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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밀당 (6/31)


6. 밀당
2023.03.18.



“목요일에 동아리 개강 파티 한대. 너한테도 문자 왔겠다.”

스키동아리 회장이 보낸 단체 문자였다.

애라도 핸드폰을 확인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강 파티에 서지호도 오겠지? 와, 맨날 멀리서 보기만 했는데 드디어 대화라는 걸 해보겠네. 넌 어땠어?”

“뭐가?”

“차에서 얘기했을 거 아냐. 비 오는 날 단둘이 차 안에 있었으면. 으으윽. 분위기 묘했겠다.”

애라가 두 팔을 앞으로 모으더니 과장되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냥 뭐.”

“목소리 완전 죽이지? 나 지나가다 얼핏 들었는데, 완전 꿀 성대더라. 고막이 막 녹겠던데.”

“글쎄.”

녹을 정도였나. 달콤하고 감미롭긴 했지.

이수는 별말 없이 그날을 떠올려 보았다.

운전하면서 간간이 돌아보던 눈빛이나 목소리, 웃음이 생각나긴 하지만.

불편했고, 어색했고, 긴장했던 기억이 대부분이었다.


“아유, 넌 뭐가 이렇게 덤덤해. 서지호랑 단둘이 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어? 난 너무 떨렸을 것 같은데.”

“걔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이수가 어이없게 웃었다.


“야, 연예인보다 서지호가 훨씬 낫지. 재벌 3세에 잘 생겼지. 키 크지. 목소리 좋지. 성격도 좋다더라. 거기다 여자친구도 없대.”

“아는 것도 많네. 그렇게 좋으면 네가 잘해봐.”

“으으. 그러기엔 너무 넘사벽이야. 그런 애랑 사귀면 어디 불안해서 살겠니. 서지호 같은 앤 그냥 감상용이지! 만나긴 너무 부담스러워.”

애라는 고개를 잘게 흔들며 손사래를 쳤다.

지극히 현실적인 말에 이수도 공감하며 피식 웃었다.

**



“유미야, 너 스키는 탈 줄 아는 거야?”

유미의 무용과 동기 은지가 물었다.


“그까짓 거 배우면 되지.”

“너 스키 타다가 다치면 어쩌려고 그래. 나도 그래서 안 타는데.”

은지는 갑자기 스키동아리에 가입하겠다는 유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무용을 시작하면서부터 다칠 위험이 있는 운동은 일부러 피하느라 겨울마다 온 가족이 스키를 타는데도 혼자 구경만 했었다.


“안 다치면 되지.”

지호가 스키동아리에 가입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유미에게 그런 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힘들게 한국대에 왔지만, 전공이 다르니 학교에서 지호를 마주치는 것도 쉽지 않았다.

행여 지호가 싫어할까 봐, 자주 연락하는 것도 조심스러웠는데, 같은 동아리를 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만나고 연락할 수 있을 테니까.

김연수가 영국으로 떠난 이후 조금 소원해진 사이를 만회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유미는 스키동아리 방 앞에서 심호흡을 한번 하고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유미는 안으로 들어가며 밝게 인사했다.


“네, 어떻게 오셨어요?”

“저 신입생 회원 가입하러 왔는데요.”

유미는 혼자 오기 어색해서 데려온 은지의 팔짱을 꼭 끼고 말했다.

신입생 모집 기간엔 문만 열고 들어가도 반겨준다는데, 이상하게 썰렁한 분위기였다.


“아, 어쩌죠. 저희 모집 마감됐는데요.”

“네? 벌써요?”

당황한 유미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네. 어제 너무 많이 가입하는 바람에 일찍 마감됐어요.”

“어머! 자리가 하나도 없어요? 꼭 가입하고 싶은데!”

“그렇게 사정하는 학생들도 너무 많아서요. 죄송해요.”

유미는 얼굴을 와락 구기며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쉬었다.

마감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변수였다.

하루만 일찍 알았어도 좋았을걸.

왜 진작 몰랐을까. 하는 자책이 들어 가슴이 쓰렸다.

아쉬운 마음에 쉽게 발이 떨어지지 않아 동아리방을 둘러보는데, 게시판에 붙은 여러 장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잠시 뒤 사진 속에서 이수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유미의 얼굴이 무참히 구겨졌다.


