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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비 오는 밤 (13/31)


13. 비 오는 밤
2023.04.12.


이수는 정신없이 뛰었다.

어디라도 좋으니 집에서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빨리 뛰었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것도 아빠의 아내에게.

얼얼한 통증보다 참을 수 없는 수치심으로 치가 떨렸다.

뺨을 때리던 수민의 사나운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골목을 벗어나 대로변에 이르러서야 이수는 가쁜 숨을 고르기 위해 멈췄다.


“하아……. 하아…….”

목 끝까지 차오르는 숨과 분노, 설움이 한데 뒤섞여 가슴이 꽉 막히는 기분이었다.

자꾸 차오르는 눈물 때문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다.


“엄마…….”

이럴 때 엄마가 있었더라면.

약속대로 엄마가 서울에 왔더라면 이런 일은 겪지 않았을 텐데.

엄마가 원망스러우면서도 보고 싶었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몸을 겨우 지탱하던 기운이 전부 빠져나갔다.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이 꺾인 이수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끗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주저앉은 채 무릎을 끌어안고 있는데, 툭툭 머리 위로 뭔가가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얼굴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 이런 날 비까지 내리다니 타이밍 진짜…….”

이수는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비를 맞았다.

끔찍한 기억이 비와 함께 씻겨 내려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눈가에 고였던 눈물이 빗물과 섞여 흘러내렸다.

이수는 차가운 빗속에서 눈물이 나는 대로 울었다.

금세 젖은 머리카락 끝으로 빗방울이 맺히고 티셔츠가 빗물로 얼룩졌다.

3월이라 아직 밤이면 쌀쌀했다.

거기에 비까지 맞으니 온몸에 한기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대로 집에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도망치듯 나오느라 지갑도 없이 침대 위에 있던 핸드폰만 겨우 들고나왔는데.


“그나마 다행인가.”

이수는 비를 피할 곳을 찾다가 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의자에 앉아 비가 그치길 기다리는데, 으슬으슬 오한이 들면서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자꾸만 정신도 몽롱해졌다.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필요한데.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애라의 번호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면서 화면 위로 서지호의 이름이 떠올랐다.

이수는 움직이던 손을 뚝 멈췄다.

서지호가 왜 전화했을까 생각하다가, 비가 오면 만나기로 했던 약속이 떠올랐다.

설마 이 시간에 우산을 달라고 전화한 걸까.

잠시 머뭇거리던 이수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지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귀에 부드럽게 감겨왔다.

그 짧은 한마디에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어.”

이수는 잠긴 목을 겨우 움직여 소리를 쥐어짜 냈다.


[지금, ……밖이야? 빗소리 들리는데.]

“……어.”

턱이 덜덜 떨려서 제대로 된 말을 하기가 힘들었다.

젖은 옷과 머리카락으로 매서운 바람이 불어와 체온을 모조리 앗아가고 있었다.

뼛속까지 시렸다.


[비 많이 오는데……. 시간도 늦었고.]

“……어.”

이수는 어, 라는 말밖에 할 줄 모르는 것처럼 그 말만 반복했다.


[……이수야.]

참으로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저 이름을 불러줬을 뿐인데, 왜 따뜻하다고 느껴지는 걸까.

이수는 감고 있던 눈을 느리게 떴다.

이상하지.

매일 듣는, 평생 들었던 내 이름인데, 서지호의 목소리로 듣는 그 이름이 왜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걸까.

그가 처음으로 불러준 이름에 마음이 목 끝까지 울렁이며 위태롭게 차올랐다.

참을 새도 없이 눈가로 눈물이 고였다가 흘러내렸다.


“흑, 흑.”

이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멈추지 않고 계속 차올랐다.


[너……. 지금 우는 거야?]

놀란 듯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 대답이 없자, 지호는 또다시 이름을 불렀다.


[이수야…….]

왜 하필 또 서지호일까.

어쩌자고 이 남자 앞에서 또 울고 있는 건지.

