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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어젯밤 이후로 (25/31)


25. 어젯밤 이후로
2023.05.24.



 
동우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산 정상에 도착한 지 20분이 지났는데, 아직 이수와 지호가 올라오지 않았다.

중간에 쉬는 시간을 생각해도 이쯤이면 다 올라왔어야 하는데.

동우는 무슨 사고가 생긴 건 아닌지 갑자기 걱정되었다.

길을 잃었거나 아니면 다쳤거나.


“하준아, 지호도 올라온다고 했지?”

“응. 아까 이수랑 뒤에서 오는 거 봤는데.”

“그래?”

“이수 때문에 늦나 보다.”

산행 리더인 동우는 맨 앞에서 올라오느라 뒤따라오는 이수를 챙기지 못했다.

어젯밤에도 지호와 나가서 밤늦게 돌아온 게 내내 신경 쓰였는데, 둘이 또 같이 있다고?

동우는 지호가 이수 손을 꼭 잡고 있었던 모습을 떠올렸다.

지호를 알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이수가 쉽게 그럴 리가 없는데…….

동우는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수가 애라 약만 챙겨 주고 바로 따라온다길래 먼저 출발한 거였는데.

기다렸다가 같이 오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다.


“내가 전화해볼게.”

동우는 이수의 번호를 찾아 통화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동우야, 나 애라야. 이수가 방에 핸드폰 두고 갔어.]

“아.”

[근데, 너 이수랑 같이 있는 거 아니야?]

애라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애들 다 올라왔는데, 이수가 아직 안 와서 어디쯤인지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그럼 지금 이수 혼자 산에 있는 거야?]

“……지호도 아직 안 왔어.”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그래? 둘이 같이 있으면 다행인데, 이수 혼자 길이라도 잃은 거면 큰일이잖아. 핸드폰도 없는데.]

“내가 지호한테 전화해볼게.”

전화를 끊은 동우의 표정이 잔뜩 굳었다.


“이수 핸드폰 방에 두고 갔대?”

“어.”

“그럼 내가 지호한테 전화해볼게.”

하준은 핸드폰을 꺼내며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어! 동우야, 저기 지호랑 이수 보인다!”

기진맥진한 이수가 산 정상까지 이어지는 마지막 계단을 힘겹게 올라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지호가 따라오고 있었다.

이수는 허리도 제대로 못 펴고 쓰러질 듯 흐느적거리며 걸었다.

동우는 이수가 올라오는 계단 앞으로 뛰어갔다.


“이수야, 많이 힘들어?”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이수가 고개를 들었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표정만 봐도 얼마나 지치고 힘든지 알 것 같았다.


“어…… 나…… 진짜…… 쓰러질 것…… 같아.”

이수는 가쁜 호흡으로 목소리를 뚝 뚝 끊으며 말했다.

마지막 계단을 다 올라 온 이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후……. 후…….”

이수는 바위로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오로지 정신력 하나로 버티고 올라왔다.


“이렇게 힘들면 중간에 돌아가지. 애라랑 같이 숙소에 있든가.”

동우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걱정스럽게 이수를 바라보았다.


“내가 오늘 등산이 처음이라 이렇게 힘들 줄 몰랐지.”

“이렇게 힘들어서 어떡해.”

“좀 쉬면 돼.”

이수는 걱정하지 말라며 흐릿한 웃음을 웃었다.

체력이 문제인 건지, 숙취가 문제인 건지 이수도 헷갈렸다.

이 정도 저질 체력은 아닌데.

다들 멀쩡하게 올라와 전망을 둘러보고 사진을 찍느라 바쁜데, 혼자서 힘들어 어쩔 줄 모르는 게 민망하기도 했다.


“동우야, 나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너 할 거 해.”

동우는 이수가 힘든 게, 마치 자기 탓인 것처럼 미안한 표정이었다.

지호는 느긋하게 전망을 둘러보다가 동우와 이수를 멀리서 바라보았다.

동우는 이수가 걱정돼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무릎까지 꿇고 그 옆을 지키고 있었다.


‘저러면서 이수랑 친구인 척한단 말이지. 이수는 그걸 의심도 안 하는 거고.’

지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



“이수야, 얼마 쉬지도 못했는데, 어떡하지? 지금 내려가야 하는데.”

