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 전화위복 (17/31)


17. 전화위복
2023.04.26.



 
원진의 진료실 문을 열자 소파에 앉아 있던 수민이 고개를 들었다.

수민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처럼 이수를 보고 놀라지도 않았다.


“네가 이리로 올 것 같더라. 엄마 연락은 받지도 않더니. 바로 아빠한테 온 거니?”

얕은 한숨을 내쉰 수민이 이수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빠한테 다 얘기하려고?”

“그게 불안해서 오신 거예요?”

불안이라는 말에 자존심이 상한 수민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하지만 이내 굳어 있던 얼굴을 부드럽게 펴며 미소를 그렸다.


“어제 너 그렇게 나가고 내가 얼마나 걱정 했는 줄 아니? 밤새 한숨도 못 자서 지금도 정신이 몽롱해. 엄마가 어제 큰 실수 했어. 미안해 이수야.”

수민이 이수에게 다가오며 왼쪽 뺨을 살폈다.

부은 뺨 위로 손톱에 긁힌 상처가 사선으로 길고 빨갛게 그어져 있는 걸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어머, 어떡해. 상처가 났네.”

“…….”

“이수야, 엄마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아. 어제 딱 한 번이었어. 너도 알지? 실수였어.”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는 거잖아. 이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우리끼리 풀고 넘어가자.”

“제가 왜요.”

“넌 아빠가 무조건 네 편일 거로 믿고 이러는 거지? 아빠 입장은 생각 안 해봤니? 너랑 나 사이에서 아빠가 얼마나 난처하시겠어. 괜히 집안 분위기 흐려놓지 말고. 엄마가 사과할 때 받아.”

수민은 입술을 끌어당겨 억지웃음을 지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수의 눈빛에 속이 부들부들 떨렸다.

원진을 믿고 기세등등한 이수가 괘씸했다.


“넌 아빠가 결혼에 또 실패하기라도 바라는 거야?”

이수가 좀처럼 풀어질 기미가 없자, 수민은 다급한 마음에 으름장을 놓았다.

달래서 안 되면 협박이라도 하는 수밖에.

이수는 실패라는 말에 헛웃음이 났다.

설사 원진이 안다 해도 그럴 일은 없을 텐데, 수민은 어떻게든 이수의 입을 막아보겠다고 억지를 부리고 있었다.


“네 생각대로 아빠가 네 편 들어준다 치자. 그럼 나랑 네 아빠 사이는 어떻게 될 것 같니? 너도 알겠지만, 나 누구보다 최선을 다하고 살았어. 그리고 그동안 내가 너한테 한 걸 생각하면 이 정도는 그냥 눈감아줄 수 있는 거 아니니? 적어도 네가 양심이 있다면 말이야.”

“제 양심이요?”

이수는 황당한 표정으로 수민에게 되물었다.


“후우.”

수민은 답답한지 숨을 몰아서 내쉬었다.


“엄마가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사과하잖아.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너 하나 때문에, 기어이 가정불화 생기고 나랑 아빠 사이가 멀어지길 바라니?”

이수는 수민의 협박과 회유,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저 독립할 생각이에요.”

“뭐, 뭐?”

“바라시는 거잖아요. 제가 집에서 나가는 거.”

그 말에 놀란 수민의 눈이 커다래졌다.

늘 바라던 바였다.

다시 예전처럼 이수 없이 세 식구만 오붓하게 살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았다.


“그거 저도 원하는 거예요.”

이수는 멈칫하는 수민의 표정을 지켜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 얘길 지금 꺼낸다고?”

“네.”

“그걸 아빠가 허락하시겠니?”

“쉽지 않겠죠. 그러니까 전 이거 그냥 못 넘어가요. 이걸 기회 삼아 나갈 거예요.”

“뭐? 그래서 기어이 얘기하겠다고?”

“지금 당장은 이 일로 서로 불편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제가 나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두 분이 싸우는 거 저도 원치 않지만, 멀리 보면 이러는 게 서로 좋지 않겠어요?”