울음이 멈추길 기다리는지 침묵이 이어졌다.

이수는 무릎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었다.

눈물과 함께 모든 게 빠져나간 기분이 들었다.

들고 있는 핸드폰이 쇳덩이처럼 무거웠다.

머리가 핑 돌면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불안이 엄습했다.


[이수야, 너 지금 어디야. 내가 갈게.]

이수의 흐느낌이 멈추자, 기다렸다는 듯 지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지호는 유리창으로 긴 줄을 그리며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았다.

기우제라도 지낼까 했더니 밤 10시가 넘어서 비가 내렸다.

기다리던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지호는 어딘가 아쉬운 얼굴이었다.

우산을 돌려받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지호는 울리지도 않는 핸드폰을 손에 들고 화면을 열었다.

12, 13, 14. 지호는 핸드폰에 떠오른 숫자가 하나씩 바뀌는 걸 바라보았다.

3시간처럼 느껴지는 3분이 흘렀다.

지호는 얼마 안 남은 인내심을 끌어모아 그 뒤로도 7분을 더 기다렸다.

비가 오면 만나자고 했고, 그땐 지호가 이수의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지호의 인내심은 이미 바닥이었고 10분을 겨우 채운 지호는 최근 통화목록에서 이수의 이름을 찾았다.

늦었지만 아직 잘 시간은 아니었고.

생각해보면 못 만날 이유도 없었다.

이수만 괜찮다면 지호가 집 앞으로 가면 될 일이었다.

지금까지 연락이 없는 건, 비가 오는 줄 몰라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핸드폰을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이게 뭐라고. 전화 한 통 걸면서 이렇게 많은 생각을 하는 건지.

지호는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를 흘리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비 내리는 야경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귀에 가져갔다.

신호음이 여러 번 울렸다.

벌써 잠들었나.

오늘 오후 강의실 뒷자리에 앉은 이수를 잠깐 봤었다.

멀어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어딘가 기운 없어 보였는데.

아픈 건가.

지호의 얼굴로 걱정이 스치는 찰나 신호음이 끊기더니 아무 말 없이 빗소리만 들렸다.

먼저 말을 건네자 이수는 한 글자로 짧은 대답만 했다.

목소리라기보다 마지못해 목을 긁어내는 소리에 가까웠다.

지호는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자 빗소리에 섞인 흐느낌이 작게 들렸다.

우냐고 물었더니 대답이 없다.

운다는 얘기겠지.


‘하아, 또 왜…….’

순간 지호의 속이 뜨거워지며 심장이 크게 뛰었다.

한 손으로 얼굴을 계속 쓸어내리며 꽤 오랫동안 이수의 울음이 진정되길 기다렸다.

영원 같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호의 눈빛은 어둡게 가라앉았다.

기다리는 동안, 만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이든.

지호는 손에 잡히는 옷을 아무거나 걸치고 목적지도 모른 채 차 키를 들고 현관을 나왔다.

핸드폰을 쥔 손으로 핏줄이 툭툭 솟아났다.

지하 주차장에 내려갔을 때쯤 이수의 흐느낌이 잦아들었다.


“앞에 보이는 거 뭐든 얘기해 봐.”

지호는 차에 올라 시동을 켜며 물었다.

이수가 알려준 곳을 내비게이션에 입력했다.

이 시간이면 10분이면 갈 거리.


“금방 가니까 전화 끊지 마.”

이수에게 당부하며 지호는 속도를 올렸다.

**

이 밤에 서지호를 불러냈다.

염치없는 줄 알면서 오겠다는 지호를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우는 걸 들켰으니 괜찮다는 거짓말이 통할 리 없었다.

솔직히 그가 오겠다고 했을 때 이수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엉망인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할 걸 알면서도.

몸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누구든 옆에 있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어차피 처음도 아니잖아.

비행기에서. 강의실에서. 그리고 오늘.

어쩌면 애라보다 서지호가 나을지도 몰랐다.

