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10분만 (18/31)


18. 10분만
2023.04.29.


수민은 심란한 얼굴로 이수의 방문을 열고 커다란 방 안을 둘러보았다.


“엄마, 여기서 뭐 해?”

좀처럼 2층에 올라가지 않는 수민이 계단을 올라가는 걸 보고 유미가 뒤따라 올라왔다.


“유미야, 너 이 방 쓰고 싶다고 했지?”

“그럼 뭐 해. 정이수가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데.”

하나 마나 한 얘길 왜 하냐는 듯 유미는 입을 삐죽거렸다.

유미도 이 방을 들락거릴 때마다 언제나 부럽고 배가 아팠다.

몇 년 동안 비어 있던 이 방은 이수가 들어오기 전 인테리어 디자이너에 의해 완벽하게 꾸며졌다.

고급스러운 가구며 벽지, 커튼까지 전문가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게 없었다.

이수의 존재에 대해서 말로만 들었던 유미는 이수가 집에 들어오기 전부터 시기와 질투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집에 온 첫날 이수는 이 방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유미는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걸 이수는 매번 당연한 듯 쉽게 가지면서 좋아하는 기색도 전혀 없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유미는 이수가 너무 얄밉고, 싫었다.


“이수가 이 집에서 나가면 네 차지가 될 수도 있으니까.”

“헐! 걔가 나간대?”

유미가 깜짝 놀라서 물었다.


“그럴지도 모르겠어.”

“갑자기? 진짜야?”

유미의 얼굴로 반가운 기색이 빠르게 번져갔다.

문 앞에 서 있던 유미는 안으로 들어가 커다란 침대 위에 벌러덩 누웠다.


“나도 이런 큰 침대에서 자고 싶어.”

유미는 좌우로 이리저리 몸을 뒹굴다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정면에 걸린 대형 TV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안쪽에 있는 드레스룸도 보았다.

유미의 옷장에 터질 것처럼 끼어 있는 옷들을 저 넓은 드레스룸으로 옮긴다는 생각만으로 기분이 좋았다.


“엄마, 결정 난 거야?”

“아빠가 허락해야 하긴 하는데. 이수가 한다면 하는 애잖아.”

“이수가 나가고 싶대? 그럼 나가는 거 아니야? 아빠는 이수 말이라면 다 들어주잖아.”

“그래 주면 좋겠는데, 이건 또 다른 문제라 쉽게 허락해줄지 모르겠어.”

수민은 지금쯤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을지 걱정이 되면서 한편으론 기대했다.

이수가 나가기로 결심했다면 쉽게 포기하지 않을 테고.

어제 일로 원진에게 싫은 소리를 들을 게 분명하지만, 이수가 집에서 나가는 대신이라면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수민은 어쩌다 보니 마음속으로 이수를 응원하고 있었다.


“와. 제발 나갔으면 좋겠다. 나 이 방 진짜 너무 갖고 싶어.”

“유미야, 너 당분간 이수한테 잘해. 괜히 거슬리게 하지 말고. 알았지?”

“내가 뭘 또 거슬리게 했다고 그래.”

유미는 입을 삐죽거렸다.


“어제도 그래. 술 취해서 비틀거리다가 향수까지 깼잖아.”

“향수? 어머. 내가 그 향수를 깼어?”

유미는 전혀 모르는 일인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그거 진짜 비싼 건데.”

처음 지호가 준 향수라는 걸 알았을 때 깨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래도 정말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잘됐네. 뭐. 어차피 내가 갖지도 못하는 거.”

“아휴. 너 때문에 진짜. 앞으로 또 그렇게 술 마시기만 해. 그땐 내가 너 가만히 안 둬.”

수민은 유미를 나무랐다.


“이수가 아빠한테 어디까지 얘기할지 모르겠는데, 이거 아빠가 다 알면 뭐라고 하시겠니?”

“어젠 진짜 너무 열받아서 그랬단 말이야. 향수까지 받았으면서 아무 사이 아니라고 거짓말하잖아.”

“그렇다고 그 행패를 부려? 머리를 써야지, 머리를. 쯧쯧. 지호는 너랑 이수 사이 모르는 거지?”

수민은 얕은 한숨을 내쉬면서 말했다.


“아마 그럴걸. 난 얘기 안 했어. 그건 왜?”

