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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벚꽃 (21/31)


21. 벚꽃
2023.05.10.


지호를 바라보던 이수는 윤중로를 따라 길게 줄지어 서 있는 벚꽃 나무로 시선을 돌렸다.

길 전체에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은 조명 때문인지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까만 밤하늘과 새하얀 벚꽃의 조화가 한 폭의 한국화를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와. 너무 예쁘다.”

이수는 아름다운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사진으로, TV 화면으로 많이 봤지만,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지호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수를 눈에 담았다.


“이수야, 우리 사진 찍자.”

“어?”

이수가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자, 지호는 짓궂게 웃으며 ‘최선을 다한다며’라고 작게 속삭였다.


‘하! 그놈의 최선.’

“알았어.”

지호는 이수 옆에 바짝 붙어 핸드폰 든 손을 길게 뻗었다.

찍는다는 말과 동시에 지호의 팔이 이수의 어깨를 감싸더니 사진이 찍혔다.

사진 속 지호와 이수의 얼굴이 닿을 듯 가까웠다.


 


“잘 나왔지?”

지호는 이수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너만 잘 나왔는데?”

이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럴 줄 알아서 안 찍겠다고 한 건데.


“그럼 다시 찍을래?”

다시 찍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긴 것 자체가 예술이니 어떻게 찍어도 지호가 더 잘 나오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고.

그건 수백 번을 다시 찍는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텐데.


“됐어. 다시 찍어도 똑같을 것 같아.”

“한 번만.”

결국 다시 찍었지만, 이수가 보기엔 다를 게 없었다.

맘에 안 드는 표정으로 사진을 보는 이수에게 지호가 어린아이 달래듯 말했다.


“너도 예쁘게 잘 나왔어.”

“됐거든.”

이수는 픽,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 야심한 밤. 윤중로에 벚꽃을 보러 온 것도 모자라서 오랜만에 만난 지호와 태연하게 셀피를 찍고 있다니.

지난 며칠간 지호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썼던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두 사람은 차량 통제 중인 윤중로를 끝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서 걸었다.


“나 사실 벚꽃 보러 이런 데 처음 와 봤어. 와 보니까 사람들이 왜 그렇게 벚꽃 축제에 가는지 알 것 같아.”

이수는 고개를 위로 올리고 벚꽃을 눈에 담으며 걸었다.

여기까지 데려온 지호에게 고맙단 생각도 조금 들었다.


“지금까지 이런 데도 안 와 보고 뭐 했어?”

“그러게. 이렇게 예쁜 줄 알았으면 진작 와 볼걸.”

굳이 핑계를 대자면 벚꽃은 매년 시험 기간인 4월 초에 피는 꽃이라서.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이맘때는 여기저기서 흔히 볼 수 있다는 이유로 안 왔었다.


“오늘 내가 데려오길 잘했네.”

이수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밝을 때 또 올래?”

오늘 낮에 애라와 동우가 같이 가자는 걸 끝까지 거절했는데…….
 


“이수야, 생각 바뀌면 내일이라도 연락해.”

 
만약 내일 또 오더라도 동우한테 연락하는 게 맞지.

원해서 온 건 아니었지만, 지호랑 여기 온 걸 알면 애라와 동우가 뭐라고 할지…….

끝까지 비밀로 해야겠다.


“아니. 올해는 이걸로 충분해.”

그러자 지호가 이수를 흘깃 보며 피식 웃었다.


“왜 웃어?”

“음……. 이거 또 말하면 화낼 거 같은데, 말할까 말까.”

“뭔데?”

“최…….”

지호는 짓궂은 표정으로 이수를 빤히 쳐다보며 말을 길게 늘였다.


“야!”

무슨 말인지 알아차린 이수가 소리를 지르며 지호에게 눈을 흘겼다.


“거봐. 화내잖아.”

“이럴 때 쓰라고 한 말이 아닌데, 네가 자꾸 하니까 그렇지.”

“그 말만 하면 네가 다 들어주니까……. 무슨 마법 주문 같아서 자꾸 쓰고 싶어.”

지호는 아이처럼 웃으며 말했다.

눈을 흘기던 이수도 어이가 없어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스스로 내뱉은 말이니, 들어주는 게 맞는데.

