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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첫 데이트 (26/31)


26. 첫 데이트
2023.05.27.



엘리베이터에 오른 지호는 59층을 눌렀다.


“오늘 고생했으니까 맛있는 거 먹자. 너도 좋아할 것 같아서 왔어.”

지호를 따라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자 통으로 된 유리창 너머로 화려한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MT 가느라 편하게 입은 옷차림으로 들어가는 게 민망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직원의 안내에 따라 창가를 바라보는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바로 눈앞에 그림처럼 펼쳐진 야경을 바라보며 연인과 나란히 앉아서 먹는 저녁 식사라니.

데이트 장소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곳이었다.

직원이 두고 간 메뉴판을 펼친 이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저녁 코스는 최소 15만 원에서 시작해서 30만 원까지 다양했다.

이런 분위기를 생각하면 이해 못 할 가격도 아니었다.


‘여기서 저녁 한 끼로 얼마를 써야 할까.’

통 크게 쏘기로 마음먹고 메뉴를 살펴보는데, 지호가 메뉴판을 펼치지도 않고 이수에게 물었다.


“이수야, 너 뭐든 잘 먹으면 내가 주문할까?”

이미 마음속으로 정해둔 메뉴가 있는 것 같았다.


“그래. 네가 좋아하는 걸로 해.”

이런 데서 먹으면 뭔들 맛있지 않을까.

지호가 주문하는 동안 이수는 홀린 듯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주 오는 곳인가 봐.”

직원이 물러간 뒤 이수가 지호를 보며 말했다.


“나도 오랜만에 왔어. 이런 데 혼자 올 수는 없잖아.”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답게 예쁘게 차려입고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많이 보였다.


“여긴 무슨 기념일 같은 날 오면 좋겠다.”

“우리도 오늘 기념일이잖아. 연애 시작하고 첫 데이트니까.”

“아, 그러네.”

이수가 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연애와 데이트라는 낯선 단어가 주는 간지러운 느낌에 손발이 오그라드는 기분이 들었다.


“우리 첫 데이트 장소로 어때? 맘에 들어?”

“아주 근사해.”

“그럼 자주 오자.”

그러기엔 너무 비싸서 부담스러운데.

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이수를 향해 지호가 빙그레 웃었다.

팔을 세워 얼굴을 비스듬히 기댄 지호는 야경엔 눈길도 주지 않고, 이수만 바라보았다.

시선을 의식한 이수가 고개를 슬쩍 돌렸다가 다시 정면을 보면서 말했다.


“나 그만 보고 너도 야경 봐.”

“난 야경보다 너 보는 게 더 좋은데. 너한테 나 봐 달라고 안 할 테니까 서로 보고 싶은 거 보자.”

이수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민망한 웃음을 지었다.


“눈으로만 보기 아쉬운데……. 이수야, 우리 사진 찍자.”

“어?”

이수는 전날 숙취와 등산으로 지친 자기 모습이 어떨지 생각해보았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초췌한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이런 몰골로 지호와 사진 찍고 싶진 않은데.

이수가 어어, 하면서 머뭇거리는 사이 지호는 야경이 나오도록 상체를 돌려 이수의 어깨를 바짝 끌어당겼다.

얼떨결에 이수는 지호의 핸드폰 카메라를 응시했다.

연달아 세 장의 사진을 찍었다.


 


“어때? 잘 나왔지?”

지호가 핸드폰 화면을 이수에게 내밀었다.

어두운 조명 덕분에 생각보다 분위기 있게 잘 나왔다.

사진 속 어딘가 수줍고 어색한 이수의 표정이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풋풋한 연인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표정을 숨기질 못하는구나.’

“그러네. 나도 기념으로 가지고 있게 보내줘.”

곧이어 코스대로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음식이 나올 때마다 직원이 친절한 설명을 곁들여주었다.

지호가 뭘 시켰는지도 모르고 먹기 시작했는데, 나오는 음식들이 전부 입이 떡 벌어지는 요리들이었다.

식전 빵 이후에 캐비어로 시작한 코스는 푸아그라, 트러플, 전복구이, 랍스터에 안심스테이크까지 이어졌다.

