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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최선을 다한다며 (20/31)


20. 최선을 다한다며
2023.05.06.


고개를 돌려봤지만, 앉아서 책 보는 사람들뿐 이었다.

이수는 책상 위에 올려진 음료수와 쪽지를 물끄러미 내려보았다.

저걸 본 순간 왜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을까.

누가 준 건 줄도 모르면서.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펼치자 단정한 글씨가 보였다.

‘내일 봐.’

내일은 일주일에 한 번 지호를 볼 수 있는 금요일이었다.

**



“며칠 사이 벚꽃이 다 폈네. 너무 예쁘다.”

벤치에 앉은 애라가 머리 위로 하얗게 만개한 벚꽃을 올려 보았다.

옆에 앉은 이수도 미소를 지으며 벚꽃을 눈에 담았다.

그때 동우가 커피캐리어를 한 손에 들고 벤치로 왔다.


“커피 마셔.”

“고마워.”

“잘 마실게. 동우야.”

“이런 날은 진짜 수업 다 째고 어디 놀러 가고 싶다. 야, 우리 주말에 셋이서 여의도 벚꽃 축제 갈래?”

애라가 동우와 이수를 보면서 눈을 반짝였다.


“이번 주가 절정일 거야. 다음 주면 다 질 텐데 그 전에 갔다 오자.”

“그럴까? 난 좋은데.”

동우가 반가운 기색을 하며 이수를 보았다.


“난 별로. 둘이 다녀와.”

이 시기엔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게 벚꽃인데, 이수는 굳이 이걸 보려고 따로 시간을 내고 싶진 않았다.


“왜? 너 주말에도 공부하게?”

애라가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지금 이렇게 보고 있잖아. 난 이걸로 충분해.”

이수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벚꽃을 올려 보았다.


“너 윤중로 벚꽃길 한 번도 안 가봤지? 이거랑은 차원이 달라.”

“그래. 같이 가보자. 오전 일찍 가서 한 바퀴 돌고 헤어지면 되지. 한 시간이면 돼.”

동우도 이수를 설득하려고 한마디 거들었다.


“가고 싶은 사람들끼리 가. 난 진짜 별로 생각 없어.”

“동우야, 얘 안 되겠다. 그냥 우리 둘이 가자.”

애라는 못 말리겠다는 듯 이수에게 눈을 살짝 흘겼다.


“너 안 간 거 후회하게 진짜 예쁜 사진 많이 찍어서 보내줄게.”

“그러든지. 기대할게.”

이수는 전혀 아쉽지 않은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이번에 중간고사 끝나고 동아리 MT 가려고 하는데…….”

“동기들끼리만?”

동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애라가 반색하며 물었다.


“응. 5월에 전체 MT 가기 전에 동기들끼리 먼저 다녀오려고.”

“와! 너무 재밌겠다. 어디로 가?”

애라는 동우를 붙잡고 이것저것 물었다.

장소는 후보지 몇 곳을 문자로 투표해서 결정할 거라고 했고, 다음 주에 답사도 다녀올 예정이라고 했다.


“시험 기간인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쓰느라 바쁘겠다.”

이수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동우를 걱정하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뭐. 너 MT는 갈 거지?”

“그럼. 시험 끝나고 가는 거면 부담 없지.”

이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같이 답사 갈 생각은 없지?”

“미안. 답사 갈 애들 없어?”

이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만약에 너 가고 싶으면 같이 갈까 했지.”

“그거 선아랑 재호한테 가라고 해봐. 둘이 가라고 하면 신나서 갈 것 같은데. 답사비도 회비에서 나가니까, 둘이 돈 안 쓰고 데이트할 수 있잖아. 캠퍼스커플이 이럴 땐 참 부러워.”

애라의 말에 이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장소 정해지면 답사 갈 사람 신청받으려고. 아마 둘이 간다고 할 것 같아.”

동우는 혹시나 하는 기대로 이수에게 먼저 물어봤지만, 한 시간이면 되는 벚꽃 축제도 안 가겠다는 이수를 교외로 데려갈 방법은 없어 보였다.

지금이 시험 기간이라는 게 문제였다.

커피를 마시는 동안, 동우와 애라는 내일 약속을 잡았고 이수는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수야, 생각 바뀌면 내일이라도 연락해.”