‘하! 이수가 스키동아리였어? 아, 짜증 나!’

 

 

**

사흘이 지났지만 지호에게선 아무 연락도 없었다.

꼭 연락할 것처럼 번호를 달라고 하더니.

며칠 동안 이수는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을 수시로 확인하며 우산을 가방에 넣고 다녔다.

시간이 지날수록 신경이 거슬렸고 묘하게 기분이 상했다.

수요일 점심. 애라와 학생 식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경영대 건물에서 우르르 나오는 남자들 무리가 보였다.


“이수야, 저기 앞에 하준이 보인다. 서지호는 없나?”

애라가 고개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주변을 살폈다.

이수의 눈도 덩달아 가늘어졌다.


“……안 보이네.”

하준도 학생 식당으로 오는 길이었는지, 거리가 점점 좁혀지다가 건물 앞에서 만났다.


“하준아.”

이수가 부르자 하준이 친구들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어. 이수야.”

이수는 가방에서 지호의 우산을 꺼내 하준에게 내밀었다.


“부탁 좀 할게. 이거 서지호한테 좀 전해줄래?”

“아, 어쩌지. 오늘 지호 만날 일 없는데…….”

하준은 우산을 흘깃 보며 말했다.


‘지호가 저걸 직접 받으려고 나한테 부탁까지 한 거야?’

하준은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수는 자기가 직접 주면 될 걸 굳이 나한테 부탁하고.

둘이 지금 뭐 하는 거지.


“지호한테 연락해서 직접 줘. 약속하고 보면 되잖아.”

지호가 원하는 게 이거구나.

하준은 피식 웃음이 나려는 걸 참았다.


“응.”

이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그걸 모르나.

먼저 연락하기 싫어서 그러지.


“서지호 요즘 학교 나오긴 하는 거지?”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도 잠시 했었다.

하다 하다 별.


“그럼. 오늘 아침에도 잠깐 봤는데.”

“그렇구나.”

그런데도 연락을 안 한다는 거지.

잊어버렸나.

순간 그런 생각이 퍼뜩 들었다.

서지호는 우산 따위 안중에도 없는데 이수 혼자 며칠 동안 그의 연락을 기다리며 신경 쓰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이수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준은 이수에게 인사를 하고 친구들에게 갔다.


“이수야, 우산 그냥 가지라는 거 아니야? 계속 연락 없는 거 보면, 받을 생각이 없나 본데. 비싼 향수도 그냥 줬다며.”

애라가 이수에게 말했다.


“그러게.”

분명히 연락한다고 했는데.

잘못 들었나.

우산이 뭐라고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지호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향수를 주던 모습이 떠올랐다.

우산은 더 대수롭지 않겠지.

미련하게 혼자 뭘 기다린 거니.

이수는 갑자기 열이 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점심을 먹고 의대로 간 이수는 지호의 우산을 개인 사물함 안에 넣었다.

언젠가 생각나면 연락하겠지. 아니면 말고.

이수는 우산을 한참 노려보다가 쾅, 사물함 문을 닫았다.

**

저녁 9시가 넘어 도서관에서 나온 지호는 주차장으로 갔다.

차에 올라 시동을 켜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정문으로 나가는 주차차단기 뒤에서 브레이크를 밟고 멈췄다.

앞차의 요금 정산을 기다리며 지호는 창문을 내렸다.

시원한 바람이 훅 밀려들며 지호의 머리카락이 살짝 날렸다.

하준이 오늘 이수를 만났다고 했다.

우산을 전해달라기에 직접 연락해서 전하라는 말로 거절했다고.

지호의 예상대로였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

그러고도 이수에게 온 연락은 없었다.

번호를 알고 있으니 언제든 먼저 연락할 수도 있을 텐데.

끝까지 안 할 모양이지.

일부러 안 하는 걸까, 안중에도 없는 걸까.

지호는 먼저 연락하겠다고 해놓고 일부러 하지 않았다.

이수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기도 했고, 연락을 기다리게 하고 신경 쓰게 하고 싶기도 했다.

과연 그랬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쩌면 밥 먹자고 했다가 거절당한 뒤끝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유치해졌지.

지호가 픽 웃으며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올릴 때였다.

창문 너머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인도를 걸어가며 웃고 있는 이수가 보였다.

