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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나를 기억해주세요. (8/31)


8. 나를 기억해주세요.
2023.03.25.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고 기분 좋은 웃음을 짓던 지호는 핸드폰을 꺼냈다.

손끝으로 화면을 몇 번 만지더니 귀로 가져갔다.

그러자 이수의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호는 소리 나는 쪽으로 가볍게 턱짓했다.


“너 전화 오잖아.”

“응.”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 액정에서 서지호의 이름을 확인한 이수는 황당한 얼굴로 지호를 쳐다보았다.

뭐 하는 거냐는 눈빛으로 보자 지호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전화 좀 받지.”

어이없는 상황이라고 생각했지만, 부드러운 눈빛으로 제압하는 지호의 분위기에 밀려 이수는 핸드폰을 귀로 가져갔다.


“……여보세요.”

“나야, 지호.”

바로 옆에서, 진짜 전화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말하는 지호를 보며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는 이수를 향해 상체를 완전히 틀더니 팔을 길게 뻗어 이수가 앉은 벤치 등받이 위로 올렸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이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마치 지호가 어깨를 감싸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서였다.


“늦게 연락해서 미안.”

지호는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에서 이수를 응시하며 말했다.

연락을 기다렸다는 이수의 말에 안도하며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착각이었을까.

그 말에 입꼬리가 올라갔던 건 또 어떻고.

우산을 돌려받겠다고 한 이유를 이제 더는 모르지 않았다.


‘이러려고 그랬지. 이수 입에서 기어이 기다렸다는 말을 듣고 싶어서.’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이수는 지호의 눈동자에 담긴 자기 얼굴을 보았다.

순간 심장이 크게 뛰는 기분이 들어 눈을 질끈 감았다.


‘술 때문일 거야.’

이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천천히 입술을 움직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전화하는 거잖아. 기다렸다며.”

능청스러운 대답에 이수는 하, 기막힌 웃음을 터트렸다.

기다렸으니 전화해준다 이건가.

짧은 웃음을 거둔 이수가 눈을 흘겼다.


“진작 좀 하지 그랬어. 며칠 동안 우산 들고 다니느라 힘들었는데.”

지호는 더 얘기해보라는 듯 말없이 이수를 바라보기만 했다.


“연락 안 하길래, 네가 잊어버린 줄 알았어. 연락하겠다고 분명히 들었는데, 잘못 들었나 싶었고 돌려달라는 말이 아닌데 내가 착각한 건가 싶었어. 그래서 며칠 동안…….”

이수는 길게 말하다 말고 말끝을 흐렸다.

지난 며칠 동안 내 마음이 어땠을지 궁금하지도 않을 남자에게 이런 얘길 왜 하고 있지 싶었다.

자기가 연락한다고 해놓고 내 연락을 기다렸다는 남자였다.

연락하기도 귀찮았다는 말인가.

내가 기다려서 다행이라는 건 또 뭐지.

술 때문인지 생각이 더디게 움직였다.

그래서 이수는 결론만 말하기로 했다.


“암튼 오늘 너 만날 줄 모르고 우산 안 가져왔어. 의대 사물함에 넣어놨으니까 원하면 지금 갖다줄게.”

지호는 그 말이 사물함에 넣어둔 우산처럼, 더 이상 이수가 그의 연락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들렸다.

기다리긴 했는데, 며칠 못 갔구나.

말없이 듣고만 있던 지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한테 먼저 연락하기는 싫었어?”

이수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내가 연락 안 하면 우산은 안 줄 생각이었네.”

지호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의도가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이수의 반응이 궁금했달까.


“우산 받을 생각은 있었던 거야?”

이수는 눈가에 억울함을 매단 채 발끈했다.

지호의 연락을 기다린 거 말고는 이수가 한 일이 없긴 했지만, 안 줄 생각으로 그랬던 건 아닌데.

며칠 동안 계속 신경 쓰며 기다렸던 게 떠올라 갑자기 울컥했다.


“그럼. 꼭 받을 건데.”

지호는 느슨하게 웃으며 벤치 위에 올린 팔을 세워 얼굴을 기댔다.

그러자 둘 사이의 거리가 더 좁아졌다.

취기 탓인지 이수는 경계를 세우지 않았다.


 


“알았어. 여기서 기다려. 지금 갖다줄게.”

루나 가든에서 의대까지 20분이면 다녀올 거리였다.

