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다른 건 다 괜찮은데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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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다른 건 다 괜찮은데
2023.04.15.
“엄마! 나 어떡해! 엉! 엉!”
유미는 바닥에 철퍼덕 앉아 울었다.
낮에 이수 얘기를 엿들은 이후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지호와 아무 사이 아니라던 이수의 거짓말에 속은 것도 분해서 죽을 것 같았다.
유미는 작정하고 술을 진탕 마시고 집에 들어왔다.
향수를 들이밀고 따지자 놀라서 쳐다보던 이수가 너무 괘씸해서 이가 갈렸다.
“집에 데려다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유미가 혼자서 악을 쓰는 동안 수민은 멍하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깨진 향수병과 진동하는 냄새, 방구석에 앉아 헝클어진 머리를 흔들며 울고 있는 유미까지.
엉망진창이었다.
수민은 협탁 위 시계를 확인했다.
밤 9시 55분. 얼마 안 있으면 원진이 집으로 올 시간이었다.
병원 회식이 있어 늦는다고 했지만, 원진은 술 약속이 있어도 12시를 넘기는 법이 거의 없었다.
술 취해 들어오는 일도 드물었고, 매사에 자기 관리가 철저한 사람이었다.
수민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뒤늦게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이수의 뺨을 때렸고, 그 바람에 이수가 밖으로 뛰쳐나갔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아. 미쳤어!”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수민은 그동안 이수가 눈엣가시 같았어도 앞에서는 상냥하게 대하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수가 유미의 머리채를 잡은 걸 본 순간, 수민은 마치 제 머리가 잡힌 것처럼 이성을 잃고 눈이 돌아갔다.
유미의 비명에 놀란 나머지 상황을 제대로 살펴볼 겨를도 없었다.
저도 모르게 이수의 뺨으로 손이 올라갔다.
후회되긴 했지만, 솔직히 이수를 때리는 순간 속이 좀 후련하기도 했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이 많았던 탓이다.
이수의 방 역시 그랬다.
원진과 결혼하면서 2층 방은 당연히 유미가 쓸 줄 알았는데, 원진은 반대했다.
언젠가 이수가 오면 써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커다란 침실, 정원이 한눈에 들어오는 테라스와 유미 방 크기와 맞먹는 서재, 드레스룸과 파우더룸이 있는 욕실까지 2층의 절반을 차지하는 공간을 같이 살지도 않는 이수를 위해 계속 비워뒀었다.
무슨 성역이라도 되는 것처럼.
언제나 좋은 건 전부 이수의 몫이었다.
원진이 그렇게 만들었고,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수가 괘씸하고 미웠다.
유미 몫까지 이수가 다 차지하는 것 같아서 수민은 늘 불만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참았어야 했는데, 이제 어떡하지? 들어오면 이수부터 찾을 텐데.”
수민은 마음이 급해졌다.
일단 방부터 정리해야 했다.
술 냄새를 잔뜩 풍기며 울고 있는 유미를 달랬다.
“유미야, 이제 방으로 내려가! 내일 술 깨면 엄마랑 다시 얘기하자. 응? 아빠 오실 시간 다 됐어. 얼른!”
수민은 징징거리는 유미를 일으켜 1층으로 내려보냈다.
지금은 유미의 술주정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하고 이수의 방을 원래대로 정리한 뒤 이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했던 대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두 번, 세 번을 걸어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화났구나.”
수민은 손톱을 잘근 씹었다.
이수를 때린 걸 알면 원진이 어떻게 나올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미쳤어. 미쳤어. 내가 그동안 어떻게 참았는데.”
5년 동안 노력한 게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버릴 것 같아 불안해졌다.
초조해진 수민은 이수에게 문자를 보냈다.
-이수야, 어디니? 우리 얘기 좀 하자. 내가 아깐 제정신이 아니었어. 엄마가 사과할 테니까 전화 좀 받아.
자존심을 구기고 사과 문자를 보냈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수민은 마음이 놓이지 않아 문자를 또 보냈다.