이런 식으로 남용할 줄은 몰랐지.

생각해보면 지호 차를 타고 윤중로에 와서 벚꽃을 본 게 누구를 위한 최선이었는지 모르겠다.

오히려 이번에도 이수가 고맙다고 해야 할 상황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다 봤으니까 이제 가자. 데려다줄게.”

윤중로를 한 바퀴 돌아본 뒤 두 사람은 주차장으로 향했다.

이수는 혼자 가고 싶었지만, 데려다주겠다는 지호를 이기지 못하고 차에 올랐다.

운전석에 앉은 지호가 내비게이션 최근 기록에서 이수의 집을 찾아 안내 버튼을 눌렀다.


“진짜 혼자 가도 되는데. 나 내려주고 집에 가려면 너무 돌아가잖아.”

“괜찮아. 내가 여기 오자고 한 거니까 당연히 내가 데려다줘야지. 지금 시간도 너무 늦었고……. 집 앞까지 얌전히 모셔다 줄 테니까 가는 동안 눈 좀 붙여. 공부하느라 힘들었잖아.”

집까지 가는 동안 지호는 말없이 운전만 했다.

지호가 편하게 자라고 했지만, 이수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창밖을 멍하게 바라보던 이수는 생각이 많아졌다.
 


“너랑 꼭 같이 오고 싶었어.”

 
그러려고 지호는 어제 도서관에 와서 쪽지를 남기고, 오늘 이수가 집에 갈 때까지 옆에서 기다렸다.

행여 이수가 싫다고 할까 봐 말도 없이 데리고 와서 말도 안 되게 예쁜 벚꽃을 보여줬다.

이수가 좋아할 걸 미리 알았던 사람처럼.

생각할수록 이수는 지호가 보여주는 배려에 마음 가득 감동이 들어차는 것 같았다.

지난 며칠간 지호를 마음에서 밀어내려고 애썼던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이렇게 다정하고 따뜻한데, 상처받을까 봐 겁나서 피할 필요가 있을까.

이수의 다짐들이 마음속에서 뿌리째 흔들렸다.

이수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지호의 차가 집 근처에 다다랐다.


“늦었는데 오늘은 집 앞까지 갈까?”

“아니. 괜찮아. 여기서 내릴게.”

“내가 오늘 시간 많이 뺏은 거 아니지?”

지호는 골목길 앞에 차를 세우면서 물었다.


“전혀. 네 덕분에 예쁜 벚꽃 실컷 봐서 내가 오히려 고마워. 집까지 데려다준 것도 고맙고.”

이수는 말하다 말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너한테 자꾸 고마운 일만 생겨서 어쩌지.”

매번 말로만 고맙다고 하는 염치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고맙다는 말 안 해도 돼.”

지호는 이수를 향해 몸을 완전히 틀었다.


“난…… 내가 널 집까지 데려다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으면 좋겠고, 벚꽃을 같이 보러 간 것도 네가 나한테 고마워할 일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지호는 차분한 목소리로 간절한 바람을 말하듯 나긋하게 말했다.


“나는 너랑 그런 사이가 됐으면 좋겠는데…….”

“…….”

“나한테 선 긋고 피하려고 하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줘. 네 마음은 어떤지.”

지호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백 같기도 하고, 부탁 같기도 한 말이었다.

이수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은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알았다고 해야 할까.


“늦었는데 이제 들어가. 앞으로 시험 끝날 때까지 방해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두근거리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멍하게 있는 이수의 안전벨트를 지호가 풀었다.

지호는 손끝으로 이수를 볼을 가볍게 툭 건드리며 말했다.


“시험 잘 봐.”

“……고마워. 너도 시험 잘 봐.”

이수는 움찔하며 겨우 그 말만 했다.

지호의 손끝이 닿았던 얼굴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이수는 운전석 문을 열고 내리려는 지호의 팔을 붙잡았다.


“내리지 마. 내가 열고 내릴게.”

지호는 자기 팔을 덥석 잡은 이수의 손을 내려보며 피식 웃었다.


“내가 해주고 싶은데.”

“괜찮아. 내리지 말고 바로 가. 집까지 한참 가야 하잖아.”

“그래. 그럼 오늘은 안 내릴게.”