이수는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지호를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를 일이고, 계속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았다.

이렇게 만났을 때 돌려주면 깔끔하게 끝날 일이었다.

이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지호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성격 급하네.

지호는 손을 뻗어 이수의 손목을 잡았다.

빨리 줘버리고 끝내고 싶은 건가.

그렇다면 계속 신경 쓰게 만드는 수밖에.


“전화는 여기까지 하고.”

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핸드폰 든 손을 아래로 내렸다.

이수도 전화를 끊고 지호를 올려보았다.


“받을 거라며. 지금 준다는데 왜.”

“지금 말고.”

천천히 받아야지.


“비도 안 오는데, 들고 가야 하잖아.”

지호는 다정한 시선으로 이수를 눈에 담았다.

밤바람에 찰랑거리는 머리카락, 투명할 정도로 맑은 피부, 특유의 지적이고 단정한 분위기.

때론 처연했다가 설렐 정도로 싱그러웠다가 어이없게 해맑기도 한 얼굴.

이 중 무엇 때문에 나답지 않은 짓을 또 하려는 걸까.


“비 오는 날 만나자. 그날 받을게.”

오늘만 아니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호는 말을 이었다.


“그땐 네가 연락해. 기다릴게.”

허리를 깊이 숙여서 이수와 눈높이를 맞춘 지호가 눈도장이라도 찍는 것처럼 짙은 눈빛으로 이수를 바라보았다.

압도적인 그의 눈빛에 홀린 듯 이수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 순간 지호에게 잡힌 이수의 손목이 데일 것처럼 뜨겁게 느껴졌다.

**

금요일 아침.

이수는 머리를 말리며 거울에 비친 얼굴을 멍하게 보았다.

피부는 푸석했고, 눈도 제법 부었다.


‘최악이네. 시간 지나면 좀 괜찮아지려나.’

이수는 화장대 구석에 뜯지도 않은 색조 화장품을 흘깃 보다가 지호가 준 향수로 눈길을 주었다.

화장품 대신 향수를 잡았다.

뚜껑을 열어 손목과 머리카락 끝에 살짝 뿌렸다.

손목을 비벼 귀 뒤에 문지르자 기분 좋은 향기가 온몸을 감싸고 은은하게 퍼졌다.

신기하게 숙취로 지끈거리던 머리가 한결 나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수는 옷을 갈아입고 방에서 나왔다.

**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래. 이수야, 어서 앉아서 아침 먹어.”

이수가 1층 다이닝룸으로 들어가며 인사하자 최수민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른 아침인데도 빈틈없는 화장을 곱게 하고 화려한 꽃무늬가 수 놓인 앞치마를 입은 수민은 참하고 우아한 분위기를 풍겼다.


“잘 먹겠습니다.”

이수는 수민에게 깍듯하게 인사하고 원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식탁에는 개인별 사각 트레이에 샌드위치와 샐러드, 과일이 정갈하게 세팅되어 있었다.


“마실 건 뭐 줄까. 커피 아니면 주스?”

“전 주스 마실게요.”

잠시 뒤 수민이 바나나와 딸기를 갈아 만든 생과일주스를 이수의 트레이 위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어제 술 많이 마셨어? 얼굴이 좀 부었네.”

원진은 이수의 얼굴을 걱정스럽게 살폈다.

이수는 어제 집에 들어와 원진에게 얼굴만 슬쩍 보이고 후다닥 방으로 올라갔었다.

괜한 잔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


“조금. 어제 동아리 개강 파티했거든.”

유미나 아빠가 술 마신 다음 날 아침엔 어김없이 먹었던 따뜻한 콩나물국을 떠올리며 이수는 주스를 한 모금 마셨다.

감히 그런 걸 바랄 처지가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수민의 차별은 이렇게 무심한 듯 은근했다.

어젯밤 술 냄새를 짙게 풍기며 들어오다 수민을 마주쳤지만, 다음 날 이수의 숙취는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작년부터 한다는 스키동아리?”

“응.”

“이왕이면 의대 동아리를 하지.”

원진이 샐러드 접시에서 모차렐라 치즈와 올리브를 포크로 집으며 말했다.


“시간 많을 때 중앙동아리 한번 해보고 싶었어. 다른 과 애들도 만나보고 싶고. 예과 때 아니면 시간이 없잖아.”

이수는 노릇하게 구워진 새우를 입에 넣었다.

