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처음도 아닌데
(22/31)
22. 처음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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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처음도 아닌데
2023.05.13.
이수는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히 아침을 먹고 커피 한잔을 내려 마셨다.
학교와의 거리가 전보다 훨씬 가까워져 상대적으로 아침 시간이 여유로웠다.
이수는 습관처럼 공부했기 때문에 시험 기간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건 없었지만, 잠을 좀 더 줄였고, 손에서 정리 노트를 놓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의외로 지호 생각은 별로 나지 않았다.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답게 그날 이후 문자도 전화도 없었다.
지호는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다정했다가, 무심하게 연락을 안 하다가, 어느 날 불쑥 나타나 태연하게 다정했다.
예전엔 연락이 없을 때마다 그가 신경 쓰였지만, 잠까지 줄이며 공부하는 동안 지호를 생각할 틈은 별로 없었다.
아직 그만큼은 아니구나. 다행이다. 뭐 그런 생각을 잠깐 했고.
이러다 시험이 끝나면 어떻게 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
“이수야, 시험 잘 봤어? 나도 며칠 바짝 공부했는데, 진짜 망했어. 왜 이렇게 어렵냐?”
이번 중간고사 과목 중 가장 범위가 넓고 공부하기 까다로웠던 의학 생화학 시험이 끝난 직후 애라는 죽을상이었다.
이수도 가장 오랜 시간을 투자했던 과목이었다.
“범위 장난 아니었잖아. 며칠 만에 끝내기는 힘든 양이었어. 족보에서 많이 나왔는데, 족보 안 봤어?”
“보긴 봤지. 다 못 외워서 문제지. 넌 잘 봤구나?”
애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배신자 쳐다보듯 이수를 쳐다보았다.
“야, 나 한 달 전부터 공부했어. 그 정도 성의를 보였으면 잘 보는 게 정상이지.”
이수는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웃었다.
누가 예과 공부를 만만하다고 했나.
제대로 공부하려고 들면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시작을 일찍 하긴 했어도 시험 기간에 잠 못 자는 건 마찬가지였다.
“매일 도서관에 출근 도장을 찍더니, 다르긴 다르네.”
“기말 땐 너도 나랑 같이 출근 도장 찍든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볼게. 이수야, 너 지금 도서관 갈 거야?”
“아니. 그냥 강의실에서 하려고. 도서관은 자리 없을 것 같아.”
“그럼 나랑 같이 공부하자. 네가 옆에 있으면 든든할 것 같아.”
“그래. 내일 인체 생물학 공부는 좀 했어?”
“며칠 내내 생화학 하느라 생물학은 오늘 벼락치기.”
어제도 밤새웠다는 애라의 다크서클이 턱 끝까지 내려와 있었다.
“생물학을 하루 만에 다 하겠다고?”
이수는 어이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별수 있냐. 그렇게라도 해야지 뭐.”
“어휴. 용감하다 용감해. 노트 정리한 거 빌려줄 테니까 복사해서 그거라도 봐. 그것도 양이 많아서 하루에 다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수는 가방에서 생물학 족보와 강의록 9개를 함께 정리한 노트를 꺼내 애라에게 건넸다.
“와! 진짜? 이수야! 너는 정말 나의 구세주야. 내가 진짜 이 은혜는 잊지 않으마! 고마워!”
애라는 두 손을 꼭 모아 얼굴 앞에 가져가며 감동에 젖은 표정을 지었다.
“됐고. 시험이나 잘 봐.”
“물론이지. 밤을 새워서라도 이거 다 보고 시험 볼게. 네가 정리한 건데, 이것만 확실하게 봐도 충분하겠지. 큭큭큭. 나 지금 당장 가서 복사하고 올게. 강의실 먼저 가 있어.”
애라와 헤어진 이수는 강의실로 향했다.
공부에 진심인 동기들과 같이 공부하면 서로 자극도 되고, 필요한 자료도 나눠볼 수 있어서 시험 기간엔 도서관보다 의대 강의실에서 공부하는 게 더 편하고 도움이 됐다.
그래서 이수는 시험 기간 내내 의대를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강박적으로 공부에 몰입하다 보면 어느새 잡념은 사라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잠이 부족해 육체적으로 힘들기는 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당장 눈앞에 닥친 목표와 계획만 보고 달리는 시간이 이수에겐 차라리 편한 시간이었다.