오후 수업을 듣기 위해 진리관으로 들어온 동우는 각자 강의실로 들어가기 전에 다시 한번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뭐? 벚꽃? 큭큭. 난 됐다니까.”

“알았어. 오늘 수업 끝나고 기다릴까?”

“아니. 나 바로 도서관 갈 거니까 기다릴 거 없어.”

“그래. 오늘 중으로 MT 장소 투표 문자 보낼 거니까 확인해줘.”

“알았어.”

 

**

이수는 강의실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 교단과 가까운 앞자리에 앉았다.

워낙 큰 강의실이라 앞자리에 앉으면 뒤쪽의 어수선함이 느껴지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수업 시작 15분 전.

이수는 책상 위에 태블릿 PC를 꺼내고 지난주 필기한 부분을 찾아서 다시 읽었다.

눈으로는 빼곡한 글자를 보고 있었지만, 내용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수의 머릿속엔 온통 세 글자뿐 이었다.

‘내일 봐.’

이수가 그만하자는 말로 전화를 끊었던 날 이후 열흘 넘게 지호는 이수에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 말 한마디로 정말 그만하기로 한 거라면 어제 쪽지를 두고 가지 않았을 텐데.

지호가 아닌가.

지난주 수업엔 지호를 보지 못했다.

이수는 앞자리에 앉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이수는 오늘도 돌아보지 않을 생각이다.


‘밀어낸 만큼 멀어져주면 잘된 거지. 지호를 보면서 부담스러워할 필요도 없고. 흔들릴까 봐 걱정할 필요도 없고.’

이러다 보면 언젠가는 다시 예전처럼 무덤덤해지겠지.


‘한 가지 걸리는 건 아직 돌려주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건데…….’

우산, 옷, 현금 2만 원 그리고 고마웠던 마음.

고마운 건 나중에 갚더라도 빌린 돈이랑 물건은 빨리 돌려줘야 할 텐데.

연락도 없이 떼먹는 줄 알고 욕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지호를 만나지 않고 돌려줄 방법이 없을까.’

이수는 심란한 마음으로 수업을 마쳤다.

수업이 끝나고 이수는 뒷자리에 있을지도 모르는 지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강의실에서 늦게 나왔다.

시선을 내리고 묵묵히 걸어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수야.”

고개를 들어보니 벽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는 지호가 보였다.

이수와 눈이 마주치자 지호는 싱긋 웃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왜 이렇게 늦게 나와? 한참 기다렸잖아.”

지호는 이수와 만나기로 미리 약속이라도 한 사람처럼 말했다.


“어. 그냥.”

너 때문인데.

이수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거의 2주 만에 보는 건데 지호는 별다른 인사도 하지 않았고, 마치 매일 만났던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굴었다.


“날 왜 기다렸어?”

“내가 오늘 보자고 했잖아.”

“어?”

아. 어제 그 쪽지.

이수는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호가 두고 간 게 맞았구나.


“오늘도 도서관 갈 거지?”

“응.”

“가자.”

뭐지. 이 자연스러운 대화는.

지호는 별말 없이 이수가 가는 대로 옆에서 따라 걸었다.

사람 마음을 그렇게 심란하게 만들어놓고 연락을 뚝 끊더니, 불쑥 나타난 지호는 늘 그렇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며칠 내내 이수의 머릿속은 온통 서지호였다.

떨치려고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뭔가 시작한 것도 없는데, 벌써 진이 빠진 기분이었다.


‘내가 이래서 연애가 싫다고 한 거야.’

이런 쓸데없는 감정 소모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은데.

시작되기 전에 멈췄어야 했는데, 이미 제어가 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지호는 이수를 끝까지 따라오더니 옆자리에 앉았다.

이수가 왜, 라는 눈빛으로 보자 지호는 공부, 하고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옆자리에서?

지호를 옆에 두고 공부에 집중할 수 있을까.

요즘은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집중이 흐트러지는데.

오른쪽 머리를 내려 그가 앉은 쪽의 시야를 다 가려도 지호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코끝을 계속 맴돈다.

그것만으로 이수는 조금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그를 향한 마음을 견디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지호를 옆에 두고 이수는 20가지 아미노산의 종류를 외웠다.