샐러드 한 접시에도 입맛 까다로운 원진을 위한 수민의 정성이 느껴졌다.

갖가지 다양한 샐러드 채소와 토마토, 새우, 치즈, 올리브 위에 직접 만든 드레싱 소스를 곁들인 맛이 일품이었다.

수민 덕분에 집에서 늘 맛있는 요리를 먹는 건 감사한 일이었다.


“재미는 있고?”

“응. 어차피 겨울에 스키 타러 가니까 따로 시간 낼 것도 없고. 친구들도 다양하게 만나니까 재밌어.”

샐러드 접시를 비운 이수가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의대 동아리보다 시간 더 뺏길 텐데. 공부할 시간 부족한 건 아니지?”

“아빠, 예과 때는 무조건 후회 없이 놀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어. 내년에 본과 올라가면 놀 시간도 없잖아. 어차피 예과 성적 보는 병원도 거의 없는데 뭐.”

원진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한번 놓친 성적을 되돌리는 게 어렵다는 걸 알기에 자꾸 잔소리가 나왔다.


“예과 성적 좋았던 애들이 본과 가서도 잘해. 공부하는 감 떨어지면 나중에 고생하니까. 선배들이 그렇게 말해도 공부는 챙기면서 놀아. 놀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암요. 암요. 나 지금까지 올A 받은 거 알잖아.”

이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어 원진의 눈앞으로 내밀어 보였다.


“당연히 널 믿지만, 혹시나 해서 하는 소리야.”

원진은 국내 최대규모의 미용성형 중점병원인 JS성형외과 대표 원장이었다.

본인의 전공인 성형외과뿐 아니라 치과, 피부과, 기능성 화장품 등 미용성형 인프라를 모두 갖춘 뷰티 센터로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오는 환자들도 많았다.

이수가 의사의 꿈을 갖게 된 이후 원진은 병원 규모를 크게 키우면서 병원 이름도 원진과 이수의 이니셜로 바꿨다.

엄마를 따라 런던에 가는 것도 포기하고 이수가 자기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는 걸 원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 이수를 원진은 늘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원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수의 어깨를 다정하게 토닥였다.

이수 앞에 앉은 수민은 대화에 끼지 않고 고개만 가끔 끄덕였다.


“아빠,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때 뒤에서 유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그래. 유미도 잘 잤어?”

“네.”

유미는 원진을 향해 방긋 웃었다.

원진 앞에서는 예의 바르고 애교 많은 유미였다.


“아빠, 이거 무슨 향수예요?”

자리에 앉은 유미가 갑자기 코를 킁킁거렸다.


“향수?”

“네. 냄새 너무 좋은데요. 아빠 향수 아니에요?”

“나 아니고 이수한테 나는 거야. 아까 이수 내려올 때부터 나던데. 오늘 향수 뿌린 거지?”

원진이 이수를 향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수는 샌드위치를 씹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언니가 향수도 뿌리고 다녀?”

유미는 이수의 휑한 화장대를 떠올렸다.

냄새에 예민해서 향수는커녕 디퓨저도 머리 아프다며 방에 두지 않는 이수였다.

화장도 안 하고 맨얼굴로 다니면서 어울리지 않게 향수를 뿌린 게 웬일인가 싶었다.


“언니, 이거 향수 이름이 뭐야?”

“어?”

이름이 뭐였더라. 향수병 모양만 생각날 뿐 이름까지 외워두진 않았다.

어차피 살 수도 없는 거라기에.


“선물 받은 거라서 이름은 모르겠는데.”

이수는 무심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향수를 선물 받았어? 누구한테? 남자친구?”

갑자기 원진이 반색하며 질문을 쏟아냈다.


“아니! 향수 얘기하다가 남자친구가 갑자기 왜 나와?”

뜬금없는 단어에 이수는 주스를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캑캑거리며 정색했다.


“향수 선물이 특별한 의미가 있거든. 그래서 연인들끼리 많이 해.”

조용히 앉아 있던 수민이 대화에 끼어들며 말했다.


“그래요?”

이수는 처음 듣는 얘기에 핸드폰으로 향수 선물의 의미를 검색했다.

‘언제나 나를 기억해주세요.’라는 의미가 있단다.

이수는 별거 아니라는 듯 정말 대수롭지 않게 향수를 주던 지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이런 의미를 알고 주는 표정이 아니었어.’

절대 그런 의미일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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