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딱 그만큼
(10/31)
10. 딱 그만큼
(10/31)
10. 딱 그만큼
2023.04.01.
“오빠! 너무 오랜만이야.”
“어, 유미야. 잘 지냈어?”
유미가 지호 앞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지호 친구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성형외과 의사인 원진 덕분에 몰라보게 예뻐진 유미는 시원한 이목구비에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전형적인 고양이상 얼굴이었다.
거기에 날씬한 몸매가 드러나는 니트 원피스를 입고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웃고 있는 유미는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지호야, 누구?”
하준이 지호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시선을 느낀 유미가 상냥하게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정유미라고 합니다.”
“아는 동생이야.”
지호의 대답에 유미는 입 안쪽 살을 살며시 깨물었다.
사실인데도 그 말에 서운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다.
“저도 이 학교 다녀요. 올해 무용학과 신입생이거든요.”
“아, 네. 안녕하세요.”
하준은 유미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지호는 덤덤한데, 지호를 보는 여자의 눈빛은 반가움과 애정으로 가득해 보였다.
흔한 일이라, 놀랍지도 않지만.
의외인 건 지호가 웃으면서 여자의 인사를 받아주고 있다는 거였다.
하준은 눈치껏 친구들을 데리고 자리를 피해 먼저 걸음을 옮겼다.
“유미야, 혹시 나 보러 온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본 거야.”
보고 싶어서 일부러 찾아온 거였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지호의 성격을 잘 알기에, 유미는 섣불리 들이대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어쨌든 우연히 만난 건 사실이니까,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고.
막상 지호를 보니 유미는 머릿속이 하얗게 된 것처럼 할 말이 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꿈에 그리던 한국대 캠퍼스에서 지호와 마주 서 있는 기분이 너무 벅차서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아직은 그저 아는 동생이지만, 언젠가는 연인이 될 날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럼. 난 가볼게.”
지호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 돌아서려고 했다.
“어, 오빠. 잠깐만!”
퍼뜩 정신을 차린 유미가 다급하게 지호를 불렀다.
어떻게 찾아온 우연인데, 이대로 허무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왜?”
“오빠, 내가 보낸 문자에 아직도 답장 안 한 거 알아?”
유미는 벅찬 마음을 간신히 누르고 할 말을 겨우 끄집어냈다.
만났으니 직접 대답을 들으면 될 일이었다.
“어? 내가 그랬나?”
지호는 전혀 몰랐다는 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을 만지면서 유미와 주고받았던 문자를 찾았다.
-오빠, 나 입학하면 나 밥 사주기로 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응.
-언제 사줄 거야? 오빠 편한 시간 알려주면 내가 맞출게.
-그래.
-오빠, 이번 주 토요일은 어때? 난 일요일도 좋고.
-그날 바쁜데.
-알았어. 그럼 언제 시간 되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 미안해 유미야. 답장한다는 걸 깜빡하고 잊어버렸어.”
지호는 한 손으로 목덜미를 쓸며 말했다.
“치이. 미안하면 더 많이 사줘.”
애교스럽게 입을 삐죽거리는 유미의 얼굴에 참을 수 없는 미소가 떠나질 않았다.
미안해하는 지호를 보니 며칠 동안 서운했던 마음이 눈 녹듯 녹아내렸다.
“지금 같이 갈래? 점심 먹으러 가던 길인데.”
“지금?”
유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이런 식으로 대충 학교에서 한 끼 사달라는 말이 아니었다.
근사한 식당에서 맛있는 요리를 먹으며 데이트하고 싶었는데.
“지금 안 되면 다음에 보고.”
안 되면 말고. 지호의 표정이 딱 그랬다.
유미는 잠시 망설였다.
이렇게라도 같이 먹을까, 아니면 다시 약속을 잡을까.
사실 어디서, 뭘 먹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지호와 함께인 게 중요한 거지.
“아니야. 지금 좋아! 대신 다음엔 더 맛있는 거 사줘.”
유미는 방긋 웃으며 지호를 따라갔다.