**
중간고사가 끝난 다음 날.
지호는 형주의 작업실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시험이 끝난 이후로 미뤄놨던 음원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저녁 일정이었지만, 일부러 시간을 앞당겼다.
보름 만에 이수를 만나러 가는 날이었다.
이수에게 방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던 대로 그날 이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완벽하게 없는 사람인 듯 지내다가 오늘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동안 내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을까. 아니면 완벽하게 선을 긋기로 마음먹었을까.’
조금 더 시간을 줄까 생각해봤지만, 오늘 MT에 동우도 간다는 말이 신경 쓰였다.
지호는 핸드폰을 꺼내 하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지호야. 너 오늘 MT 가는 거지?]
하준은 시험 전부터 동아리 MT에 같이 가자고 성화였다.
처음엔 미뤄둔 일 때문에 못 간다고 했지만, 늦게라도 가기로 마음을 바꿨다.
“응. 근데 나 좀 늦을 것 같아서 전화했어.”
[얼마나?]
“빨라도 3시쯤 출발할 것 같아.”
[그럼 너 차 가지고 갈 거지? 나도 너 갈 때 같이 갈까?]
“난 좋지만, 많이 늦을 텐데 괜찮겠어?”
[난 네 차 타고 가는 게 더 편하고 좋지. 시간이랑 장소 알려주면 내가 너 있는 쪽으로 갈게.]
“알았어. 너 내 차 운전하고 싶으면 오늘 하든가.”
평소 지호 차를 볼 때마다 저런 차 운전해보는 게 자기 소원이라던 하준의 말을 잊지 않고 건넨 말이었다.
[진짜? 그래도 돼? 나야 너무 좋지.]
“그래 그럼.”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다. 알았지?]
“딴소리는 무슨. 이따 보자.”
모든 남자의 로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지호의 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하준의 목소리가 잔뜩 들떴다.
차가 막히는 주말 오후라 가평까지 적어도 2시간 이상은 걸릴 텐데.
하준의 입꼬리가 귀밑까지 올라갔다.
**
이수는 MT 장소인 가평으로 가기 위해 용산역에서 동아리 친구들과 만났다.
“이수야, 어제 잘 쉬었어? 시험 끝났는데, 놀지도 않고 집에 가더니.”
1번 플랫폼으로 걸어가면서 애라가 물었다.
“오늘 놀 건데 뭐. 어젠 푹 잤어. 넌 어제도 술?”
“어. 잠도 얼마 못 자고 나와서 지금 힘들어 죽겠어.”
“적당히 마시지. 오늘 또 마실 텐데.”
“저녁 되면 다시 기운 날 거야. 오늘은 집에 갈 걱정도 없으니 진짜 맘 편하게 마셔야지.”
“하여간 체력도 좋아.”
일주일간 소진된 체력을 어제 하루 쉬면서 겨우 보충한 이수는 애라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기차에 오른 애라가 창가에 앉았고 이수는 그 옆에 앉았다.
도심을 벗어나자 창밖으로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에 마음이 설레고 들떴다.
기차는 한 시간 만에 가평역에 도착했다.
숙소로 가기 전에 근처 마트에 들러 푸짐하게 장을 봤다.
역에서 10분쯤 걸어 도착한 숙소는 복층 구조의 독채 펜션이었다.
30명은 들어갈 정도로 넓은 방에 계단을 올라가면 그만한 크기의 방이 또 있었다.
“확실히 여긴 공기부터 다르다. 이런 데서 술 마시면 취하지도 않겠어.”
“얘들아, 우리 두 시간 정도 쉬다가 저녁 준비하자.”
“그래.”
장 봐온 음식들을 냉장고에 모두 정리하고, 이수는 펜션 앞 해먹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유유자적.
앞에는 천이 흐르고 뒤로는 병풍처럼 펼쳐진 산이 있고 맑은 하늘에 흰 구름이 뭉게뭉게 떠다녔다.
며칠간의 치열했던 시간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게 힐링이구나.’
평화롭고 고요한 분위기에 이수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머릿속을 복잡하게 했던 생각들이 모두 하찮게 느껴졌다.
**
저녁 시간이 되자 모두 야외 바비큐장으로 모였다.
주희와 함께 상차림을 맡은 이수는 테이블 위에 앞 접시를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내려놓았다.