“이수랑 지호가 무슨 사인지 몰라도 이대로 가만히 있을 거야?”

“그럼?”

수민은 유미가 오래전부터 지호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어떻게든 엮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도 했고.

그게 수민의 뜻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수가 지호와 엮이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평소에도 이수에게 좋은 걸 다 뺏기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은데, 지호마저 이수에게 뺏기는 꼴을 이대로 지켜볼 수는 없었다.

**

지호는 이수를 내려주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적막한 집에 들어서자 어젯밤 이수와 같이 있었다는 게 잘 실감 나지 않았다.

이수가 잠들었던 침실 문을 열자, 침대 위 이불이 반듯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욕실 역시 말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누가 왔다 간 줄도 모를 정도였다.


“깔끔하기도 해라.”

이수가 다녀간 빈자리를 물끄러미 보던 지호는 이수가 앉았던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피곤한 눈을 감았지만, 왠지 모를 두근거림에 쉽게 잠이 들 것 같지 않았다.

좀처럼 차분해지지 않는 기분 탓에 다시 눈을 떴다.

그때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지호는 혹시나 하는 기대로 비스듬히 누워 있던 상체를 빠르게 세우고 핸드폰을 잡았다.

발신자를 확인한 지호의 얼굴로 언뜻 실망이 스쳤다.


“네. 형주 형.”

김형주는 지호의 이종사촌 형으로 몇 년 전까지 대형 엔터테인먼트의 수석 프로듀서로 활동하다가 1년 전 독립해서 자기 회사를 설립한 작곡가이자 프로듀서였다.

그가 만든 히트곡이 셀 수없이 많아 히트곡 제조기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래, 지호야. 방금 가이드 녹음한 거 메일로 보냈어.]

“아, 벌써 나왔어요?”

[어. 너한테 빨리 들려주고 싶어서 며칠 바짝 작업했지. 잘 나온 거 같은데, 네가 듣기엔 어떨지 모르겠다.]

“너무 기대되는데요.”

[처음에 준비했던 거랑 한 곡 더 보냈어. 둘 다 들어보고 다시 얘기하자.]

“네. 지금 바로 들어보고 연락할게요.”

[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지호는 전화를 끊고 거실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자, 커다란 원목 책상 위로 대형 모니터와 스피커가 올려져 있고 한쪽 벽면에 디지털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지호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메일을 열어 김형주가 보낸 2곡의 가이드 녹음을 틀었다.

부드러운 피아노 반주로 시작하는 서정적인 발라드곡과 이별을 떠올리게 하는 슬픈 멜로디가 인상적인 발라드곡이었다.


 
평소 지호의 음색이 독보적이라고 생각했던 형주는 회사를 설립한 이후 지호에게 노래를 권유했다.

형주의 권유로 인해 지호는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 삽입곡 하나를 부르게 되었고, 영화가 크게 흥행하면서 OST까지 큰 인기를 끌었다.

그 이후 형주는 지호의 음색에 맞는 노래를 계속 만들었고, 지호는 그걸 훌륭하게 소화하며 발표하는 음원마다 큰 인기를 끌었다.

다만, 지호는 얼굴과 이름이 알려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평생 연구자의 길을 택한 아버지 대신 지호가 회사 경영에 참여하는 게 할아버지의 바람이기도 했고, 지호 역시 연예인이 되는 게 꿈은 아니었기에 할아버지의 뜻에 따랐다.

그래서 오로지 노래 실력으로만 대중의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노래를 다 들은 지호는 상기된 표정으로 형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 노래 둘 다 너무 좋은데요.”

[그래? 네 맘에 든다니 다행이다. 녹음실엔 언제 나올래?]

올해 첫 싱글 준비였다.

처음 형주의 제안을 받았을 때 지호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에 대한 호기심으로 노래를 시작했었다.

형주 역시 부담 가질 필요 없다는 말로 지호를 설득했고.

첫 시작은 가벼운 마음이었지만, 그 뒤로 욕심을 보이기 시작한 지호는 형주의 도움으로 작곡까지 배우면서 직접 노래를 만들기도 했다.

그 덕분에 작년 한 해 지호는 굉장히 바쁜 일상을 보내야만 했다.


“내일 갈게요. 형.”