**
콩나물국으로 해장한 애라와 이수는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캠퍼스를 걸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 시원한 바람이 가볍게 불어와 산책하기에 좋은 날씨였다.
싱그러운 초록빛으로 풍성해진 나무들이 캠퍼스 중앙로를 따라 길 양쪽으로 길게 줄지어 있었다.
빨대로 아이스커피를 쪽쪽 빨아 마시던 애라가 갑자기 호들갑스럽게 이수의 팔을 팡팡 두드렸다.
“야야, 저기 봐!”
“어디?”
“저기 서지호 옆에 있는 여자 좀 봐. 너무 예쁘다. 몸매도 장난 아니고. 모델 같아.”
이수는 애라가 가리키는 곳을 보다가 눈가를 좁혔다.
“아.”
애라가 말하는 너무 예쁘고 몸매도 장난 아닌, 모델 같은 애는 바로 유미였다.
방긋방긋 웃는 유미와 연하게 웃고 있는 지호가 학생 회관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예쁘고 잘생긴 애 둘이 같이 있으니까 지나가는 사람들 다 흘끔거리고 가는 거 봐.”
애라의 말대로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 지호의 존재감은 주변을 압도했다.
그 옆에 있는 유미까지 덤으로 관심과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서지호한테 직접 말하라고 했더니, 진짜 만나러 갔네.’
멀리서 볼 때 두 사람의 분위기는 꽤 친밀해 보였다.
10년 넘게 알고 지냈다고 했으니 그럴 만도 하겠지.
유미는 애정이 넘치는 눈으로 지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얼굴이 있었구나. 새삼 놀랍기도 했다.
애라가 보는 것처럼, 서지호 눈에도 유미가 너무 예뻐 보이려나.
부드럽게 웃고 있는 지호를 보면 그럴 것 같기도 했다.
현대 의술의 도움을 많이 받기는 했지만, 유미가 몰라보게 예뻐진 건 사실이었고 원래 자기 얼굴인 것처럼 감쪽같아서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성형한 줄 모를 정도였다.
이수는 유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원진이 성형외과 의사로서 대단한 실력자임을 실감했다.
“애라야, 이제 가자.”
애라는 이수의 가정사에 대해 전혀 몰랐다.
숨겨야 할 비밀은 아니었지만, 드러내고 싶은 사실도 아니라서 이수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처럼 학교에서 유미를 마주치는 일이 자꾸 생기면 언젠가 얘기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이수의 입에서 긴 한숨이 나왔다.
“왜? 너 수업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 있잖아.”
“사람 많아서 일찍 가야 좋은 자리 앉아.”
이수는 먼저 돌아서 걸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유미는 밥 먹는 내내 흐뭇한 표정으로 지호를 바라보았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부러운 시선은 덤이었다.
‘학교에서 오빠랑 단둘이 밥 먹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지호를 독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캠퍼스 커플이 되면 매일 이런 날이겠지?’
유미는 생각만으로 좋아서 얼굴에서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학교는 다닐 만해?”
지호는 오랜만에 만난 유미를 보면서 물었다.
볼 때마다 인상이 조금씩 달라지는가 싶더니 이제는 어릴 때 얼굴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얼굴이 조금 낯설기도 했다.
“응. 재밌어. 근데 오빠 매일 학생 식당에서 밥 먹어?”
“매일은 아니고. 왜? 별로야?”
“아니. 매일 오빠랑 만나서 먹으면 좋을 것 같아서. 여기서 만나면 되는 거잖아.”
지호는 시선을 내리며 젓가락을 들었다.
어릴 때부터 봐온 유미가 편하고 귀엽긴 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엄마들 친분으로 덩달아 알게 된 동생.
지호에게 유미는 딱 그만큼이었다.
“유미야, 얼른 먹어. 나 2시에 수업 있어서 가봐야 해.”
조금만 잘해주면 선을 넘는 여자들이 있다.
유미가 동생처럼 편해도 가끔 이럴 때마다 거북함을 느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냉정하게 선을 그었겠지만, 엄마나 수민 이모를 생각해서 유미에겐 에둘러 거절하는 편이었다.
“응.”