“이수야, 접시 14개 준비해.”
“왜? 우리 12명이잖아.”
“하준이랑 지호 저녁때 온다고 했거든.”
“아…….”
주희의 말에 이수의 손이 멈칫했다.
안 오는 줄 알고 마음 놓고 있었는데.
지호가 온다는 말에 이수는 갑자기 목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벚꽃 축제에 갔던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 2주 정도 됐나.
일주일에 한 번 같은 수업을 듣는데도, 대형강의실의 특성상 보고 안 보고는 의지의 문제였다.
오늘 보면 어떨까.
늘 그랬듯이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거나 마치 어제 만났던 사람처럼 친근하게 대하려나.
“몰랐구나. 사실 나도 방금 들었어. 큭큭.”
주희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콧노래를 불렀다.
그와 반대로 이수는 무거워진 마음으로 상차림을 마무리했다.
커다란 테이블 위로 음식들이 빼곡하게 채워졌다.
그 옆으로 하얀 연기를 자욱하게 뿜어내는 고기가 군침 도는 냄새를 풍기며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었다.
“와. 너무 맛있겠다.”
불향 가득한 고기가 테이블 위로 옮겨졌다.
다들 허기진 탓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젓가락이 갔고, 맛있다는 소리 외엔 별 말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그때 주차장 쪽에서 어수선한 소리가 들렸다.
“어머, 지호랑 하준이 왔다. 지호 차 하준이가 대신 운전하고 왔나 봐.”
“지호 차 좀 봐. 역시 클래스가 다르네. 내일 올라갈 때 태워달라고 해야겠다.”
주희가 먹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넌 저 차 타 봤지? 진짜 좋았겠다.”
작게 속삭이는 애라의 말에 고개만 끄덕인 이수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앞만 보고 있었다.
“늦게 와서 미안.”
“대신 오면서 술이랑 안주 많이 사 왔어.”
지호와 하준의 목소리가 차례대로 들렸다.
“어서 와서 저녁 먹어. 시간 딱 맞춰서 잘 왔다. 우리도 지금 막 먹기 시작했어.”
주희가 부르는 소리에 하준과 지호가 자리에 앉았다.
이수는 지호와 가벼운 눈인사만 주고받았다.
**
저녁 식사 후 뒷정리를 마치고 펜션으로 들어갔다.
복층으로 된 숙소의 2층은 여자가, 1층은 남자가 사용하기로 했다.
이수는 고기 냄새가 밴 몸을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사이 1층에선 벌써 술자리가 벌어졌다.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이수도 취하는 줄도 모르고 많이 마셨다.
같이 마시던 동우가 전화한다며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지호가 이수 옆으로 왔다.
“많이 마셨네.”
“어.”
이수는 느슨해진 표정으로 고개만 옆으로 휙 돌렸다.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지호의 얼굴이 보였지만, 이수는 예전처럼 놀라거나 피하지 않았다.
술의 힘이었다.
“괜찮아?”
“안 괜찮으면, 이번에도 도와주게?”
이수는 어떻게 할 거냐는 표정으로 지호를 보며 물었다.
상황이 안 좋을 때마다 구세주처럼 나타나서 도와줬으니까, 이번엔 어떨지 궁금했달까.
이수는 풀어진 눈으로 지호를 보며 헤실헤실 웃었다.
맨정신에는 불가능한 일이 술기운 덕분에 가능해졌다.
지호 앞에서 이런 여유를 부려보긴 처음인 것 같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
“얼마든지.”
이수가 예상했던 대로 이번에도 지호는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태연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지호가 이수의 귀에 대고 말할 때마다 연한 바람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달콤한 목소리에 녹을 것 같기도 했다.
이수는 자신이 취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혼자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을 테니까.
‘이번에는 나도 너처럼 태연하게 굴 거야.’
지호는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이수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이런 표정을 보려면 이만큼 취해야 하는구나.’
매일 술을 먹일 수도 없고.
“어떻게 해줄 건데?”
“나랑 같이 나가자. 너한테 물어볼 말도 있고 술도 깰 겸.”
“밖에 나가자고? 나 취해서 잘 못 걸을 것 같은데…….”
이수가 귀찮은 듯 고개를 저었다.
“못 걸으면 내가 안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 처음도 아닌데 뭘.”
“……뭐?”
지호는 오늘 처음 본 이수의 당황한 표정이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