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어이없는 일 (4/31)


4화. 어이없는 일
2023.03.11.


서지호를 따라간 곳은 도서관 옆 갓길에 세워진 그의 차였다.


“타.”

지호가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이수가 차에 타자, 차 안에서 서지호의 향기가 났다.

운전석에 오른 지호가 콘솔박스에서 향수를 꺼냈다.

금색 왕관 모양의 뚜껑에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갈색 병이었다.


“아, 이거구나. 잠깐만.”

이수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지호가 핸드폰 위로 향수를 쓱 내밀었다.


“이거 가져가.”

“응?”

이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호를 보았다.


“한국에선 구하기 힘든 향수야. 사진 찍어가도 못 살 거야.”

“아……. 그래도 네가 쓰는 걸 어떻게 가져가?”

“집에 또 있어. 얼마 안 남은 거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지호는 이수의 손 위로 향수를 내려놓았다.


“이 향수 때문에 기억했다며. 그만큼 좋았다는 거잖아. 거절하지 말고 받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었다.

이수는 받아도 될지 망설여졌지만, 가볍게 웃고 있는 서지호에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처럼 보였다.


“……고마워. 그리고 늦었지만, 그날 비행기에서 고마웠어.”

이수는 향수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난 별로 한 게 없는데.”

지호는 어깨를 살짝 으쓱하며 조수석을 향해 상체를 틀고 이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연한 미소를 짓고 있던 이수가 차분한 시선으로 지호를 마주 보았다.

침묵 속에 마주친 눈동자가 서로를 길게 응시했다.

이수는 말없이 그날을 떠올렸다.

서지호는 어디까지 기억하고 있을까.

눈물로 얼룩졌던, 밤새 울었던 나를 모두 기억하고 있을까.

흘러간 시간만큼 그 기억이 희미해졌기를.

기억하더라도 부디 모른 척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먼저 시선을 돌린 건 지호였다.

이렇게 담담하게 제 시선을 다 받아내는 여자는 처음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시선을 받은 쪽은 지호였는지도 모르겠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마치 말을 건네는 것 같았다.

낯선 눈빛에 지호의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지호가 정면을 바라보자 이수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차창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시야를 가렸다.

어색한 침묵 속에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만 가득한 차 안은 세상과 단절된 공간처럼 느껴졌다.

숨 쉬는 모든 공기가 서지호의 향기였다.

이수가 이제 차에서 내려야겠다고 생각할 때였다.

벨트를 채운 지호가 차의 시동을 켜며 물었다.


“집이 어디야?”

이수가 그건 왜 묻냐는 표정으로 지호를 보았다.


“데려다줄게. 비가 너무 많이 와.”

“아니야. 괜찮아.”

이수는 크게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서지호가 집까지 데려다준다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우산만 빌려주면…….”

“우산 안 빌려줄 거니까, 주소 불러.”

지호는 이수의 말을 자르고 주저 없이 내비게이션 검색창을 열었다.

**

달리는 차의 창밖으로 와이퍼가 쉴새 없이 빗물을 밀어냈다.

속도를 내지 못하는 차들이 차선마다 길게 늘어서 거북이걸음이었다.

앞에 가던 차가 빨간 불빛을 선명하게 밝히며 또 멈췄다.

차가 막힐수록, 비가 거세질수록 이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몸을 감싸는 안락한 시트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졌다.


“불편해서 죽을 것 같은 얼굴이네. 얼굴 좀 펴지.”

지호가 옆을 흘깃 보며 말했다.


“미안해서. 괜히 나 때문에…….”

“미안하긴. 내가 데려다준다고 한 거잖아.”

“…….”

“이렇게 비 오는데, 너 아니었어도 그랬을 거니까. 편하게 가.”

“……고마워.”

“어제 보니까 강동우한테는 무거운 가방도 잘 맡기던데…….”

무슨 말이라도 계속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지호는 문득 떠오른 말을 꺼냈다.

조금 궁금했기도 했고.


“그거야.”

“난 불편하고, 걘 편해서?”

이수는 말없이 가만히 있었다.


“진짜 그런가 보네.”

“동우랑 고1 때 같은 반이었어.”

“고등학교 동창……. 오래됐네.”

다정함이 철철 넘치는 눈으로 정이수를 바라보던 강동우가 떠올랐다.