순간 지호의 얼굴로 반가운 미소가 급속도로 번졌다가 옆에 있는 동우를 발견하자마자 순식간에 눈살을 찌푸렸다.

뭘 저렇게 맨날 붙어 다녀.

무슨 재미있는 얘길 하는지 이수가 한 손으로 동우의 팔을 팡팡 치면서 웃었다.

타격감이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데 동우는 아픈 시늉을 하며 커다란 손으로 이수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그걸 보는 순간 지호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마주 보며 웃는 게 몹시 다정해 보였다.

그냥, 친구라며.

앞차가 움직이자 지호도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느리게 움직이는 차의 사이드미러로 활짝 웃는 이수와 뒤로 걸으며 이수를 마주 보고 있는 동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운전대를 잡은 지호의 손에 핏줄이 잔뜩 솟았다.

해맑은 표정의 이수는 지호의 연락 따위는 관심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저런 여자한테 혼자서 밀당이라니.

지호는 스스로 어이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

이수는 개강 파티 장소인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늦게 왔더니 이미 안쪽부터 익숙한 얼굴과 낯선 신입생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있었다.

동아리 총무인 동우는 안쪽 테이블에 선배들과 같이 있었고 먼저 온 애라도 구석 테이블에 있는 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안녕!”

이수는 여기저기 여러 번 고개를 움직이며 인사를 건네고 가까운 빈자리에 앉았다.

테이블에 영문학과 안주희와 신입생 김문영이 마주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언니. 저 기억하시죠?”

“그럼. 문영이 맞지? 주희는 되게 오랜만이다.”

“어. 이수야. 오랜만이야.”

주희는 길게 붙인 속눈썹을 파르르 떨면서 웃었다.

오늘따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꾸민 모습이 지나치게 화려했다.


“이번에 진짜 사람 많이 온 것 같아. 그치?”

“동아리 가입 마감됐다고 아쉬워하는 애들 엄청 많았어요. 제 친구들도 뒤늦게 가입할 방법 없냐고 저한테 막 물어보고.”

“그럴 만도 해. 내 친구들도 그랬거든.”

“왜?”

이수는 처음 듣는 얘기였다.


“서지호 가입했다는 소문 나서 난리 난 거잖아. 우리가 언제 가입 마감 같은 거 한 적 있어? 진짜 스키가 좋아서 가입한 건지 서지호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주희가 피식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근데 웃긴 건, 서지호 가입한 뒤로 한 번도 안 온 거 알아? 진짜 가입한 거 맞냐고 확인하는 애들도 있더라. 만약에 오늘도 안 오면 절반은 나갈걸.”

듣고 보니 오늘따라 모임에 잘 나오지 않던 얼굴이 많이 보였다.

주희도 그중 하나였고.

그때 갑자기 주희의 눈이 커다래졌다.


“어머! 왔다.”

그 말에 고개를 돌리자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하준과 지호가 보였다.

고개를 꺾고 올려봐야 하는 큰 키, 늘씬한 몸, 흠잡을 데 없이 잘생긴 얼굴.

허리를 살짝 숙이며 인사하는 서지호는 단숨에 모든 이목을 집중시켰다.

오매불망 그의 등장을 기다렸던 사람들의 얼굴이 반가움과 안도감으로 물들었다.

곧이어 그가 앉을 자리를 두고 눈치 싸움이 치열해지려는 순간 누구보다 빠르게 주희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기 앉아.”

주희는 자기 가방을 올려두었던 의자를 뒤로 빼며 지호를 향해 손짓했다.

마치 처음부터 지호를 위해 맡아둔 자리였던 것처럼.

지호가 이수 옆으로 지나가자 익숙한 향이 훅 밀려왔다.


“지호야, 난 안으로 들어갈게.”

하준이 지호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 갔다.

지호는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며 이수 앞에 앉았다.

비 오는 날 이후 처음이었다.

오늘도 안 올 줄 알았는데.

이수는 표정 관리가 잘되지 않았다.

덤덤하고 싶은데, 태연하게 미소 짓고 있는 서지호를 마주 보자 속에서 은근히 부아가 났다.

혼자만 신경 쓰고 기다린 것 같아 억울하기도 했고, 이상하게 서운한 기분마저 들었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하자 이수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빤히 쳐다보는 지호의 눈빛이 속을 꿰뚫는 것만 같아서 이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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