수민은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지금 당장 원진에게 욕을 먹더라도 이수가 집에서 나가기만 하면 그야말로 앓던 이가 빠지는 건데.

차라리 그게 낫지 않을까.

달칵.

그때 진료실 문이 열리더니 수술복 차림의 원진이 안으로 들어왔다.


“오늘 무슨 날인가? 두 사람이 한꺼번에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원진은 조금 지친 얼굴이었지만, 반가운 웃음을 보이며 이수의 등을 다정하게 쓰다듬고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이수와 수민을 번갈아 보며 의자에 등을 기댄 원진은 생수병을 열고 물을 마셨다.


“그게…….”

긴장한 수민이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말문을 열자 이수가 나섰다.


“아빠 수술은 다 끝난 거야?”

“응. 마지막이었어.”

“나 아빠한테 상의할 게 있어서 왔어.”

“둘이 같이?”

“아니.”

이수는 안절부절못하고 쭈뼛거리고 있는 수민을 보며 말했다.


“먼저 들어가신다면서요.”

“어? 아. 그, 그래. 내가 그랬지.”

수민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못내 불안한 눈빛과 표정으로 이수를 보았다.


“아빠랑 둘이서만 얘기하고 싶은데.”

“그래? 무슨 얘기길래, 괜히 긴장되네.”

원진이 조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이수는 오른쪽 머리만 귀에 꽂은 채 왼쪽 얼굴은 머리카락을 내려서 가리고 있었다.


“그래. 두 사람 오붓하게 얘기하고 들어와요. 전 먼저 들어갈게요.”

“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이수는 수민이 나갈 수 있게 진료실 문을 열어주었다.

수민이 마지못해 문밖으로 나가면서 이수의 얼굴을 다시 돌아보았다.

원진이 듣고 있어 차마 말은 못 했지만, 수민은 착잡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별일이야 있겠어요?”

이수가 수민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료실 문이 닫히고 수민은 불안한 마음으로 무거운 걸음을 뗐다.

**

원진은 이수가 좋아하는 정통일식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넓은 다다미방 안에 원진과 이수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미리 전화하고 온 덕분에 자리에 앉자마자 크고 작은 접시 수십 개가 테이블 위로 빼곡하게 놓였다.


“밖에서 둘이 밥 먹는 거 오랜만이네.”

“응.”

원진은 이수의 얼굴을 살피며 테이블 위에 놓인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평소와 다른 옷차림에 뭔가 긴장한 얼굴의 이수를 보고 걱정스럽게 말했다.


“어제는 친구 집에서 자고 온 거야? 생전 외박은 안 하더니.”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수술하느라 점심도 제대로 못 먹은 원진을 생각해 이수는 일단 식사부터 하기로 했다.


“우리 먼저 먹고 얘기해. 아빠도 배고프잖아.”

“그럴까. 그럼 일단 맛있게 먹자.”

원진이 젓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이수는 식사가 끝나고 원진에게 할 얘기들을 정리하느라 머릿속이 복잡했지만,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 때문에, 왼쪽 뺨의 상처는 여전히 가려진 채였다.

이수는 오른쪽 머리만 단정하게 귀에 꽂고 다양한 종류의 회를 입에 넣고 오물오물 씹었다.

접시 위의 음식들이 거의 사라졌을 무렵, 원진이 먼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수도 기다렸다는 듯이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을 한 모금을 마셨다.


“더 먹지 그래.”

“아냐. 배부르게 먹었어.”

원진은 이수의 얘기를 들을 준비라도 하듯이 의자 등받이에 편하게 기댔다.


“아빠, 나 독립하고 싶어.”

 

 
이수는 본론부터 말했다.

구구절절 서론을 길게 말하는 것보다 이러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원진은 의자에 기대고 있던 상체를 바로 세웠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집에서 나가고 싶다고. 원래 올해 엄마가 서울 오면 나가기로 했던 거잖아.”

“그거야, 엄마가 왔을 때 얘기고.”

“엄마 없이 혼자라도 나갈래.”

이수는 단호한 표정으로 원진을 마주 보았다.