동우는 축 처진 어깨로 앉아 있는 이수를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왜? 더 있다가 가면 안 돼?”

“일요일은 서울 올라가는 기차표가 2주 전부터 매진이라서 우리도 그 전에 미리 다 사놨거든.”

“아……. 몇 시 기차야?”

“1시 30분. 지금 내려가야 여유 있게 탈 수 있을 것 같아.”

정해진 기차 시간에 맞추려면 더 쉴 수 없다는 말이었다.


“알았어. 그럼 빨리 가야지 뭐.”

“좀 늦은 시간으로 예매할 걸 그랬나 봐. 시간 충분할 줄 알았는데.”

동우는 가야 한다고 하면서도 선뜻 출발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이수는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으며 동우의 어깨를 툭 쳤다.


“괜찮아. 얼른 애들 불러서 가자고 해. 이러다 다 늦겠다. 난 마지막에 따라갈게.”

동우는 마지못해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잠시 뒤 지호와 이수만 남기고 모두 하나둘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수야, 너 아직 힘들지?”

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수의 어깨를 누르며 물었다.


“응.”

“그럼 더 쉬었다가 가자.”

“지금 안 가면 기차 시간 늦을 텐데.”

“네 기차표 하준이한테 넘기고 넌 여기서 충분히 쉬다가 내 차 타고 올라가.”

지호는 이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너 다리 힘 풀려서 이대로 내려가다가 잘못하면 다칠 것 같아.”

이수도 솔직히 바로 내려갈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지호랑 단둘이 남아서 따로 가겠다고 하는 것도 썩 내키지 않아서 망설였다.


“아니면 진짜 내가 업고 내려갈까?”

이수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하준이한테 전화해서 얘기할게. 괜히 무리하지 말고 그렇게 해.”

 

**

혼자서 몇 시간째 방에서 뒹굴뒹굴하던 애라는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계속 아플 것 같았던 배는 약을 먹고 화장실 몇 번 다녀온 뒤로 가라앉았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려? 이럴 줄 알았으면 늦게라도 그냥 따라갈걸.”

이수가 잘 도착했다는 소식과 함께 곧 출발한다는 문자를 받은 지 한 시간이 훨씬 넘었다.

기다림에 지친 애라는 숙소에서 나와 등산로 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동우가 가장 먼저 보였다.


“동우야!”

“왜 나와 있어?”

“기다리다가 혼자 너무 지루해서.”

“배 아픈 건 다 나았고?”

“어. 이제 괜찮아.”

그때 하준이 핸드폰을 귀에 대고 통화하면서 내려왔다.


“어. 알았어. 지호야. 내가 그렇게 전해줄게.”

하준이 전화를 끊고 동우 앞으로 왔다.


“동우야, 이수랑 지호는 따로 오겠다고 우리 먼저 가래.”

“뭐?”

“진짜?”

“왜?”

그 자리에서 하준의 얘기를 들은 모두 한 마디씩 되물었다.


“아까 이수가 너무 힘들어해서 바로 못 내려왔대. 계속 쉬다가 좀 전에 내려오기 시작했다는데.”

“아.”

동우는 탄식 같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이를 악물었다.


‘끝까지 지호랑…….’

가슴속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솟는 기분이 들었다.


“와! 서지호 이수한테 왜 이렇게 잘해줘? 아까 올라올 때도 둘이 같이 오더니…….”

주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입을 삐죽거렸다.


“일부러 둘이 따로 가려고 처음부터 작정한 거 아니야? 어젯밤에도 단둘이 나가서 한참 만에 들어왔잖아. 둘이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던 거야?”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주희는 찌푸린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희는 서울로 올라갈 때 내심 지호 차를 타고 갈 기대를 했던 터라 실망이 더 컸다.


“주희야, 이수가 너보다는 지호랑 더 친해.”

애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수에게 당장 물어볼 방법은 없지만, 애라는 자신의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데 점점 확신이 생겼다.


“하준아 넌 뭐 아는 거 없어? 너 지호랑 친하잖아.”

“그런 거 없어. 이수가 오늘 힘들어하니까 그냥 챙겨준 거겠지. 지호가 차가워 보여도 알고 보면 엄청 다정한 면이 있거든.”