-이수야, 아빠한테 너 친구 집에 갔다고 얘기해둘게. 그리고,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아빠한테 아까 있었던 일 말하지 않을 거지? 우리끼리 풀면 될 일을 아빠까지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그래. 네 방은 엄마가 깨끗하게 치워놨으니까 늦더라도 꼭 들어와. 기다리고 있을게.
구구절절한 문자를 보내놓고, 수민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렇게까지 전처 딸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나 싶어 자괴감이 들었다.
**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수는 거대하고 폭신폭신한 솜사탕 위에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너무 부드럽고 포근해서 깨지 않길 바랐지만,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이수는 눈을 떠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눈을 뜨고 마주하게 될 상황이 어떨지 몰라서 겁이 났다.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 속도만큼 천천히 시야가 열렸다.
흰색 천장이 보였고, 낮은 조도의 조명이 따뜻하게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이수는 커다란 방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커튼에 반쯤 가려진 밖은 아직 어두웠고, 침대 맞은편에 벽 한가득 대형 TV가 걸려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엘리베이터를 탔고, 지호에게 기대서 정신을 잃은 게 마지막이었는데.
‘서지호는 어디 간 거지.’
이마 위에 차가운 얼음주머니가 올려져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까지 온몸에 열이 들끓었던 기억이 났다.
이수는 얼음주머니를 내리고 천천히 머리를 들어 몸을 세우고 앉았다.
비에 젖었던 티셔츠가 아직도 눅눅했다.
침을 삼키자 목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입 안이 바짝 말라 쩍쩍 갈라지는 것 같았고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다.
‘몇 시쯤 됐을까?’
이수가 침대 밖으로 내려가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났어?”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침대 머리맡에 엎드려 있던 지호가 스르르 허리를 세웠다.
거기 앉아서 잠이 들었다 깬 것 같았다.
음영이 드리워진 얼굴은 피곤해 보였지만,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여전히 숨길 수 없는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
“몸은 좀 어때?”
“아까보다 많이 좋아졌어.”
잠에서 깨자마자 서지호와 같은 공간에서 이런 대화를 나눈다는 게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인데.
늘 그렇듯 자연스럽고 여유로운 지호의 태도에 이수도 덩달아 덤덤하게 말했다.
어쩌면 매사에 저럴 수 있는지.
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협탁 위에 있던 생수병을 들고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았다.
생수병과 함께 내민 지호의 손바닥 위에 흰색 알약 두 개가 보였다.
“해열제랑 감기약이야. 미리 먹고 잤으면 좋았을 텐데.”
이수가 올려다보자 지호는 어서 먹으라는 눈짓을 했다.
약을 삼키고 이수는 물 한 병을 다 마셨다.
그러자 건조했던 입 안과 목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이수는 지호에게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여기, 어디야?”
“우리 집. 혼자 살거든.”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여기가 지호의 집인 게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놀라야 하는데, 이수는 차분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운전하는 동안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은 건 이수였다.
그땐 수민과 유미가 있는 집만 아니면 어디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차에서 내리면서 짐작은 했지만, 막상 서지호 집에 와 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지금까지 서지호 침대에 누워 잠들었다니.
이수의 난처한 표정을 보던 지호는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쓸데없는 걱정은 할 필요 없고. 그 시간에 여기 말고 갈 데가 없어서 온 거니까.”
“그런 게 아니라. 너무 미안해서.”
“뭐가.”
잠이 묻어 있는 지호의 목소리 끝이 조금 갈라졌다.
“갑자기 쓰러진 것도 그렇고. 나 때문에 너 잠도 못 자고. 비 맞아서 옷도 젖었는데……. 네 침대에서 이렇게.”
이게 대체 무슨 민폐인지.
우리가 이럴 만한 사이도 아닌데.
이수는 얼굴을 마주 보기 민망해서 이불 끝을 잡고 시선을 내렸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좀 놀라긴 했지. 비 맞고 쓰러진 사람은 처음이라.”
“아침부터 몸살 기운이 있었어. 집에서 약도 먹었는데 추워서 좀 떨었더니 그만.”