메뉴판을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나오는 음식들만 봐도 가장 비싼 코스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허기진 상태로 배를 채울 목적으로 먹기엔 아까운 요리들이었다.


“잘 먹네.”

“너무 맛있어.”

지호는 나오는 음식마다 맛있다고 감탄하면서 먹는 이수를 다정하게 바라보았다.

이수는 마지막에 나오는 디저트까지 남김없이 먹었다.

멋진 야경에 호사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지호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다.

이수는 자리에 앉아 형형색색 아름다운 야경을 잠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수는 일부러 지호가 없는 틈에 계산대로 갔다.

손 떨면서 계산하는 모습을 지호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계산 부탁드려요.”

이수는 빌지와 카드를 같이 내밀었다.

세계 3대 진미가 다 들어가 있던 코스요리 가격은 인당 30만 원이었다.

맛있게 먹긴 했지만 제 돈 주고 이런 걸 사 먹어보는 건 처음이라, 속이 좀 쓰렸다.

한편으론 그동안 지호한테 받은 걸 생각해보면 이 정도는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고.

기분 좋게 사주자고 생각하며 이수는 핸드폰 결제 알림 문자를 기다렸다.

그런데, 직원이 카드를 다시 내밀며 말했다.


“고객님 테이블 계산이 이미 끝났는데요.”

“그럴 리가요. 다시 확인해보세요.”

계산대 앞 모니터를 확인한 직원이 상냥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결제된 거 맞습니다. 아마 같이 오신 일행분께서 미리 하신 것 같아요.”

“아…….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이수는 카드를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다.

한 달 치 밥값은 굳었지만, 지호에게 갚아야 할 빚이 더 늘어난 것 같아 부담스럽기도 했다.


“이수야, 가자.”

생각에 잠긴 이수의 뒤로 지호가 다가오며 말했다.


“계산 네가 했다며. 왜 그랬어?”

“내가 설마, 진짜 너한테 사달라고 여기 데려온 줄 알았어?”

지호는 자기가 사는 게 너무 당연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저런 비싼 밥값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길 자주 오자고 한 걸 보면,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내가 사주기로 한 거잖아.”

“넌 다음에. 오늘은 같이 온 걸로 충분해. 여기 너랑 같이 오고 싶었거든.”

지호는 다정하게 웃으며 이수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나가자. 집에 데려다줄게.”

 

**

차에 탔을 땐 이미 8시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를 꼬박 지호와 함께 보냈다.


“바로 집으로 갈 거지?”

운전석에 앉은 지호가 내비게이션 화면으로 손끝을 가져가며 물었다.


“어. 저기……. 사실 나 얼마 전에 집에서 독립했어.”

가족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구구절절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 같아서, 아직 동우나 애라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정말?”

지호는 진심으로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우리 벚꽃 보러 간 날에는 집으로 갔었잖아. 그날 이후로 독립한 거야?”

이수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지호는 잠시 이수의 표정을 살폈다.


“축하할 일인 거지?”

“그럼. 당연하지. 내 소원이었어.”

이수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축하해!”

독립했다고 누군가에게 축하받은 건 처음이었다.

이수가 힘든 순간 함께 있었던 지호에게 축하받는 기분이 묘했다.

지호는 웃으며 말했지만, 머릿속으론 이수가 비 맞고 울었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 집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말끔히 사라졌지만, 그때 얼굴에 난 상처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 마음이 저릿했다.


“그럼 오늘은 진짜 이수 집으로 가는 거네?”

“응. 근데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으니까 당분간 너만 알고 있어.”

“와……. 이거 나만 아는 비밀이야? 영광인데.”

진심으로 환하게 웃는 지호를 보며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독립한 지 아직 한 달도 안 됐어. 나도 아직 실감이 안 나거든.”

이수는 연하게 웃으며 말했다.

생각만 해도 좋은지 이수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알았어. 비밀 지킬게. 내일 월요일이니까 빨리 가서 빨리 쉬자.”