“앞으로도 내리지 않아도 돼.”

이수는 그제야 지호의 팔에서 손을 풀었다.


“운전 조심해서 가.”

“알았어. 넌 골목길 조심해서 가고.”

“그래.”

이수가 작게 웃자 지호도 따라서 웃었다.

문을 열고 이수가 내리며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잘 가.”

지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는 지호가 가는 걸 보고 가려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자 창문이 스르륵 내려갔다.


“왜?”

이수는 창문으로 고개를 내리고 지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너 걸어가는 거 보고 갈 거니까 먼저 가.”

“아……. 어.”

겨우 가라앉았던 마음이 또다시 울렁거렸다.

이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 걸어갔다.

한 걸음. 한 걸음.

뒤에서 지호가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의 신경이 뒤쪽으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비 오던 날도 이렇게 지켜봤을까.’

이수는 발걸음이 흐트러지지 않게 힘을 주고 걸었다.

**

이수는 커다란 캐리어에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봐야, 책과 옷이 대부분이었다.

주말에는 집에 와서 지내기로 했기 때문에 방에 있는 가전이나 가구는 모두 그대로 두고 새로 샀다.


“짐 다 챙겼어?”

원진이 이수의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응.”

“그럼 이제 가자.”

원진이 캐리어를 가지고 먼저 나갔고 이수는 뒤돌아 방을 한번 둘러보고 문을 닫았다.

주말마다 올 거였지만, 그래도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진짜 나가는구나. ’

원진이 허락했을 때만 해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는데, 짐을 챙겨 방문을 나서는 순간 진짜 현실 같았다.

1층에 내려오자, 유미와 수민이 같이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번거롭게 같이 안 가셔도 되는데.”

수민을 위하는 말 같았지만, 사실 이수가 불편해서 한 말이었다.

거기에 유미까지 왜 따라나서는 건지.


“아유, 내가 어떻게 안 가봐. 처음 독립하는 건데 집은 한 번 가봐야지. 내가 앞으로 반찬도 갖다주고 하려면 집이 어딘지도 알아 둬야 하고.”

수민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원진이 이수의 독립을 허락한다고 했을 때 이수만큼 기뻤던 사람이 수민이었다.

비록 주말마다 집에 온다는 조건이 붙었고, 유미 차지가 될 줄 알았던 2층 방이 여전히 이수 방으로 남은 건 불만이었지만.

오늘 굳이 따라나서는 이유는 원진이 이수를 위해 얼마나 대단히 준비했을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기 위함이었다.

이수의 집은 원진의 집에서 차로 30분쯤 떨어진 곳이었다.

한강과 가까운 고급 주택가에 있는 집은 보안이 철저한 아파트로 건물의 밀집도가 낮아 도심 속 리조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수도 대략적인 얘기만 들었을 뿐 와보진 않았었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설 때부터 수민은 입이 떡 벌어졌다.

이수를 위해 어디까지 해줄 수 있나 싶었는데, 원진은 언제나 수민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원진을 따라 현관문을 들어선 뒤로 수민은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인테리어 디자이너에 의해 꾸며진 집은 최고급 마감재와 조명, 가구와 가전까지.

흠잡을 데 없이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꾸며져 있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이수야, 어때? 마음에 드니?”

원진은 집 안을 둘러보며 이수에게 물었다.


“아빠, 이건 좀 너무 과한데?”

이번엔 이수도 놀랄 정도였다.

대체 얼마나 많은 돈을 쓴 건지.

거실과 방을 둘러보는 이수의 입이 벌어졌다.


“여기서 평생 살아도 되겠어.”

“너만 좋으면 그래도 되지.”

좋아하는 이수를 보며 원진이 흐뭇하게 웃었다.

이수는 진심으로 환하게 웃었고, 유미는 부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얼굴에 힘을 잔뜩 주었다.

2층 이수의 방도 부러웠는데, 이 집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다.

유미는 독립하고 싶다는 이수의 말 한마디에 이런 집을 덥석 마련해주는 원진이 새삼 놀라웠고, 과연 자신이 독립한다고 해도 원진이 이만큼 해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집구경을 마친 세 사람은 이수만 남기고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혼자 남은 이수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꿈에 그리던 행복한 첫날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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