지호를 기다리는 동안 이수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차분한 지호의 목소리와 숨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조금씩 안정을 찾아갈 무렵 지호의 차가 보였다.

덜덜 떨리는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차에서 내린 지호가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왔다.

이수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이게 무슨…….”

이수를 본 지호는 말문이 막혔다.

비에 젖은 머리카락과 옷, 울긋불긋한 얼굴, 새파래진 입술, 바들바들 떨리는 어깨.

지호는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이수를 끌어안았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가녀린 몸이 아무 저항 없이 지호의 품 안으로 쓰러지듯 들어왔다.

이수의 젖은 머리가 지호의 턱 끝에 닿았다.


“……와 줘서 고마워.”

이수의 입에서 들릴 듯 말듯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아무 말 안 해도 돼.”

지호는 자신의 체온이 전해질 수 있도록 이수를 빈틈없이 끌어안고 커다란 손으로 이수의 등을 넓게 쓰다듬었다.

비에 젖은 옷이 차갑고 축축했다.

추위에 얼마나 떨고 있었던 건지, 이수의 떨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이수는 지호에게 온전히 몸을 맡긴 채 가만히 있었다.

지호의 품 안이 너무 따뜻하고 포근하다는 것 말고 다른 생각은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점점 새하얘지고 있었다.

유미가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 지호에게 안겨 있는 지금까지.

모든 게 현실 같지 않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 일단 차로 가자.”

이수의 몸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지호는 이수의 등 뒤로 팔을 두르고 떨리는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조수석에 이수를 태우고 차에 오른 지호는 뒷자리에 있던 담요를 덮어주고 히터를 가장 세게 틀었다.


“금방 따뜻해질 거야.”

지호는 시트에 몸을 기댄 이수를 굳은 얼굴로 바라보았다.

집에 있다가 나온 것처럼 편한 옷차림에 가방도 없었고, 운동화를 구겨 신은 발은 맨발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지호는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속상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이수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는데 빨갛게 부은 뺨 위에 사선으로 길게 긁힌 상처가 보였다.

날카로운 뭔가에 할퀴어진 자국이었다.

지호의 놀란 눈빛에 이수는 손을 들어 뺨을 가렸다.


“너…….”

어쩌다 생긴 상처인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상처였으니까.

지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뻗었던 손을 가져와 핸들을 세게 움켜쥐었다.

차 안의 공기가 숨이 막힐 것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굳은 얼굴로 마른세수를 한 지호는 이수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안전벨트를 채웠다.


“……집에서 나온 거야?”

목 끝까지 담요를 덮은 이수는 덜덜 떨리는 고개를 겨우 끄덕였다.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눈이 자꾸 감겼다.

낮은 한숨을 내쉰 지호는 기어를 바꾸고 차를 출발시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는 하늘을 뚫을 것처럼 높이 솟은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지호는 늘 세우던 자리에 차를 주차하고 시동을 껐다.

차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었다.


“걸을 수 있겠어? 내가 안을까.”

“……괜찮아.”

이수는 어딘지 묻지도 않고 지호가 이끄는 대로 차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걸어가는 동안 이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몇 번이나 휘청거렸다.


“나한테 기대.”

지호는 이수의 어깨를 바짝 끌어당겨 자기 가슴에 기대게 했다.

이수의 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지호는 병원으로 갈까 잠시 망설였지만, 지금 이수 상태로 복잡한 응급실에서 진료를 기다리는 건 무리였다.

차라리 집에 있는 상비약을 먹고 차도를 보면서 편히 쉬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그래도 열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때 병원에 가기로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이수는 자꾸 감기는 눈꺼풀을 힘겹게 밀어 올렸다.

눈앞이 흐릿하고 귀가 먹먹해졌다.

빠르게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이수는 끝도 없는 바닥으로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핑그르르 도는 기분에 간신히 지호의 옷깃을 붙잡았다.


“이수야!”

몽롱해지는 정신에 지호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모든 감각이 아득하게 멀어지며 이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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