 손안의 진동을 느끼고 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혔다.


[네. 3시는 맞는데……왜 그러세요?]

얇은 목소리가 들리는 거 같은 문장을 읽는 그때였다.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하던 창에 톡- 토톡- 소리를 내며 빗방울이 하나 둘씩 맺히기 시작했다.


“어…….”

앞에서 당황하는 소리가 작게 들리고 곧이어 와이퍼가 빗자국을 밀어내는 소리가 났다.

기연은 기어이 비를 뿌리고야 마는 하늘을 보며 이상한 양가 감정에 갇혔다.

그 애를 보러 갈 수 있는 적당한 핑계가 생겨서 좋기도 하다가, 축축한 공기를 마주하고 어여쁜 얼굴을 찌푸릴 얼굴이 걱정되기도 했다.

참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긴 하다. 그동안 예쁘고 잘나고 재력에, 직업, 성격까지 모조리 가진 여자들을 숱하게 봤지만 저로 하여금 이런 감정을 갖게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근데 그걸, 이제 고작 23살인 여자애가 해냈다는 게, 그리고 정작 남유인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기연은 자조적인 미소를 입가에 띄우곤, 휴대폰 화면에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상대는 대기음이 두 번 울리기 전에 받았다.


-네, 이사님.

이제는 꾸물꾸물하게 물든 먹구름만 봐도 한 사람으로 귀결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기연은, 제 목표를 다시 한 번 다잡았다.


“오늘 비서팀 회의 취소합시다.”

남유인을 가지고야 말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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