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 취중 진담 (24/31)


24. 취중 진담
2023.05.20.



 
이수는 귓가에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지호의 것인지, 제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터질 것 같던 심장이 조금 진정되자, 이수는 지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부끄러움이 가득한 눈으로 지호를 바라보았다.


“나는, 내가 널 좋아하게 될까 봐 겁났어.”

이수는 솔직하게 고백하기로 했다.

그동안 지호를 피하려고 했던 이유까지 모두.

취하지 않았다면 용기 내지 못했을 말들이 이수의 입에서 차분하게 흘러나왔다.


“이제 거짓말은 안 할게. 솔직히 네가 보고 싶었고, 생각났고, 신경 쓰였어. 널 보면서 설레고 두근거렸고. 이런 감정이 처음이라서 당황스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해서 너한테 흔들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지호는 계속 말해보라는 듯 끄덕였다.


“너한테 다 말할 수는 없지만, 난 소중한 사람한테 받는 상처가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 잘 알아. 그게 어떤 건지 아니까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어. 널 좋아하다가 나중에 상처받고 힘들어질까 봐. 그럴 바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거든.”

이수는 시선을 내리며 말했다.


“너한테 수없이 고마웠고 네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지만, 내 감정을 인정하고 널 만날 자신이 없었어. 네가 부담스러웠던 것도 사실이고 또…….”

이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넌 왠지 헤어질 때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돌아설 것 같아서……. 널 좋아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런 순간이 오면 내가 너무 힘들 것 같았어. 그래서 널 좋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마지막 말을 하면서 이수는 민망한 웃음을 보탰다.

이수는 떨리는 목소리도 아니었고, 취했다는 걸 잊을 만큼 차분한 표정과 눈빛이었다.

지호는 이수의 솔직한 고백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차분한 이수의 얼굴 위로 처연하게 울던 모습들이 겹쳐 보였다.

눈앞에 보이는 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기억에 마음에 아팠다.

지호는 안타까운 마음에 이수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래서 나랑 아무것도 안 하고 싶었어?”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니까.”

“그게 노력한다고 가능한 일이야?”

“너만 괜찮으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친구로 지내고 싶었어.”

좋아하는 걸 알면서 친구로 지내자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지만, 그런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난 안 괜찮은데…….”

지호는 피식 웃었다.


“좋아하는 여자랑 어떻게 친구로 지내. 나는 너한테 친구가 아니라 남자가 되고 싶어.”

“…….”

“너 힘들게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좋아해줘.”

다정하게 바라보는 지호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감미로웠다.


“나랑 연애하자.”

이미 대답이 정해져 있다는 걸 알았지만, 이수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결국 이렇게 되었구나.’

심장이 다시 가쁘게 뛰었다.


“……싫어?”

대답을 기다리는 지호의 눈동자에서 처음으로 초조함이 느껴졌다.

그걸 지켜보는 이수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니. 좋아.”

취중 진담이었다.

**

이수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눈을 떴다.

어젯밤 숙소로 다시 돌아왔을 땐 대부분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이수는 일찍 잘 거라고 하고 도망치듯 2층으로 바로 올라갔다.

일부러 지호보다 먼저 들어오긴 했지만, 혹시나 의심스럽게 볼까 봐 가슴이 콩닥거렸다.

밤새 진정되지 않는 마음 때문에 이수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겨우 잠들었다.

숙취로 힘든 것보다 지호를 다시 볼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곰곰이 어제의 기억을 떠올리던 이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렇게까지 솔직할 필요는 없었는데, 구구절절 쓸데없는 말까지 너무 많이 했다는 생각이 들어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악!’

기억이 또렷해질수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수야, 일어났어?”

애라가 이수를 어깨를 툭 건드렸다.


“어? 어! 눈만 간신히 뜨고 있어.”

모로 누워 있던 이수가 흠칫 놀라며 일어나 앉았다.

여자 6명 중에 애라와 이수만 남아 있고 이미 다 내려가고 없었다.


“애들 벌써 다 내려갔네.”

“하여간 부지런하기도 해. 아까 보니까 주희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머리 감고 화장하고 있던데. 진짜 대단하지?”

“정말?”