정이수를 찾아왔다는 말에 어이없는 참견을 했던 것도.


“그때부터 친했던 거야?”

“응.”

“그냥……. 친구?”

“응.”

망설임 없는 대답엔 한 톨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호는 자기에게 예민하게 굴던 강동우가 생각나 피식 웃었다.


“근데 나 스키동아린 거 어떻게 알았어?”

이수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하준이한테 들었어.”

“아, 하준이랑 친하구나. 그래서 동아리 가입한 거야?”

“어? 아. 뭐 그런 것도 있고.”

왜 가입했더라.

그냥 충동적이었다고 하면 어이없어하겠지.


“나 저기서 세워 줘.”

내비게이션은 앞에서 우회전이라고 안내하는데, 이수는 골목 입구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직 비 오는데, 집 앞까지 가지.”

“아니야. 여기서 내릴게. 괜히 골목까지 들어가면 번거롭잖아.”

번거롭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었지만 여기까지 온 걸로 됐다고 생각하며 지호도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래. 그럼.”

“덕분에 편하게 왔어. 고마워.”

내내 불편한 얼굴로 앉아 있었으면서 편하긴.

지호는 고개를 살짝 틀고 낮은 웃음을 삼켰다.


“계속 고맙다는 말만 하게 되네…….”

이수가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호는 별일도 아닌 일에 고맙다며 밥을 사겠다, 술을 사겠다, 커피를 사겠다며 귀찮게 하는 여자들을 많이 봤다.

정이수도 그런 뻔한 말을 하려는 걸까.

지호는 이수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이걸 어떻게 다 갚지.”

물어보는 건지, 혼잣말인지 헷갈렸다.

고민하는 표정이 제법 진지해 보이기까지 했다.

시간은 흐르는데 꾹 다문 입술이 벌어질 줄 몰랐다.

뻔한 말은 안 할 생각인가.

아니면 망설이는 건가.


“그럼 같이 밥 먹을까. 술도 좋고. 고마운 사람이 사주는 걸로…….”

길어지는 침묵에 지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런 말을 먼저 해본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면 처음인 것 같았다.

하지만 누가 먼저 말하는 게 뭐 중요할까.

망설인다면, 대신 말해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

이수는 대답 대신 난처한 눈빛으로 지호를 바라보았다.

당황스러운 건 지호였다.


“왜? 그건 안 돼?”

이수의 눈빛을 읽은 지호의 이마가 옅게 찡그려졌다.


“그런 거 말고. 네가 나한테 해준 것처럼. 그렇게 갚았으면 좋겠어.”

무슨 대단한 은혜를 입었다고 받은 대로 똑같이 갚겠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에 지호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같이 밥 먹는 건 싫다 이거지.


“내 도움 필요할 때 얘기하면 도와줄게.”

이수는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 끝까지 상냥하기도 해라.

도움이라니. 대체 무슨.


 
태어나서 처음 당해보는 철벽에 지호의 목덜미가 뜨끈해졌다.


“번호.”

지호는 웃음이 남아 있는 얼굴로 이수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수는 당황한 표정으로 지호를 보았다.

어제 처음 봤을 때부터 서지호는 모든 게 거침없었다.

넘치는 자신감과 여유에서 나오는 그의 행동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당당했다.

부드러운 눈빛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특유의 분위기는 타고난 것 같았다.

이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분위기에 지면 안 되는데.


“왜? 이것도 안 돼?”

지호가 눈가를 좁히며 물었다.


“네 도움 필요할 때 얘기하라며. 빈말이었어?”

“……아니.”

이수는 망설이다가 뒤늦게 대답했다.

어차피 같은 동아리면 번호 정도는 공유하니까.

이수는 지호의 핸드폰에 번호를 입력하고 다시 건넸다.

지호가 통화버튼을 누르자 이수의 핸드폰이 울렸다.


“저장해 둬. 네 도움 필요할 때 연락할 테니까.”

지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핸드폰에 떠오른 낯선 번호를 물끄러미 보던 이수는 새로운 연락처에 서지호 세 글자를 입력했다.

이런 식으로 번호를 주고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이거 쓰고 가.”

이수가 벨트를 풀자 지호가 우산을 내밀었다.


“고마워. 우산은 언제 돌려줄까?”