강의록에 적힌 단백질 조성과 구조를 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으며 흩어지는 주의력을 끌어모았다.

머리카락으로 시야를 가렸음에도 이상하게 그가 자꾸 쳐다보는 것 같은 시선이 끊임없이 느껴졌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갈까 망설였다가.

혼돈의 시간을 보낸 끝에 밤 10시가 되었다.

스스로 정해둔 시간은 기어이 채웠지만, 억지스럽게 앉아서 버텼을 뿐 머릿속에 남은 게 별로 없었다.


‘내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디서도 흔들림 없던 집중력이 지호 앞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들었다.

이수가 자리를 정리하자, 지호는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 나왔다.

도서관에서 나온 이수는 지호에게 빌린 돈 2만 원을 내밀었다.


“늦게 갚아서 미안해. 옷은 오늘 안 가져와서 다음 주에 줄게.”

지호는 돈을 받으며 이수를 바라보았다.


“지금 집으로 갈 거지?”

“응.”

이수는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려고 했다.


“이수야, 잠깐만.”

“왜?”

“나 지금까지 너 기다린 거야.”

“뭐?”

이수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지호를 바라보았다.

공부한다며.


“너랑 같이 가고 싶은 데가 있어서. 너 집에 갈 때까지 기다렸어.”

“그럼 그렇다고 미리 말을 하지. 5시간이나 됐잖아.”

“말했으면 들어줬고? 공부해야 한다고 거절했을 거잖아.”

이수는 딱히 틀린 말도 아니라 아무 말도 못 했다.


“내 말이 맞지?”

지호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지난 며칠간 지호는 이수가 매일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걸 멀리서만 지켜봤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10시까지 공부하는 이수를 혼자 바라보는 것도 꽤 좋은 시간이었다.

집에 갈 땐 데려다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보나 마나 난처한 얼굴로 사양할 게 너무 뻔해서 아는 척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시간에 어딜 가려고?”

이수는 지금까지 기다렸다는 지호에게 차마 안 된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집에 간다고 했으니 달리 핑계 댈 것도 없었고.


“가보면 알아.”

“지금 10시 넘은 건 알지?”

“응. 늦게 갈수록 더 좋아.”

지호는 어딘지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눈썹을 옅게 찡그린 이수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수가 선뜻 움직이지 않고 서 있자, 이수 얼굴 앞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내린 지호가 웃으며 말했다.


“최선을 다한다고 했잖아. 잊은 건 아니지?”

 


“이번에도 똑같이 갚아 줄 생각이야?”


“최선을 다해볼게.”

 
지호에게 약속했던 말을 떠올린 이수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말만 해놓고 지금까지 아무것도 해준 게 없으니 민망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물론 안 잊었어.”

지호가 원하는 최선이 어떤 건지 모르겠지만, 이수로서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최선을 다할 기회를 준다면 기꺼이 해야지.

**

차를 타고 20분쯤 뒤에 도착한 곳은 여의도 국회 둔치 주차장이었다.


“내리자.”

지호가 운전석에서 내려 앞쪽으로 돌아오자 이수가 먼저 조수석 문을 열었다.


“가방은 차에 두고 내려.”

“아니야. 갔다가 바로 집으로 갈게.”

다시 차로 와서 집까지 함께 가는 건 피하고 싶었다.


“최선을 다한다며.”

하! 또 그 소리.

지호는 이수의 가방을 조수석에 내려놓고 문을 닫았다.

이수는 어쩔 수 없이 가방을 두고 지호를 따라 걸었다.

얼마 안 가서 만개한 벚꽃 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윤중로가 나왔다.


“다 왔어. 여기야.”

“설마 이 시간에 벚꽃 보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이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지호를 바라보았다.


“응. 밤에 보는 벚꽃이 정말 예쁘거든.”

낮에 애라와 동우가 같이 가자는 걸 한사코 거절했는데, 이 밤에 지호랑 결국 여길 오다니.

올해는 벚꽃 축제 올 운명이었나.


“여기, 너랑 꼭 같이 오고 싶었어.”

지호는 활짝 웃으며 이수를 바라보았다.

이수는 흐드러진 벚꽃보다 눈부신 미소를 짓고 있는 지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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