이수는 두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머리도 띵하고 어깨도 무거웠다.


“너 어제 서지호랑 어디까지 갔다가 온 거야?”

애라는 이수가 돌아왔을 때 게임 중이라 눈인사만 했었다.


“펜션 앞에 가평천 있잖아. 거기 내려가서 바람 쐬고 왔어. 밤에 물소리 듣기 좋더라고. 달구경도 하고 뭐.”

이수는 괜히 찔리는 게 있어 고개를 슬쩍 돌리고 말했다.

말하는 동안 얼굴이 다시 화끈거리는 것 같았다.


“진짜? 두 시간이나?”

두 시간이나 걸렸었나.

그렇게 오래 걸린 줄도 몰랐다.


“아, 그렇게 오래 있었구나. 그냥 멍하게 앉아 있다 보니까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라고. 물멍 하느라. 하하.”

어설프게 둘러댄 이수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 야밤에 둘이서 물멍을 했다고? 물멍만? 쓰으읍! 좀 수상한데?”

애라가 촉을 발동시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수상하긴 뭐가.”

“어제 보니까 지호가 대놓고 너만 챙기던데. 내가 그동안 잘못 생각한 게 아니었어. 그치? 내 말이 맞지?”

사실 애라의 직감은 거의 다 맞은 셈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렇다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언젠가는 말하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아직 이수도 얼떨떨한 상태니까.

이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애매하게 웃었다.


“어제 너 나가고 주희가 그러는데, 주희가 지호한테 먼저 바람 쐬러 나가자고 했었대. 근데 자기랑 안 나가고 너 데리고 나갔다면서 완전 기분 상했더라고. 어제 술 진탕 마시고 취해서 징징거리고 난리였어.”

“아. 그랬구나. 난 그런 줄도 모르고…….”

이수는 어젯밤 주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너도 따라 나가고 싶어?”

 
평소에 얄미운 짓을 많이 해서 한마디 툭 던진 건데, 상황이 그랬다면 기분 상할 만도 했겠다.


“주희가 개강 파티 때부터 지호한테 대놓고 들이대는 거. 너도 느꼈지?”

“조금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주희는 자기가 스스로 여신이라고 생각하는 애잖아. 근데 자길 놔두고 지호가 너 챙기는 거 보고 자존심 상해서……. 쯧쯧쯧.”

애라가 혀를 끌끌 찼다.


“누울 자릴 보고 다리를 뻗어야지. 서지호 같은 애를 자기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참. 주희 자신감도 진짜 대단해.”

이수는 애라의 말을 듣고 가슴이 뜨끔해져 마른침을 삼켰다.

여기서 더 얘기하다간 다 털어놔야 할 것 같았다.


“애라야, 우리도 이제 내려가자.”

“얘들아, 라면 먹으러 내려와.”

때마침 아래층에서 아침 먹으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애라와 이수는 이불 정리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갔다.

**

이수는 아침 식사를 마무리하고 MT 마지막 일정인 등산 갈 준비를 하려고 다시 2층으로 올라왔다.

그때 갑자기 뒤따라 올라온 애라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이수야.”

애라는 허리를 반쯤 숙이고 한 손으로 아랫배를 움켜쥐었다.

잔뜩 찡그린 얼굴만 봐도 통증의 크기가 짐작이 갔다.


“너 배 아파?”

“응. 배가 갑자기 너무 아파. 배탈 났나 봐.”

“아휴! 어떡해. 나 비상약 챙겨온 거 있는데, 잠깐만 기다려.”

이수는 다급하게 가방을 열어 두통약, 소화제, 진통제를 비롯해 연고까지 다양하게 챙겨온 비상약 파우치를 꺼냈다.


“역시 정이수. 준비성 한번 끝내준다. 근데, 일단 나 화장실부터 갔다 와서…….”

아픈 배를 부여잡고 흐릿하게 웃던 애라는 말도 다 못 끝내고 다급하게 화장실로 달려갔다.

이수는 애라에게 줄 약을 챙기면서 자신이 먹을 두통약도 하나 꺼냈다.


‘숙취 해소제는 왜 생각 못했지. 그게 제일 필요한데…….’