유미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괜찮았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겠지.
지호는 서둘러 밥을 먹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남들 시선에 무심한 편이었지만, 유미와 함께 있어서인지 오늘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노골적인 시선이 쏟아졌다.
유미는 그걸 즐기는 듯 눈까지 맞추며 받아주고 있으니, 더 불편했다.
“다 먹었으면 나가자.”
“응. 커피는 내가 살게.”
“커피 안 마셔도 돼.”
“아……. 그래.”
유미는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이 지호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오빠…….”
유미는 이수 얘기를 묻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을 꺼낼지 난감해서 입술만 달싹거렸다.
지호도 연수를 통해서 유미 가족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지만.
이수가 나랑 한 살 차이 나는 전처 딸이라는 건 상상도 못 하겠지.
“왜?”
“근데 오빠 스키동아리는 왜 가입했어?”
유미는 결국 이수 얘기는 접어두고 동아리 얘기를 꺼냈다.
“그냥 재밌을 것 같아서.”
지호는 피식 웃었다.
동아리 가입 이후 여기저기 물어보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지호도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유미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하필 내가 아니라 이수랑 같은 동아리인 거냐고.
생각할수록 속이 쓰렸다.
“유미야, 넌 수업 없어?”
“있어.”
“그럼 이제 가봐.”
“응. 오늘 점심 잘 먹었어. 다음엔 진짜 맛있는 거 사줘. 학생 식당 밥 말고.”
유미는 지호를 향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응.”
“그리고 앞으로 내가 문자 보내면 답장 좀 바로 해 줘.”
“그래.”
지호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무심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멀리 서 있는 이수가 보였다.
지호의 얼굴에 연한 웃음이 번졌다.
눈인사라도 하려고 시선을 떼지 않고 있는데, 이수는 등을 돌리고 걸어갔다.
지호의 시선이 이수의 뒷모습을 따라갔다.
“유미야, 나 이제 가볼게. 잘 가.”
“벌써? 1시 30분 밖…….”
지호는 유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성큼성큼 걸어갔다.
유미는 지호의 뒷모습을 아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다 잠시 뒤 유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지더니 볼썽사납게 코를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
이수는 [영화의 이해] 강의실로 들어가 늘 그랬듯 앞자리에 앉았다.
수업을 기다리는 동안 이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J’의 노래를 틀었다.
‘J’는 남자라는 것 외엔 대중에게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는 가수였지만, 신곡을 낼 때마다 모든 음원차트를 장악할 만큼 인기가 많았다.
그 중엔 직접 만든 노래도 많았고, 무엇보다 독보적인 음색과 가창력이 압도적이었다.
이수는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노래를 들었다.
감미로운 노래에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고막을 녹인다는 건 이런 거지.’
노래 한 곡이 끝날 때쯤 가볍게 어깨를 건드리는 손길에 이수는 고개를 들었다.
“어! 하준아, 너도 이 수업 들어?”
깜짝 놀란 이수가 이어폰을 빼면서 물었다.
“응. 지난주엔 맹장 때문에 빠졌고 오늘이 처음.”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너무 반갑다.”
이수는 활짝 웃었다.
그때 하준의 옆으로 지호가 불쑥 나타났다.
뒤늦게 지호를 발견한 이수의 눈이 커다래졌다.
“난 안 반가워?”
자연스럽게 이수 옆자리에 앉은 지호가 싱긋 웃으며 물었다.
결국 셋이 나란히 앉게 되었다.
“……반가워. 너도 오늘이 처음이야?”
“아니.”
워낙 큰 강의실이라 지호가 뒤쪽에 있었다면 서로 못 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난 지난주에 너 봤어. 영화 열심히 보던데.”
지호는 비스듬히 웃으며 말했다.
이수는 놀란 눈으로 지호를 보며 지난주 수업을 떠올렸다.
영화를 보다가 주인공의 부성애에 감동해 갑자기 울컥했었다.
한번 터진 눈물이 쉽게 멈추지 않아 꽤 많이 울었는데.
설마 그걸 다 본 걸까.
급격히 민망해진 이수의 얼굴이 붉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