하준은 주희의 시선을 피하며 시치미를 뗐다.

동아리 친목 도모 따윈 관심도 없을 지호가 MT에 온 이유를 하준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어젯밤부터 계속 이수 옆에 있었던 것도 그렇고, 등산은 지호의 계획이 아니었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따라 이수가 저렇게 힘들어하며 제때 내려오지 못한 건 하늘이 지호를 도운 건지도 몰랐다.

**

조수석에 앉은 이수의 고개가 계속 꾸벅꾸벅 흔들렸다.

정말 기나긴 하루였다.

한 시간째 운전 중인 지호 옆에서 이수는 졸음과 싸우고 있었다.

차에 은은하게 배어 있는 지호의 향기가 몸을 더 노곤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부드러운 담요를 덮고 있는 이수의 몸이 안락한 시트 위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꾸 눈이 감겨. 자면 안 되는데.’

졸음에 겨워 고개가 계속 이리저리 흔들렸다.

이수는 무겁게 내려앉는 눈꺼풀을 밀어 올리느라 안간힘을 썼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이수야, 편하게 자.”

안 자려고 애쓰는 이수가 안쓰러워 보다 못한 지호가 말했다.


“너 운전하는데 나 혼자 자기 미안해서.”

지호는 잔잔한 피아노 연주곡을 틀었다.


“들으면서 편하게 자. 네가 그러니까 내가 더 신경 쓰여.”

그 뒤로도 한참을 고군분투하던 이수는 결국 잠이 들었다.

이수가 잠든 걸 확인한 지호는 볼륨을 작게 줄였다.

쌕쌕거리는 이수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처음부터 편하게 자라니까.”

지호는 곤하게 잠든 이수를 흘깃 보며 피식 웃었다.

일요일 오후라 교외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차들이 많아 지호의 차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꽉 막힌 도로는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흐으음.”

잠에서 깬 이수는 작게 기지개를 켜며 눈을 떴다.


“서울이네.”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잘 잤어?”

“응. 나 얼마나 잤어?”

“한 시간 정도?”

“오래 잤네. 잠깐 졸다가 깬 줄 알았는데. 미안해. 운전하는데 옆에서 잠만 자서.”

“피곤하면 더 자도 돼.”

“혼자 잔 것도 미안한데 뭘 더 자. 잠도 다 깼어.”

이수는 몇 시간째 운전 중인 지호가 너무 힘들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많이 피곤하지?”

이수는 정면을 응시하며 괜찮다고 말하는 지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말없이 무표정하게 있으면 날렵한 턱선 때문인지 차가워 보였다.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매력적인 미소 하나로 사람 마음을 순식간에 녹이기도 했다.

언제나 여유롭고 자신감 넘치는 표정.

넓은 어깨에 군살 없는 몸매.

시선을 사로잡는 수려한 얼굴.

달콤하고 감미로운 목소리.

이수는 이런 남자의 마음을 가졌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젯밤 기억이 아직 너무 생생한데, 현실이 아닌 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수는 처음 경험해 본 감각이었다.

지호의 입술이 닿았던 모든 순간, 설명하기 힘든 감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잠깐 떠올린 것만으로 모든 신경이 그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얼굴로 열이 오르는 것 같아 고개를 살짝 저었다.

어젯밤 이후로 많은 게 달라진 기분이었다.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고, 보고 싶다고 말해도 되고, 지금처럼 마음껏 바라봐도 된다.


“이수야, 배고프지 않아? 우리 점심도 못 먹었잖아.”

지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허기가 느껴졌다.

아침부터 먹은 거라곤 라면 몇 젓가락과 물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운동은 지나치게 많이 했고.


“우리 저녁 먹고 갈래?”

“그래 좋아. 오늘 저녁은 내가 살게. 그동안 너한테 받은 거 조금이라도 갚아야지.”

진작 밥 한번 살걸.

이게 뭐라고 지금까지 안 했을까.


“그럴 필요 없는데…….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이수의 선선한 대답에 지호가 다정하게 웃으며 물었다.


“난 다 잘 먹으니까 너 좋아하는 거 먹으러 가.”

“그래.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말이 끝나자마자 지호는 속도를 높였다.

첫 데이트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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