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기우제
(12/31)
12. 기우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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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기우제
2023.04.08.
“엄마! 이수 집에 왔어?”
“집에 오자마자 이수는 왜 찾아? 아직 안 왔는데.”
그 말에 유미는 급하게 2층으로 올라가 이수의 방문을 열었다.
곧장 파우더룸으로 들어가 화장대 위에서 향수를 찾았다.
“이거구나! 처음 보는 브랜드네.”
유미는 향수를 유심히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굉장히 고급스러워 보이는 향수였다.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피던 유미는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뚜껑을 열었다.
향수를 허공에 대고 몇 번, 자기 손목에 몇 번 뿌렸다.
향수 감별사라도 되는 듯 진지한 표정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시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너무 비슷해. 아무래도 같은 향수 같은데.”
확신이 서진 않았지만, 점심때 지호에게서 나던 향이랑 너무 비슷한 향이었다.
그때 좀 신경 썼더라면 제대로 기억할 텐데, 마음이 너무 들떠 있어서 감각이 온전치 않았었다.
이게 맞나? 독특해서 인상적이긴 했는데.
“너 남의 방에서 뭐 해?”
“앗! 깜짝이야.”
인기척도 없이 파우더룸 앞에 서 있는 이수를 보고 유미가 화들짝 놀랐다.
주인 없는 방에 몰래 들어온 것도 모자라 향수를 만지다 들켰으니 유미도 당황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아니. 아침에 향수 냄새 너무 좋길래. 뭔지 보려고 왔지.”
“…….”
“네가 향수 이름 모른다고 했잖아. 이름만 보고 나가려고 했어.”
“뿌리기도 했는데?”
얼마나 뿌린 건지 향수 냄새가 온 방에 진동했다.
“다시 맡아보고 싶어서.”
“볼일 끝났으면 가 봐.”
유미는 무슨 이유인지 미적거리며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점심에 봤던 옷차림에 어깨에 걸친 가방까지 들고 있는 걸 보면 집에 오자마자 바로 올라온 것 같은데.
향수 이름을 확인하는 게 뭐가 급해서 저러는 건지 의아했다.
“안 나갈 거야?”
“……이거 누구한테 선물 받은 거야?”
유미는 이수의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실 향수보다 누가 선물해준 건지가 궁금했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이수는 유미가 더 묻지 못하게 일부러 짜증스럽게 말했다.
서지호가 줬다는 걸 알면 난리 나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수는 피식 웃었다.
어쩌다 내가 이런 걱정을 하고 있지.
숨길 이유가 없는 걸 숨겨야 하는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그냥. 궁금할 수도 있지 뭘.”
유미는 입을 삐죽거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수는 턱짓으로 방문을 가리켰다.
“알았어! 그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칫.”
툴툴거리며 몸을 홱 돌린 유미가 마지못해 밖으로 나갔다.
이수는 앞으로 방문을 잠가야겠다고 생각했다.
**
유미는 침대에 엎드려 핸드폰으로 찍어둔 향수를 검색했다.
이수가 선물 받은 향수는 초고가 니치 향수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가격으로 유명한 영국 향수 브랜드였다.
국내에 공식 판매처가 없어서 구하기도 힘든 향수였다.
“이런 걸 이수한테 선물할 사람이 누굴까. 진짜 남자친구라도 생겼나.”
유미는 손목에 남은 향을 다시 맡았다.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않은 채 골몰하던 유미는 핸드폰을 꺼냈다.
“향수 핑계로 오빠한테 연락해보면 되겠다.”
지호에게 자연스럽게 연락할 핑계가 생겨서 반갑기도 했다.
-오빠, 나 궁금한 게 있어서 연락했는데, 혹시 오늘 오빠가 뿌린 향수 이거 맞아? 냄새가 너무 비슷한 것 같아서. 확인하는 대로 답장 좀 해줘.
유미는 몇 번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가 향수 사진과 함께 전송 버튼을 눌렀다.
**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환한 햇살에 지호는 눈을 찡그렸다.
침대에 누워 협탁 위로 팔만 길게 뻗었다.
핸드폰을 열어 확인한 시간은 오전 6시 50분.
다시 눈을 감으려다가 앱을 열고 습관처럼 날씨를 확인했다.
비 올 확률 30%.
안 올 확률이 70%라는 얘기였다.
“오늘도 글렀네.”