“나 지난 5년 동안 그거 하나 바라보고 살았어. 엄마랑 살면 정말 좋겠지만, 그렇게 못하더라도 집에서 나가고 싶어. 아빠가 도와줘.”

“……집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원진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이수가 이런 얘길 꺼낸 건 처음이었다.

한 번도 힘들다거나 불편하다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이렇게 작정한 듯 얘길 하는 걸 보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 짐작했다.

잘 지낸다고 믿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원진은 마음이 철렁했다.


“처음부터 난 불편했어. 늘. 항상.”

이수는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 최대한 차분하게 말하고 싶었다.

감정적으로 떼쓰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어려서 달리 방법이 없었고, 엄마랑 살 때까지만 참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견딘 거야. 아빠가 날 믿어주는 만큼 나도 아빠한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고.”

원진은 말없이 이수의 말을 들었다.


“근데, 나만 참았던 건 아니었던 것 같아.”

이수는 왼쪽 뺨을 가렸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상처를 드러냈다.

원진에게 보란 듯이 고개를 살짝 틀었다.


“너, 얼굴에 그게 뭐야?”

미간을 잔뜩 좁힌 원진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믿을 수 없다는 듯 힘이 잔뜩 들어간 눈빛이 무섭게 변했다.


“어젯밤에 난 상처.”

“대체 누가.”

원진은 손으로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렸다.


“유미가 술 먹고 내 방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어. 그리고 유미 엄마가 뒤따라와서 이렇게 만들었고.”

수민에게 호칭을 쓰는 일은 드물었지만, 굳이 말해야 할 땐 그래도 새엄마라고 했는데.

이수는 수민을 유미 엄마라고 불렀다.

원진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나 말리려고 왔나 봐. 내가 아빠 찾아올 줄 알고.”

“……미안하다.”

“아빠가 왜.”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상상도 안 해봤어. 너한테 늘 잘해준다고 믿었는데.”

“아빠 앞에서는 그랬지.”

원진은 자기가 모르는 뭔가가 더 있구나 싶어 낯빛이 어두워졌다.

이수가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


“아빠가 어떻게 해줄까?”

“나 혼자 살게 해줘. 아빠는 해줄 수 있잖아.”

“그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거야?”

원진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수 엄마가 한국으로 온다면 모를까. 이수 혼자 내보낼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데.


“같이 살면 언젠가 또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몰라. 실수였다고 사과하던데, 유미 엄마도 뭔가 참고 있던 게 폭발한 거겠지.”

“그런 사람인 줄 몰랐어. 너한테 감히 손찌검이라니…….”

원진은 끓어오르는 화를 가라앉히려 거친 숨을 길게 내쉬었다.


“나 때문에, 두 분이 싸우는 것도 싫어. 그런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아빠한테 진작 말하지. 너 혼자 마음고생했다고 생각하니 아빠 마음이…….”

“아빠가 그럴 거 없어. 다 지난 일이고. 난 아빠 원망 안 해.”

이수는 아빠의 자책을 듣고 싶지 않아 말을 잘랐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일을 탓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는 서로 마음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어. 유미 엄마도 내가 5년 전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 당황했겠지. 엄마랑 살 줄 알았던 전처 딸이 집으로 갑자기 쳐들어온 셈이니까. 난 그렇게 이해하기로 했어.”

“독립하는 문제는 아빠가 고민해 볼게.”

“고민하지 말고 결정해줘. 난 가능하면 빨리 나가고 싶으니까.”

이수는 고민의 여지가 없다는 걸 분명히 말했다.

아빠로서는 갑작스러운 일이라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이수는 번복할 생각이 없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데로, 좋은 집도 필요 없어. 그냥 나 혼자 살 정도면 돼.”

원진은 답답한지 물을 벌컥 들이켜고 생각이 깊어진 눈으로 이수를 바라보았다.

이수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은 눈으로 원진을 보았다.

오늘 설득하지 못하면 흐지부지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독립만 할 수 있다면 어제 뺨을 맞은 것쯤은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전화위복인 셈이지.


“일단 병원으로 다시 가자. 얼굴부터 치료해야겠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