“……다음 주에 줘. 내가 연락할게.”

지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말했다.

구하기도 힘든 비싼 향수는 선뜻 가지라고 줬으면서 기념품으로 받은 우산은 기어이 돌려받겠다니.

생각해보면 어이없는 일이었다.

**

유미는 카페 문을 열고 나왔다.

한 손엔 밀크티, 다른 손엔 우산을 들었다.

친척들을 배웅한 뒤에 밀크티 생각이 간절해 일부러 나온 거였다.

고인 빗물에 발이 빠질까 봐 땅만 보며 걷던 유미가 잠깐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멀리서도 단숨에 시선을 사로잡는 근사한 차가 보였다.


“어! 지호 오빠 차랑 똑같네.”

같은 차만 봐도 좋은지 유미의 얼굴에 빙그레 미소가 걸렸다.

흔한 차가 아닌데, 차종뿐만 아니라 색깔까지 같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유미는 차에서 눈을 떼지 않고 걸어갔다.

차는 골목 입구에 붉은 등을 켠 채 한참 동안 서 있었다.

그러다 달칵.

조수석 문이 열렸다.

유미는 걸음을 멈추고 눈을 크게 떴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우산이 삐죽 나오더니, 활짝 펴진 우산 밑으로 여자가 내렸다.

여자가 허리를 세우며 돌아서자 우산 아래 하얗고 말간 얼굴이 드러났다.

그 순간 유미는 커다래진 눈을 여러 번 깜박거렸다.


 
여자가 골목을 향해 걷는 동안 차는 움직이지 않고 계속 서 있었다.

유미가 가까이 가자 반쯤 내려간 조수석 창문 안쪽으로 남자의 옆모습이 얼핏 보였다.

한눈에 지호를 알아본 유미의 입술이 힘없이 벌어졌다.


“아!”

그때 창문이 스르륵 닫히며 차가 미끄러지듯 골목을 빠져나갔다.

여자의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말도 안 돼!”

유미는 쿵쿵 뛰는 심장박동을 느끼며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러다 속력을 더해 뛰기 시작했다.

**

이수는 현관문을 조심스럽게 잡아당겼다.

다행히 아무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2층으로 올라간 이수는 테라스에 우산을 펴놓고 욕실로 들어갔다.

거품 입욕제를 넣은 욕조에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다시 나왔다.

파우더룸 화장대 위에 지호가 준 향수를 내려놓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수는 멍한 눈으로 향수를 보다가 뚜껑을 열고 허공에 뿌렸다.

향을 들이마시자 자연스레 서지호가 떠올랐다.

앞을 보며 운전하던 옆모습, 다정한 미소, 감미로운 목소리, 어이없어하던 웃음과 낯선 번호.

문득 앞에 보이는 향수가 서지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하지 않은, 독보적인 존재감과 우아한 분위기가 비슷했다.


‘서지호랑 아주 잘 어울리네.’

어색한 분위기에 긴장한 탓인지 이수는 목덜미가 뻣뻣할 정도로 피곤했다.

편하게 왔는데, 하나도 편하지 않았다.

이수가 뻐근한 목을 만지며 욕실로 들어가려고 할 때였다.

유미가 노크도 없이 갑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왔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에 땀이 맺혀 있었다.


“너……. 지호 오빠랑……. 무슨 사인데…….”

숨이 넘어갈 듯 거친 호흡 때문에 말이 뚝뚝 끊어졌다.


“뭐?”

이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유미가 말하는 지호 오빠가 서지호라는 걸 깨닫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널 집까지 왜 데려다주냐고!”

깜빡임도 없는 두 눈이 이수를 찌를 듯이 노려보았고 거친 숨소리는 마치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다짜고짜 방으로 쳐들어와서 한다는 말이, 서지호랑 무슨 사이냐고?

그러는 너는 대체 뭐길래.

일그러진 유미의 얼굴을 빤히 보던 이수는 차분하게 말했다.


“너랑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지만, 아무 사이도 아니야.”

이러면 더 이상 할 말이 없겠지.

이수는 유미를 길게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됐지? 씻을 거니까 그만 나가.”

이수는 유미를 세워두고 욕실로 들어가 거품 가득한 욕조에 몸을 담갔다.

지호 오빠라고…….

이수는 피곤한 눈을 지그시 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