지호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핸드폰을 옆에 툭 내려놓고 몸을 일으켰다.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듯 커튼을 활짝 걷었다.
쏟아지는 햇빛에 반짝거리는 한강을 내려 보던 지호는 웃음이 났다.
화창하게 맑은 하늘을 보고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린 탓이었다.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비 오는 걸 기다렸다고.”
이수를 마지막으로 본 지 일주일째.
그사이 보려고 들면 볼 수 있었지만, 이상한 오기가 생겨 기다리는 중이었다.
미련하게 비가 오기를.
기우제라도 지내야 하나.
**
“이수야, 오늘 오후에 비 온다는데, 우산 가져왔어?”
애라가 도서관 로비에서 이수를 보자마자 물었다.
“아니. 비 안 올 것 같은데. 그냥 흐리다 말 거야.”
이수는 원래도 그랬지만 요즘 매일 아침 잊지 않고 날씨를 확인했다.
정확히는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오랫동안 날씨 앱을 사용해 왔던 이수는 비 올 확률만 보고도 대강 짐작했다.
가끔 이변이 생길 때도 있었지만.
“그럼 다행이고. 나 우산 안 가져왔거든.”
“걱정하지 마. 안 와.”
“서지호 우산은 아직도 사물함에 있어?”
“응.”
“그냥 받으면 될걸. 벌써 며칠째니?”
“그니까.”
이수가 코를 찡긋하며 말했다.
“근데, 걔 일부러 그러는 거 같지 않아? 내 직감은 좀 그런데.”
애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개강 파티 이후로 애라는 기회만 있으면 같은 소리를 했다.
자기 직감이 어쩌고저쩌고.
“아휴, 또 뭐?”
“솔직히 너도 이상하잖아. 서지호가 줬다는 그 향수 내가 찾아봤는데, 진짜 말도 안 되게 비싼 거야. 그게 뭐 영국 왕실에서 인증받은 향수라나. 야, 그런 걸 막 주면서 우산은 받겠다는 게 너무 핑계 같잖아.”
“핑계는 무슨. 특별한 우산인가 보지. 의미 있는 물건이면 가격이 무슨 상관이야.”
“아닌 것 같은데. 의미 있는 거면 더 빨리 받아야지!”
애라는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면서 이수의 손목을 들어 자기 코 밑으로 가져갔다.
“이게 그 향수야?”
“응.”
애라는 가슴이 부풀 정도로 숨을 들이마시더니 눈을 감고 음미하는 시늉을 했다.
“흐으음. 이게 서지호의 향기구나. 흐흐. 냄새 너무 좋다.”
정말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린 이수는 애라의 팔을 잡아끌었다.
“빨리 가자. 이러다 수업 늦겠어.”
그때 로비 기둥 옆에 서 있던 유미가 멀어지는 이수의 뒷모습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하! 그게 오빠한테 받은 향수였어?”
우연히 이수를 본 유미는 마주치기 싫어서 일부러 몸을 숨겼다.
엿들을 생각은 아니었지만, 기둥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하는 얘기는 너무 잘 들렸다.
유미가 보낸 문자에 지호는 맞다고 답장해줬고, 우연히 같은 향수겠거니 생각하고 넘어갔었다.
“아무 사이도 아니라더니!”
유미는 손톱 끝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이수가 자기를 속였다는 생각에 분해서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자기가 뿌리는 향수를 선물하는 건 무슨 의미일까.
그러고 보니 같은 날 같은 향수를 뿌렸었다.
설마 커플 향수?
유미는 머릿속을 파고드는 끔찍한 생각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
아침부터 안 좋았던 이수의 컨디션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심해졌다.
애라의 유쾌한 에너지를 받으며 조금 나아지나 싶었는데, 다시 몸이 처지기 시작했다.
머리도 지끈거리고 목도 따끔거렸다.
감기가 오려나. 오늘만 잘 버티면 주말인데.
이수는 금요일 마지막 수업을 듣기 위해 무거운 발걸음으로 강의실로 들어갔다.
앞자리까지 내려갈 기운도 없어 이수는 입구에서 가까운 빈자리에 그냥 앉았다.
뒷자리에 앉으니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식 강의실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앞쪽에 지호와 하준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수업이 시작됐고, 3시간을 겨우 버틴 이수는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갔다.
**
집에 오니 6시가 조금 넘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이수는 대충 저녁을 때우고 약통에서 감기약을 찾아 먹었다.