지호는 이수의 새로운 집 주소를 입력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대로 지호의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행복한 이수의 얼굴을 보자, 지호도 덩달아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

요란한 시계 알람 소리에 이수가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으으으, 뭐야. 벌써 아침이구나.”

잠깐 눈을 감았다 뜬 거 같은데 벌써 아침이었다.

하아. 진짜 괴롭다.

이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침대 밖으로 나왔다.

기절하듯 깊게 자고 일어났는데도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이수는 뻐근한 몸을 간단한 스트레칭으로 풀었다.

꺼두고 잤던 핸드폰 전원을 켜자마자 알림과 진동이 한꺼번에 울렸다.

가장 최근에 메시지는 지호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이수야, 8시까지 집 앞으로 갈게. 천천히 준비하고 나와.

아침 7시에 보낸 문자였다.

약속도 없이 온다는 게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이수는 우선 시계부터 확인했다.

7시 15분.

시간은 충분했다.

이수는 평소대로 씻고 리코타 치즈를 듬뿍 넣은 샐러드를 아침으로 먹었다.

머리를 말리고 선크림과 빨간색 립스틱 하나로 1분 컷 화장을 끝냈다.

하얗고 맑은 피부 덕분에 립스틱 하나만 발라도 화사해지는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었다.

아침 식사 뒷정리까지 깔끔하게 마무리한 이수는 8시를 3분을 남겨두고 집에서 나왔다.

아파트 입구에 팔짱을 낀 채 차에 비스듬히 기대고 서 있는 지호가 보였다.

흰색 셔츠 위에 재킷 하나를 걸쳤을 뿐인데 그대로 찍어서 자동차 광고 화보로 써도 손색이 없을 만큼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이수는 지호를 감상하듯 바라보며 걸어갔다.

저도 모르게 얼굴 가득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일찍 나왔네.”

이수를 발견한 지호의 입꼬리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매력 넘치는 미소였다.

이수는 그런 지호를 눈에 담으며 말했다.


“일찍 아니고 지금 8시 정각이야.”

“여자들 준비하는 거 오래 걸리잖아. 기다릴 줄 알았는데, 칼같이 나왔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야.”

차가 출발하고 나서 이수가 지호에게 물었다.


“아침부터 갑자기 왜 온 거야?”

“아침부터 보고 싶어서.”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며 지호가 말했다.


“보고 싶을 때 참지 않기로 했잖아.”

자연스럽게 웃으며 대답하는 지호를 보고 이수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보고 싶으면 이렇게 불쑥 찾아온다는 얘기였나.

이수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서 눈만 깜빡거렸다.


‘지호의 연애는 이런 식인 걸까.’

거침없고 솔직했다.


“어젠 잘 잤어?”

신호에 걸려 차가 잠시 멈춘 사이 지호가 이수를 바라보며 물었다.


“응. 집에 가자마자 씻고 바로 잤어. 근데도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더라. 나 엄청 피곤해 보이지?”

일어난 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몸이 무거웠다.


“예쁜데.”

“뭐야, 동문서답이잖아.”

이수가 피식 웃으며 눈을 살짝 흘겼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 건 어쩔 수 없었다.

심장에서 쿵, 소리가 난 것 같기도 했다.


“피곤해 보이냐고 묻길래, 예뻐 보인다고 말한 건데. 동문서답이야?”

지호의 능청에 이수의 광대가 슬금슬금 올라갔다.

이수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쁘다는 말 한마디에 금세 붉어진 얼굴을 지호에게 보이기 부끄러웠다.

지호는 갑자기 말이 없어진 이수를 흘깃 보았다.

예쁘단 말에 얼굴까지 빨개진 이수를 보고 지호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침부터 보고 싶어서 왔는데, 계속 얼굴 돌리고 있을 거야? 나 보고 있어. 돌아보면 바로 얼굴 볼 수 있게.”

이수가 마지못해 고개를 삐걱삐걱 겨우 반만 돌리고 정면을 보았다.


“내가 예쁘다는 말을 처음 했나. 볼 때마다 예쁘다고 생각했는데.”

혼잣말인 듯 지호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이수의 귀까지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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