 

**

현관문 열리는 소리에 거실에 초조하게 앉아 있던 수민이 벌떡 일어났다.


“지금 오는 거예요?”

수민은 일부러 밝은 목소리를 내며 이수와 원진의 표정을 살폈다.

이수의 왼쪽 뺨 위로 길쭉한 밴드가 붙여져 있었다.

금쪽같은 딸 얼굴이 저렇게 됐으니 원진이 지금 얼마나 화를 참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수민은 긴장했다.

입을 꾹 다물고 대답도 없는 두 사람을 향해 수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저녁 준비할까요?”

“아니. 당신은 방에 들어가서 나랑 얘기 좀 하지.”

원진은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수민에게 말했다.

서늘한 목소리에 수민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수는 올라가 쉬어라.”

“네. 아빠.”

이수는 수민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2층으로 올라갔다.

방문을 열자, 어젯밤의 흔적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환기를 시켰음에도 아직 남아 있는 향을 제외하면 어젯밤의 난동을 가위로 싹둑 잘라낸 것 같았다.

방문을 잠그려다 아빠가 집에 있다는 생각에 안심하고 그냥 두었다.

원진은 이수가 맞은 게 모두 자기 탓인 것처럼 계속 미안해했다.
 


“앞으로 다시는 이런 일 생기지 않을 거야.”

 
원진은 이수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5년 전 이수와 다시 같이 살게 됐을 때 원진은 누구보다 기뻤다.

이혼하면서 엄마와 같이 살고 싶다는 어린 이수를 어쩔 수 없이 혜진에게 보내고 혼자 남았을 때, 그 적적함과 서운함이 말할 수 없이 컸기 때문이었다.
 


“내가 원해서 아빠가 재혼한 거 아니잖아. 유미 아빠로 사는 건 아빠 의지였지만, 난 유미 언니로 살고 싶지 않아. 내 가족이라는 생각이 안 들어. 솔직히 나한테는 아빠랑 같이 사는 아줌마랑 그 딸일 뿐이야. 나한테 가족은 아빠랑 엄마 둘뿐이라고.”

 
이수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속마음을 냉정하게 다 털어놓았다.

수민의 호칭은 어느새 유미 엄마에서 아줌마로 바뀌었다.

원진이 듣기 거북해할 걸 알면서 이수는 일부러 못되게 말했다.

가끔 어쩔 수 없이 새엄마라는 말을 해야 할 때마다 이수는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불편했었다.

사실 그런 사소한 것조차 이수는 감당하기 버거웠었다.

그러니 이런 기회가 왔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집에서 나가고 싶었다.

자신을 믿어준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더 이상 아무렇지 않은 척 참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이제 정말 벗어나고 싶었다.

집으로 오는 동안 원진의 한숨이 짙어졌다.

처음 알게 된 이수의 진심이 원진에게는 충격이었다.

어릴 때부터 부모의 별거와 이혼으로 상처가 많은 이수에게 또 다른 큰 상처를 준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이수는 자책하며 괴로워하는 원진이 안타까웠지만, 어차피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며 애써 모른 척했다.

드레스룸으로 들어간 이수는 거울 속 지호의 옷을 입고 있는 자기 모습을 보았다.


“이걸 또 돌려줘야 하는구나.”

어디 그뿐인가.

우산과 빌린 돈 2만 원까지.


“어떤 식으로든 고맙다는 성의 표시는 해야 하는데.”

받은 만큼 돌려주겠다고 말했지만, 대체 무슨 수로 똑같이 갚을 수 있을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아빠를 만나느라 잠시 눌러 놓고 있었던 것들이 순식간에 이수의 머릿속을 점령했다.

지금까지 기다렸다는 듯이.


“너라서 그랬던 거야.”


“네가 나한테 특별하다는 거.”

 
지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에 이명처럼 계속 맴돌았다.

그걸 몰랐냐는 듯 조금 어이없는 표정.

이제 좀 알아달라는 눈빛.
 


“넌 모르겠어?”

 
모르긴. 네가 친절하게 다 알려줬으면서.

생각만으로 이미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러면서, 나는 아니라고 스스로를 속이고 지호까지 속일 수 있을까.

이수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 문자 알림이 울렸다.

발신자는 서지호.


-10분만.

문자를 확인한 이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