하루만 약 먹고 버텨보고 내일도 안 좋으면 병원에 갈 생각이었다.
푹 쉬고 나면 괜찮아질 때도 있으니까.
없는 기운에도 주방을 대충 정리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한숨 자고 나면 괜찮아지겠지.’
이수는 내일이 토요일인 게 다행이라 생각하며 약에 취해 잠들었다.
몇 시간쯤 지났을까.
이수는 방문을 두드리는 요란한 소리에 힘겹게 눈을 떴다.
하아. 문이 잠겼으면 그냥 내려갈 일이지 왜 저래.
“야, 정이수! 문 열어. 얼른!”
쾅. 쾅.
문을 부수기라도 할 작정인지, 주먹으로 치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얼른 문 열라니까!”
혀 꼬인 발음에 평소보다 톤이 높은 목소리였다.
9시 23분.
협탁 위 디지털시계를 확인하며 이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취했으면 방에 가서 곱게 잘 것이지.
이수는 몽롱한 정신으로 문을 달칵 열었다.
문을 열자 만취한 유미가 흐느적거리며 이수를 밀치고 들어왔다.
곧장 파우더룸으로 들어간 유미는 한 손에 향수병을 들고 다시 나왔다.
“너! 너 나한테 거짓말했지? 어?”
이수는 황당한 얼굴로 유미를 멍하게 보았다.
“이거! 오빠가 준 거라며!”
유미는 이수의 눈앞에 향수병을 들이밀며 흔들었다.
초점이 흐릿한 눈을 부릅뜨고 이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는 유미는 성난 고양이처럼 표독스러웠다.
“너 오빠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네 입으로 그랬잖아!”
이수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유미가 어떻게 알았을까. 생각하다가 속에서 짜증이 치솟았다.
내가 유미 남자친구를 뺏은 것도 아닌데 술 취해서 행패 부리는 것까지 봐줘야 하는 건지.
하필 오늘처럼 아픈 날. 상대할 기운도 없는데.
이수는 탄식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말해봐. 너 지호 오빠랑 진짜 무슨 사이야?”
유미가 입을 열 때마다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그거 이리 주고 네 방으로 가.”
이수는 화를 누르고 술 취한 유미를 달래듯 말했다.
유미에게 손을 뻗자, 유미는 어림없다는 듯 향수 든 손을 위로 올리면서 다른 손으로 이수를 세게 밀쳤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잃은 유미가 비틀거리다 크게 휘청이면서 넘어졌고, 손에 든 향수병은 허공으로 날아갔다.
쨍그랑! 대리석 바닥으로 떨어진 향수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깨졌다.
파편이 튀고 방 안은 향수 냄새로 진동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서늘하게 굳은 얼굴로 깨진 향수병을 보는 이수를 향해, 유미가 벌떡 일어나 달려들더니 머리채를 잡았다.
“야! 너, 내가 오빠한테 관심 가지지 말랬지? 나쁜 년! 네가 날 속여!”
그 순간 이수는 그동안 눌러왔던 화가 화산처럼 폭발하는 것 같았다.
인내심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이수도 지지 않고 유미의 머리채를 잡자 유미가 앙칼진 비명을 질렀다.
“악! 너 미쳤어? 이거 안 놔!”
요란한 소리에 뛰어 올라온 수민은 그 광경을 보고 두 사람을 뜯어냈다.
“엄마! 엉. 엉. 저게 내 머리 다 뜯어놨어.”
유미는 헝클어진 머리를 흔들며 바닥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다.
깨진 유리에 유미가 다치진 않았는지 살피던 수민은 갑자기 이수에게 성큼 다가오더니 있는 힘껏 이수의 뺨을 내리쳤다.
찰싹하는 찰진 소리와 함께 고개가 휙 돌아간 이수가 몇 걸음 뒤로 밀려나며 휘청거렸다.
캄캄해진 눈앞으로 번쩍하고 별이 보였다.
“보자 보자 하니까. 네가 감히 유미를 건드려! 건방지게!”
날카로운 수민의 목소리가 유미의 통곡 소리와 함께 뒤섞였다.
흥분한 수민이 계속 뭐라고 떠들었지만, 이수의 귀엔 웅웅거리는 소리로만 들렸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캄캄했던 눈앞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침대 모서리에 손을 짚고 겨우 정신을 차린 이수는 집 밖으로 뛰쳐나왔다.
서러움이 북받쳐 눈물이 핑 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