이수는 아쉬운 대로 두통약 한 알을 먹었다.


“괜찮아?”

이수는 화장실 문 앞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이수야, 너 먼저 올라가. 아무래도 난 오늘 등산은 무리인 것 같아. 올라가다가 갑자기 화장실 가고 싶으면 큰일이잖아.”

“그래. 알았어. 식탁 위에 약 두고 갈 테니까 나와서 바로 먹어.”

원래도 가기 싫은 등산인데, 애라도 없이 무슨 재미로 가나 싶었다.

같이 아프다고 하기엔 일부러 빼는 것 같아 미안하고.

이수는 맥 빠진 얼굴로 마지못해 신발을 신고 느릿하게 현관을 나섰다.


“안 가고 뭐 해?”

현관을 나서자마자 마당 입구 기둥에 등을 기대고 서있는 지호가 보였다.


“어, 애라가 배 아프다 그래서 약 좀 챙겨 주느라고.”

“넌 괜찮아? 힘들어 보이는데.”

“좀 힘들긴 한데, 그래도 가야지. 다 같이 가기로 한 건데 내 맘대로 빠지기 미안하잖아.”

“힘들어도 의리로 가겠다?”

“응. 쉬엄쉬엄 가지 뭐.”

이수는 아침 먹을 때도 지호와 일부러 떨어져서 앉았다.

어제 일을 떠올릴 때마다 얼굴이 자꾸 달아올라서였다.

더구나 지호 앞에선 표정 관리가 안 될 것 같아 일단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는데.


“이수야. 너 열나는 거 아니야? 얼굴색이…….”

지호가 이수의 얼굴빛을 살피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 아, 아니 괜찮아. 어제 잠을 못 자서 그래.”

아니나 다를까 지호를 보니 즉각적으로 몸이 반응을 보였다.

이수는 차가운 손등으로 두 뺨을 꾹꾹 찍어 눌렀다.

날이 바뀌고 정신이 또렷해지자 뒤늦게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어제 지호 앞에서 태연할 수 있었던 건 모두 술의 힘이었다.

이수는 지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보기가 힘들었다.


“힘들면 나한테 얘기해.”

“…….”

손에 든 건 생수 한 병뿐이라 대신 들어줄 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힘들어도 도와줄 방법은 딱히 없었다.


“내가 업어줄게.”

이수가 기가 막혀서 웃자, 지호도 피식 웃었다.


“왜? 내가 못 할 것 같아?”

지호의 말을 듣고 이수는 다른 걱정이 생겼다.


‘사람들 앞에서 지호가 티 나게 행동하면 곤란한데.’

“저기, 서지호.”

기회가 있을 때 미리 부탁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단둘이 있을 시간이 앞으로 없을지도 모르니까.


“난 사람들한테 주목받는 거 되게 불편하거든.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사는 게 좋아. 그래서 혹시나 해서 부탁하는 건데 우리 일……. 아무도 몰랐으면 좋겠어.”

“우리 일? 무슨 일?”

지호는 이수의 목덜미가 붉어지는 걸 보며 슬며시 웃었다.


“후.”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이수가 한숨을 쉬었다.

이수는 자신을 놀리려고 일부러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지호를 흘겨보았다.


“사람들 앞에서 괜히 오해할 만한 행동하지 말라고. 손을 잡는다거나 그런 거. 어제도 이상하게 생각했을 거야.”

남들 시선에 무심한 지호라면 앞으로 남은 MT 일정 동안 안 그럴 거란 보장이 없었다.


“음……. 그러지 뭐.”

지호는 인심 쓰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둘이 있을 때만 잡으란 얘기지?”

지호가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물었다.


“아니. 내가 언제?”

“둘 중 하나는 하게 해줘야지. 어느 쪽이야?”

“…….”

“대답 안 하면 내 맘대로 한다?”

이수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지호는 이수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긴 손가락을 끼워 손깍지를 꼈다.


“이렇게!”

이수가 움찔 놀라서 쳐다보자 지호의 커다란 손이 이수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손만 잡았을 뿐인데, 이수는 온몸에 전기가 통한 것처럼 찌릿하고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지호와 맞닿은 손바닥으로 모든 신경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