얼마나 황당했을지 짐작할 만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왔을까.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대답을 들어서 좋을 게 없는 질문은 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이수는 진심으로, 미안했다.
“그래도 이만해서 다행이야. 계속 아프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내가 전화 안 했으면 어쩔 생각이었어?”
다른 사람을 불렀을까. 사실 그게 궁금하기도 했다.
이수가 누구를 떠올렸을지.
“애라한테 전화하려고 하는데 네 전화가 왔어.”
“타이밍이 아주 좋았네.”
지호는 빙그레 웃으며 10분 만에 인내심이 바닥났던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수의 이마로 지호의 손이 올라왔다.
“아직 열 있는데. 지금이라도 병원 갈래?”
“아니. 괜찮아.”
어지러운 건 여전했지만, 병원에 갈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지금은 아파서 열이 나는 건지, 눈앞에서 빤히 쳐다보는 지호 때문에 열이 나는 건지 헷갈렸다.
“……안 되겠다.”
낮은 한숨과 함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지호가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지호의 손에 면봉과 연고가 들려 있었다.
“뺨이 아까보다 더 부었어.”
지호는 이수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말했다.
“아.”
수민에게 뺨을 맞았던 게 불과 몇 시간 전 일인데,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지호는 연고가 묻은 면봉으로 이수의 뺨 위로 조심스럽게 선을 그렸다.
면봉이 스칠 때마다 이수가 움찔거리자 상처에 고정되어 있던 지호의 시선이 이수의 눈동자로 맞춰졌다.
서로의 숨결까지 느껴지는 거리에 이수는 잠시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따가워?”
“조금.”
“이제 다 됐어.”
“……고마워.”
지호에게 고맙다고 말한 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매번 그런 상황에서 지호를 만나는 건지.
“방 안에 욕실 있으니까 써. 갈아입을 옷도 꺼내놨는데 맞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젖은 옷보다는 나을 테니까 갈아입어.”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지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고마운 게 한두 개가 아니지만, 그중 가장 고마운 건 그거였다.
아무 말 없이 옆에 있어 주는 거.
많이 놀라고 황당했을 게 분명한데, 오히려 자신보다 더 담담하고 태연한 그를 보고 마음이 차분해졌다.
지난밤 겪었던 일들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지호가 가진 특유의 여유로운 분위기가 이수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지금 몇 시야?”
“새벽 3시쯤 됐어.”
“아.”
이만 가보겠다고 말하고 일어나야 하는데, 이수는 솔직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시간에, 이 몸으로 갈 수 있을까.
지갑도 없어서 집에 가려면 지호한테 돈부터 빌려야 하는데.
이수는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싶어서.
그렇다고 뻔뻔하게 눌러앉기도 민망하고.
“지금 설마 가려는 건 아니지?”
“응?”
“몸도 아직 안 좋은데, 어디 갈 생각하지 말고.”
“…….”
“약 먹었으니까 더 자. 또 쓰러지지 말고.”
이수는 난감한 얼굴로 이불 끝만 만지작거렸다.
“아직도 내가 불편해서 그래?”
염치없고, 미안하고 민망하고 부끄럽고.
너무 많은 이유가 한꺼번에 떠올랐는데, 지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만 불편할 때도 되지 않았나. 같이 밤도 보낸 사인데.”
농담처럼 던진 지호의 말에 이수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불편해서가 아니라 미안해서 그런 건데.
어젯밤 서지호를 만난 이후로 온통 미안한 일뿐이라 그 말을 하는 것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지호가 이수의 어깨를 꾹 눌렀다.
“내가 나갈 테니까 편하게 누워. 너 일어나면 약 먹이려고 옆에 있었던 거니까.”
이제 와 지호에게 괜찮은 척하기엔 너무 늦었지.
이미 못 볼 꼴 다 보인 마당에 몇 시간 더 머문다고 뭐가 달라질까.
이수는 현실과 타협하는 쪽을 택했다.
“옆방에 있을게. 혹시 자다가 또 아프면 전화해.”
이수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지호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